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로물루스 (9)
로물루스는 의문사를 당했지만 그가 세운 나라가 미래에 이뤄낼
찬란한 번영과 성장에 대해선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인간은 재산을 잃은 데 따른 원한을 결코 잊지 못한다며 통치자에게 재물과 관련된 일을 섣불리 처리하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한 바 있다. 마키아벨리는 아마도 로물루스를 반면교사로 상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로물루스가 흔적도 없이 홀연히 사라지기에 앞서서 직전의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의 분배를 둘러싸고 그와 원로원 사이에 심각한 불화가 빚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원로원 의원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은 채 전쟁에서 얻은 영토를 병사들에게 나누어줬다. 원로원 의원들이 내심 노예로 삼고 싶어 한 베이이 출신의 전쟁 포로들은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는 바람직한 결정이기는 했으나 문제는 그가 이로부터 비롯될 원로원 측의 반발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놓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로물루스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원로원 의원들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7일, 로마의 창건자 로물루스는 지상에서 돌연 자취를 감췄다. 실종되었다는 표현이 오히려 더 정확할 것이다. 주검은 물론 옷가지 같은 유류품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완전히 증발된 셈이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갑자기 사라진 날짜를 빼고는 그의 죽음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서술했다. 일설에 따르면 불카누스의 신전에서 원로원 의원들에게 살해된 다음 시신이 유기되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를 연상시키는 최후였다.
또 다른 주장에 의하면 ‘염소의 늪’이라는 곳에서 민중집회를 주재하고 있었을 때 비와 벼락을 동반한 거센 폭풍우가 느닷없이 몰아치면서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한다. 일종의 휴거였다. 어쩌면 이것은 그가 후세의 그라쿠스 형제처럼 지지자들과 함께 있다가 원로원 세력의 기습을 받고 동지들과 집단학살을 당했음을 알리려는 은유적 고발일 수도 있다.
로물루스가 사라지자 의혹의 시선과 비난의 화살이 원로원으로 일제히 집중되었다. 원로원은 왕이 사라진 원인을 밝히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진상 규명을 위한 모든 시도를 철저히 금압했다. 다만 로물루스에 대한 추모의 열기는 강제로 억누르지 않았다. 원로원 측의 석연치 않은 태도를 집요하게 추궁한 인물들이 몇 명 있긴 했으나 그들의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은 점으로 보아 커다란 반향은 얻지 못한 듯싶다. 로물루스는 죽은 권력이고, 원로원은 살아 있는 권력이었기 때문이리라.
로물루스 실종 사건에 종지부를 찍은 주역은 알바 왕국 태생의 원로원 의원인 율리우스 프로쿨루스였다. 그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로물루스를 만났다면서 다음과 같은 로물루스의 유지를 전했다.
“내가 인간들과 함께한 것은 신들의 뜻이었고, 나 또한 본래는 신이었네. 영토와 영광의 크기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해질 도시를 만들기 위해 잠깐 인간 세상에 내려왔을 뿐이라네. 내가 로마를 위한 퀴리누스(軍神)가 되어줄 테니 용기와 절제의 미덕을 함양하는 일에 앞으로도 계속 쉬지 않고 힘써 달라고 백성들에게 전해주게나.”
부활한 로물루스가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말이었지만 프로쿨루스가 평소부터 대중적 신망이 높았던 인물인 데다 로물루스가 신이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으므로 대부분의 로마인들은 이 이야기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수긍하였다. 그들은 의심과 비판을 거두고 로마의 한없는 번영과 성장을 간절히 기원하면서 로물루스를 신으로 받들기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로물루스가 사람들로부터 모습을 감추었을 때 그의 나이는 54세였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 지 38년째 되는 해였다. (끝)
- 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로물루스 (9)
로물루스는 의문사를 당했지만 그가 세운 나라가 미래에 이뤄낼
찬란한 번영과 성장에 대해선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인간은 재산을 잃은 데 따른 원한을 결코 잊지 못한다며 통치자에게 재물과 관련된 일을 섣불리 처리하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한 바 있다. 마키아벨리는 아마도 로물루스를 반면교사로 상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로물루스가 흔적도 없이 홀연히 사라지기에 앞서서 직전의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의 분배를 둘러싸고 그와 원로원 사이에 심각한 불화가 빚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원로원 의원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은 채 전쟁에서 얻은 영토를 병사들에게 나누어줬다. 원로원 의원들이 내심 노예로 삼고 싶어 한 베이이 출신의 전쟁 포로들은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는 바람직한 결정이기는 했으나 문제는 그가 이로부터 비롯될 원로원 측의 반발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놓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로물루스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원로원 의원들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7일, 로마의 창건자 로물루스는 지상에서 돌연 자취를 감췄다. 실종되었다는 표현이 오히려 더 정확할 것이다. 주검은 물론 옷가지 같은 유류품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완전히 증발된 셈이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갑자기 사라진 날짜를 빼고는 그의 죽음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서술했다. 일설에 따르면 불카누스의 신전에서 원로원 의원들에게 살해된 다음 시신이 유기되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를 연상시키는 최후였다.
또 다른 주장에 의하면 ‘염소의 늪’이라는 곳에서 민중집회를 주재하고 있었을 때 비와 벼락을 동반한 거센 폭풍우가 느닷없이 몰아치면서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한다. 일종의 휴거였다. 어쩌면 이것은 그가 후세의 그라쿠스 형제처럼 지지자들과 함께 있다가 원로원 세력의 기습을 받고 동지들과 집단학살을 당했음을 알리려는 은유적 고발일 수도 있다.
로물루스가 사라지자 의혹의 시선과 비난의 화살이 원로원으로 일제히 집중되었다. 원로원은 왕이 사라진 원인을 밝히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진상 규명을 위한 모든 시도를 철저히 금압했다. 다만 로물루스에 대한 추모의 열기는 강제로 억누르지 않았다. 원로원 측의 석연치 않은 태도를 집요하게 추궁한 인물들이 몇 명 있긴 했으나 그들의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은 점으로 보아 커다란 반향은 얻지 못한 듯싶다. 로물루스는 죽은 권력이고, 원로원은 살아 있는 권력이었기 때문이리라.
로물루스 실종 사건에 종지부를 찍은 주역은 알바 왕국 태생의 원로원 의원인 율리우스 프로쿨루스였다. 그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로물루스를 만났다면서 다음과 같은 로물루스의 유지를 전했다.
“내가 인간들과 함께한 것은 신들의 뜻이었고, 나 또한 본래는 신이었네. 영토와 영광의 크기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해질 도시를 만들기 위해 잠깐 인간 세상에 내려왔을 뿐이라네. 내가 로마를 위한 퀴리누스(軍神)가 되어줄 테니 용기와 절제의 미덕을 함양하는 일에 앞으로도 계속 쉬지 않고 힘써 달라고 백성들에게 전해주게나.”
부활한 로물루스가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말이었지만 프로쿨루스가 평소부터 대중적 신망이 높았던 인물인 데다 로물루스가 신이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으므로 대부분의 로마인들은 이 이야기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수긍하였다. 그들은 의심과 비판을 거두고 로마의 한없는 번영과 성장을 간절히 기원하면서 로물루스를 신으로 받들기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로물루스가 사람들로부터 모습을 감추었을 때 그의 나이는 54세였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 지 38년째 되는 해였다. (끝)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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