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로물루스 (7)
![](https://steemitimages.com/DQmTCqQQEHjjzWFj4E9tE9Fjku9B4PnGRtQBjnTM9WAwKgx/%EC%8A%A4%ED%83%88%EB%A6%B0.jpg)
로물루스는 스탈린과는 달리 인기 있고 강력한 정적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반대파들을 모조리 일망타진하는 대대적인 숙청 작업의 구실로 삼지 않았다.
로마인들이 그를 예언자로 불렀던 일이 말해주듯이 로물루스는 경건한 종교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자 노력했다. 그가 베스타 여신을 모시는 신녀들을 시켜서 처음으로 성화를 점화했다는 이야기가 나온 배경이다. 성화에 최초로 불을 붙인 사람은 2대 왕인 누마였다는 설도 있다.
로물루스는 평상시에는 리투우스라는 구부러진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리투우스는 새들이 나는 모습을 보고서 점을 칠 때 사용하는 도구였다. 그로부터 300여 년 후 갈리아인들의 침략을 받아 로마가 불탔을 때 로물루스가 살아생전에 사용했던 이 지팡이만은 타기는커녕 불길에 그을린 흔적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는 국가의 존속은 가정의 평화와 사회의 질서 유지에 달렸다고 믿었다. 그가 이혼을 대단히 어렵게 만드는 법률을 제정한 이유다. 로물루스가 통치하던 시기의 로마에는 존속살인, 특히 친부살인을 처벌하는 별도의 법령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모든 살인을 친부살인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살인을 엄히 다스렸다는 의미다. 남을 죽여도 아버지를 죽인 것처럼 엄벌에 처해지니, 존속살인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니발 전쟁 직후 루키우스 호스티우스가 아버지를 살해하기까지 로마에서는 6백 년 가까이 그 어떠한 친부살인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로물루스와 타티우스의 협치는 두 사람이 권력을 분점한 지 5년째 접어드는 해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타티우스의 부하들이 길거리에서 맞닥뜨린 라우렌툼의 사절단을 습격했는데, 이들에 대한 처벌을 타티우스가 막으려 했다. 이 사건의 처리 방향을 둘러싸고 두 사람이 연정을 시작한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견이 발생했다. 더 이상의 다툼이 생겨나지 않은 것은 습격당해 죽은 라울렌툼 사절단의 동료들이 타티우스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타티우스는 라비니움에서 로물루스와 함께 제의를 집전하던 도중 피살되었다. 백주대낮에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나라의 임금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살인자들은 로물루스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그들은 로물루스의 공명정대함에 대한 찬사를 바치고는 사건현장으로부터 유유히 사라졌다. 로물루스는 타티우스에게 명예로운 장례를 치러준 다음 그의 시신을 아벤티누스 언덕에 만들어진 무덤에 묻었다. 레무스가 피살된 이후의 수습 방식과 판박이처럼 동일한 매끈한 일처리였다.
정작 기겁한 쪽은 로마의 보복을 두려워한 라우렌툼이었다. 라우렌툼 정부는 타티우스를 시해한 범인들을 전원 검거해 로마로 즉시 인도했다. 로물루스는 이들을 단죄하기는커녕 정당하게 원수를 갚았을 뿐이라며 모두 방면해줬다. 로물루스의 이러한 조치를 어떤 이들은 진심에서, 어떤 이들은 공포에서, 어떤 이들은 불가피한 처사라는 판단에서 순순히 받아들였다. 우려되었던 사비니 족의 반란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당근의 힘으로였든, 채찍의 두려움에서였든 사비니인들은 로물루스의 단독 통치를 기꺼이 용인할 만큼 이미 로마 사회에 깊숙이 동화되었다.
전권을 장악한 로물루스는 국경의 안전과 영토의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라티니 족에게 사절을 파견해 동맹관계를 맺었다. 그리고는 여세를 몰아 오랫동안 로마와 갈등을 빚어온 피데나이를 무력으로 점령했다. 그는 새롭게 복속시킨 피데나이를 약탈하지도, 파괴하지도 않았다. 단지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 2천 5백 명을 4월 13일에 그곳으로 이주시켰을 뿐이다.
얼마 후 로마에는 원인 모를 역병이 찾아들어 무수한 시민들이 죽어나갔다. 천재지변이 발생할 경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치자의 부덕함을 탓하는 것이 인류의 변하지 않는 역사적 법칙이었다. 로마를 강타한 역병을 라우렌툼시 또한 피해가지 못했고, 사람들은 지난번의 의혹투성이 암살 사건에 대한 미온적 처리가 하늘의 노여움을 불러왔다며 로물루스를 한목소리로 원망했다. 로물루스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라우렌툼의 사절단을 습격한 자들과, 타티우스를 시해한 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처형시켰다. 그러자 역병의 기세가 곧 누그러졌다.
역병이 완전히 물러가기 전에 또 다른 불청객이 로마를 방문했다. 전염병으로 로마의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리라고 계산한 카메리아 사람들이 국경을 침범해왔다. 로마인들은 힘은 약해졌어도 독기는 더 오른 상태였다. 로물루스는 카메리아인들을 응징하기 위한 군대를 조직했고, 전투는 로마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6천 명의 카메리아인들이 죽었을 뿐더러 그들은 로마에게 자신들의 도시까지 내주고 말았다. 로마는 카메리아인들의 정확히 두 배쯤 되는 로마인들을 카메리아 땅으로 이주시켰다. 전염병으로 상당한 숫자가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다른 나라들을 식민지로 삼아야 할 정도로 급격한 인구 팽창을 겪고 있었다. 카메리아 편입은 로물루스가 로마에 자리 잡은 지 16년째 되는 해의 8월 달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때 로마가 획득한 전리품에는 말 네 마리가 끄는 청동전차도 포함돼 있었다. 로물루스는 이것을 불카누스 신전에 봉헌함과 아울러 승리의 여신으로부터 월계관을 수여받는 자기의 모습을 묘사하는 조각상을 제작하게끔 했다. 로물루스에 대한 개인숭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로물루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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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물루스는 스탈린과는 달리 인기 있고 강력한 정적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반대파들을 모조리 일망타진하는 대대적인 숙청 작업의 구실로 삼지 않았다.
로마인들이 그를 예언자로 불렀던 일이 말해주듯이 로물루스는 경건한 종교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자 노력했다. 그가 베스타 여신을 모시는 신녀들을 시켜서 처음으로 성화를 점화했다는 이야기가 나온 배경이다. 성화에 최초로 불을 붙인 사람은 2대 왕인 누마였다는 설도 있다.
로물루스는 평상시에는 리투우스라는 구부러진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리투우스는 새들이 나는 모습을 보고서 점을 칠 때 사용하는 도구였다. 그로부터 300여 년 후 갈리아인들의 침략을 받아 로마가 불탔을 때 로물루스가 살아생전에 사용했던 이 지팡이만은 타기는커녕 불길에 그을린 흔적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는 국가의 존속은 가정의 평화와 사회의 질서 유지에 달렸다고 믿었다. 그가 이혼을 대단히 어렵게 만드는 법률을 제정한 이유다. 로물루스가 통치하던 시기의 로마에는 존속살인, 특히 친부살인을 처벌하는 별도의 법령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모든 살인을 친부살인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살인을 엄히 다스렸다는 의미다. 남을 죽여도 아버지를 죽인 것처럼 엄벌에 처해지니, 존속살인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니발 전쟁 직후 루키우스 호스티우스가 아버지를 살해하기까지 로마에서는 6백 년 가까이 그 어떠한 친부살인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로물루스와 타티우스의 협치는 두 사람이 권력을 분점한 지 5년째 접어드는 해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타티우스의 부하들이 길거리에서 맞닥뜨린 라우렌툼의 사절단을 습격했는데, 이들에 대한 처벌을 타티우스가 막으려 했다. 이 사건의 처리 방향을 둘러싸고 두 사람이 연정을 시작한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견이 발생했다. 더 이상의 다툼이 생겨나지 않은 것은 습격당해 죽은 라울렌툼 사절단의 동료들이 타티우스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타티우스는 라비니움에서 로물루스와 함께 제의를 집전하던 도중 피살되었다. 백주대낮에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나라의 임금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살인자들은 로물루스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그들은 로물루스의 공명정대함에 대한 찬사를 바치고는 사건현장으로부터 유유히 사라졌다. 로물루스는 타티우스에게 명예로운 장례를 치러준 다음 그의 시신을 아벤티누스 언덕에 만들어진 무덤에 묻었다. 레무스가 피살된 이후의 수습 방식과 판박이처럼 동일한 매끈한 일처리였다.
정작 기겁한 쪽은 로마의 보복을 두려워한 라우렌툼이었다. 라우렌툼 정부는 타티우스를 시해한 범인들을 전원 검거해 로마로 즉시 인도했다. 로물루스는 이들을 단죄하기는커녕 정당하게 원수를 갚았을 뿐이라며 모두 방면해줬다. 로물루스의 이러한 조치를 어떤 이들은 진심에서, 어떤 이들은 공포에서, 어떤 이들은 불가피한 처사라는 판단에서 순순히 받아들였다. 우려되었던 사비니 족의 반란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당근의 힘으로였든, 채찍의 두려움에서였든 사비니인들은 로물루스의 단독 통치를 기꺼이 용인할 만큼 이미 로마 사회에 깊숙이 동화되었다.
전권을 장악한 로물루스는 국경의 안전과 영토의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라티니 족에게 사절을 파견해 동맹관계를 맺었다. 그리고는 여세를 몰아 오랫동안 로마와 갈등을 빚어온 피데나이를 무력으로 점령했다. 그는 새롭게 복속시킨 피데나이를 약탈하지도, 파괴하지도 않았다. 단지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 2천 5백 명을 4월 13일에 그곳으로 이주시켰을 뿐이다.
얼마 후 로마에는 원인 모를 역병이 찾아들어 무수한 시민들이 죽어나갔다. 천재지변이 발생할 경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치자의 부덕함을 탓하는 것이 인류의 변하지 않는 역사적 법칙이었다. 로마를 강타한 역병을 라우렌툼시 또한 피해가지 못했고, 사람들은 지난번의 의혹투성이 암살 사건에 대한 미온적 처리가 하늘의 노여움을 불러왔다며 로물루스를 한목소리로 원망했다. 로물루스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라우렌툼의 사절단을 습격한 자들과, 타티우스를 시해한 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처형시켰다. 그러자 역병의 기세가 곧 누그러졌다.
역병이 완전히 물러가기 전에 또 다른 불청객이 로마를 방문했다. 전염병으로 로마의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리라고 계산한 카메리아 사람들이 국경을 침범해왔다. 로마인들은 힘은 약해졌어도 독기는 더 오른 상태였다. 로물루스는 카메리아인들을 응징하기 위한 군대를 조직했고, 전투는 로마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6천 명의 카메리아인들이 죽었을 뿐더러 그들은 로마에게 자신들의 도시까지 내주고 말았다. 로마는 카메리아인들의 정확히 두 배쯤 되는 로마인들을 카메리아 땅으로 이주시켰다. 전염병으로 상당한 숫자가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다른 나라들을 식민지로 삼아야 할 정도로 급격한 인구 팽창을 겪고 있었다. 카메리아 편입은 로물루스가 로마에 자리 잡은 지 16년째 되는 해의 8월 달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때 로마가 획득한 전리품에는 말 네 마리가 끄는 청동전차도 포함돼 있었다. 로물루스는 이것을 불카누스 신전에 봉헌함과 아울러 승리의 여신으로부터 월계관을 수여받는 자기의 모습을 묘사하는 조각상을 제작하게끔 했다. 로물루스에 대한 개인숭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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