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알렉산드로스 (13)

in kr •  6 years ago  (edited)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알렉산드로스 (13)


알렉산드로스가 추진한 적극적인 세계화 정책은
헬레니즘의 걸작품인 간다라 미술을 탄생시켰다.

주적이 군사적으로 섬멸되자 알렉산드로스는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유럽과 아시아의 정치적 통합에 나선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한 첫 번째 조치로 파르티아에서 현지 주민들이 있는 의상을 입었다. 인종과 문화가 섞이면 적대감이 빨리 누그러지리라는 계산에서였다. 이는 왕이 앞장서서 이방 문화에 적응하겠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그는 페르시아풍의 복장을 착용하는 빈도를 점점 늘려나가 말을 탈 때도, 신하들과 면담을 할 때도 이 옷을 입었다. 오리엔트 지역의 관습을 그리스 세계의 전통과 융합시키려는 알렉산드로스의 노력은 후세에 ‘헬레니즘 문화’로 알려진 산물을 낳게 된다.

옷은 현지화를 추진했을망정 지배자로서의 심성까지 비겁하고 게으른 오리엔트 군주들의 그것을 닮아간 것은 아니었다. 무릎 아래에 화살을 맞아 뼈가 피부 바깥으로 튀어나와도, 돌덩이에 목뼈를 강타당해 한동안 시력이 나빠졌어도 알렉산드로스는 선봉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새롭게 정복한 지역의 젊은이들을 강건한 그리스 전사처럼 키우기 바랐다. 이러한 의도에서 그는 3만 명의 소년들을 뽑아 이들에게 그리스말과 함께 마케도니아의 무술과 진법을 가르쳤다.

결혼은 동맹을 공고히 하는 대표적 수단이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여인 록사나와 부부의 연을 맺었는데 표면적으로는 만찬장에서 그녀의 미모에 매료된 것이 혼인을 결심한 이유로 알려졌지만, 이면에는 두 나라 국민들 간에 피가 섞이면 마음도 섞인다는 고도의 노림수가 숨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판 세계화 정책에는 찬반이 엇갈렸다. 헤파이스티온의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반면에 크라테로스 같은 인물은 마케도니아 방식을 조금도 버리려 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인들과 일할 때는 헤파이스티온을 부르고, 마케도니아 출신들끼리만 국사를 논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크라테로스를 호출하는 식으로 갈등을 피해갔으나 이 두 사람 사이의 서로에 대한 뿌리 깊은 개인적 원한까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이즈음 파르메니온 부자 숙청 사건이 터지면서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쳤다. 파르메니온의 아들 필로타스는 평소에 비교적 평판이 괜찮은 인물이었는데 사단은 그의 칠칠맞은 말실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포로로 잡아 자신의 애인으로 삼은 한 여인에게 알렉산드로스의 업적은 실은 필로타스와 파르메니온 덕분에 이뤄진 것이라고 허풍을 떨었는데 이 얘기가 여러 사람의 입을 거쳐 마침내 알렉산드로스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갔다.

이런 사실을 알 턱이 없는 필로타스는 왕에 대한 험담에 점점 더 재미를 붙여갔다. 그럼에도 알렉산드로스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계속 모른 척했다. 파르메니온 부자의 세력이 두려웠던 데다 결정적 일격을 가할 확실한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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