□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카이사르 (2)
카이사르는 폐족으로 지내오던 마리우스 추종자들을
복권시킴으로서 탄탄한 정치적 지지기반을 구축했다.
카이사르가 로마에 돌아와서 최초로 행동에 옮긴 일은 속주를 돌보는 데 소홀했다는 이유로 돌라벨라를 탄핵한 것이었다. 비록 탄핵 시도는 실패했지만 이때 카이사르는 그리스 속주들을 위해 총대를 멤으로써 상당한 숫자의 지지자들을 규합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인기가도를 질주하는 변호사였다. 그가 누린 인기의 비결은 단지 유려한 말솜씨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평민들처럼 낮은 계급의 로마인들과도 허심탄회하게 소통하는 데 열심이었다. 더욱이 그는 남들을 위한 일이라면 과소비를 서슴지 않았다. 겸손한 소통과 화려한 소비의 좀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상한 조합이 카이사르를 로마 정가의 떠오르는 샛별로 만들었다.
반대파들은 카이사르의 재산이 탕진되면 그의 인기도 곧 시들해지리라고 계산했으나 이는 중대한 오판이었다. 카이사르가 평민들을 위해 하나를 쓰면 그에게는 둘을, 셋을 기꺼이 빌려주겠다는 후원자들이 이내 찾아왔다. 빚도 재산이라는 얘기가 카이사르처럼 완벽히 부합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그가 진 부채는 괜찮은 공직도 얻기 전에 이미 1천 3백 탈란톤에 달했다. 그렇지만 손에 넣은 명성의 크기와 평판의 무게에 견주면 이 금액은 사실상 푼돈에 지나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뒤엎기를 꿈꾸는 급진적 개혁주의자임을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은 키케로였다. 그는 카이사르의 친절하고 명랑한 얼굴 밑에 독재체제를 구축하려는 치밀한 계획과 냉혹한 야심이 숨어 있음을 눈치 챘다.
카이사르가 투자금을 두둑한 배당까지 곁들여서 회수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군사 호민관직을 놓고서 가이우스 포필리우스와 겨루자 평민들은 이 정치신인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내줬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카이사르가 자신의 이념적 뿌리라고 해야 할 마리우스를 정치적으로 복권시킨 일이었다.
그의 고모인 율리아의 영결식장에서 카이사르는 조카 자격으로 추도사를 낭독한 다음 마리우스의 형상을 들고서 장례행진을 벌였는데, 마리우스는 물론이고 그 동료들마저도 술라에 의해 공공의 적으로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나와 행렬에 동참했다.
여론이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기민하게 감지한 카이사르는 민심을 포섭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아내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나이 많은 여인의 죽음에만 조사를 하는 로마사회의 전통적 관행을 깨고 고인이 된 부인을 위해 장례연설을 하여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을 감동시켰다.
이 인기 만점의 남성이 독신으로 살 리 만무했다. 그는 법무관 임기가 종료된 후에 폼페이아를 세 번째 아내로 맞았다. 새로 가정을 꾸렸다고 해서 씀씀이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헤퍼졌다. 그는 심지어 사재를 털어 아피아 가도를 정비하기까지 했다. 조영관으로 취임해서는 로마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구경거리와 풍성한 먹을거리를 마구 제공했다. 그러고선 더 큰 권력과 보다 명예로운 관직을 찾아 나섰다.
- 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카이사르 (2)
카이사르는 폐족으로 지내오던 마리우스 추종자들을
복권시킴으로서 탄탄한 정치적 지지기반을 구축했다.
카이사르가 로마에 돌아와서 최초로 행동에 옮긴 일은 속주를 돌보는 데 소홀했다는 이유로 돌라벨라를 탄핵한 것이었다. 비록 탄핵 시도는 실패했지만 이때 카이사르는 그리스 속주들을 위해 총대를 멤으로써 상당한 숫자의 지지자들을 규합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인기가도를 질주하는 변호사였다. 그가 누린 인기의 비결은 단지 유려한 말솜씨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평민들처럼 낮은 계급의 로마인들과도 허심탄회하게 소통하는 데 열심이었다. 더욱이 그는 남들을 위한 일이라면 과소비를 서슴지 않았다. 겸손한 소통과 화려한 소비의 좀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상한 조합이 카이사르를 로마 정가의 떠오르는 샛별로 만들었다.
반대파들은 카이사르의 재산이 탕진되면 그의 인기도 곧 시들해지리라고 계산했으나 이는 중대한 오판이었다. 카이사르가 평민들을 위해 하나를 쓰면 그에게는 둘을, 셋을 기꺼이 빌려주겠다는 후원자들이 이내 찾아왔다. 빚도 재산이라는 얘기가 카이사르처럼 완벽히 부합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그가 진 부채는 괜찮은 공직도 얻기 전에 이미 1천 3백 탈란톤에 달했다. 그렇지만 손에 넣은 명성의 크기와 평판의 무게에 견주면 이 금액은 사실상 푼돈에 지나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뒤엎기를 꿈꾸는 급진적 개혁주의자임을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은 키케로였다. 그는 카이사르의 친절하고 명랑한 얼굴 밑에 독재체제를 구축하려는 치밀한 계획과 냉혹한 야심이 숨어 있음을 눈치 챘다.
카이사르가 투자금을 두둑한 배당까지 곁들여서 회수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군사 호민관직을 놓고서 가이우스 포필리우스와 겨루자 평민들은 이 정치신인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내줬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카이사르가 자신의 이념적 뿌리라고 해야 할 마리우스를 정치적으로 복권시킨 일이었다.
그의 고모인 율리아의 영결식장에서 카이사르는 조카 자격으로 추도사를 낭독한 다음 마리우스의 형상을 들고서 장례행진을 벌였는데, 마리우스는 물론이고 그 동료들마저도 술라에 의해 공공의 적으로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나와 행렬에 동참했다.
여론이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기민하게 감지한 카이사르는 민심을 포섭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아내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나이 많은 여인의 죽음에만 조사를 하는 로마사회의 전통적 관행을 깨고 고인이 된 부인을 위해 장례연설을 하여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을 감동시켰다.
이 인기 만점의 남성이 독신으로 살 리 만무했다. 그는 법무관 임기가 종료된 후에 폼페이아를 세 번째 아내로 맞았다. 새로 가정을 꾸렸다고 해서 씀씀이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헤퍼졌다. 그는 심지어 사재를 털어 아피아 가도를 정비하기까지 했다. 조영관으로 취임해서는 로마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구경거리와 풍성한 먹을거리를 마구 제공했다. 그러고선 더 큰 권력과 보다 명예로운 관직을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