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로물루스 (6)
로물루스와 타티우스가 합의해 주도한 로마와 사비니의 성공적 통합은
남북한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오랫동안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저비용-고효율의 귀중하고 유용한 교훈과 원칙을 제공해주고 있다.
로물루스는 튼튼한 요새에 의지해 농성전을 펴려던 애초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타티우스가 지휘하는 사비니 군대와의 정면대결을 선택했다. 양군은 언덕들로 둘러싸인 좁은 들판에서 싸우게 됐는데, 며칠 동안 내린 폭우로 말미암아 전장은 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패배한 측은 도망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곧 격전이 벌어졌고 사비니군의 전사자들 중에는 호스틸리우라는 자도 있었다. 그는 유부녀로서는 유일한 피랍자였던 헤르실리아의 남편이자, 나중에 누마 왕으로부터 로마의 왕위를 이어받은 호스틸리우스의 할아버지였다.
로마군 쪽에서도 사상자가 속출했다. 특히 위기일발의 순간은 로물루스가 머리에 돌을 맞고 휘청거릴 때였다. 왕이 땅바닥에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보이자 로마 병사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팔라티움을 향해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정신을 수습한 로물루스는 두 손을 하늘에 뻗고는 로마군이 대열을 유지하기를 기원했다. 왕의 모습에 감동한 로마군은 적군과 다시 맹렬하게 교전했다. 로마인들이 후퇴를 멈추고 전열을 재정비한 곳에는 이후 유피테르 스타토르라는 신전이 지어졌다. 스타토르는 ‘멈추는 분’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이다.
로마군이 젖 먹던 힘을 다해 적을 쫓아냈다고는 하나 그래봐야 전투는 여전히 로마의 영토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양군이 전투를 재개하려는 찰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사비니의 딸이자 로마의 아내인 수많은 여인들이 갑자기 몰려나와 양쪽 군대 사이에 자리를 잡고는 더 이상 싸우지 말 것을 간절하고 애달프게 호소했기 때문이다. 납치될 당시에는 젊은 아가씨였지만, 이제는 제법 나이든 부인네의 티가 나는 여인들의 팔마다 로마인과 사비니인의 피가 반반씩 흐르는 어린아이들이 안겨 있었다.
“저희를 납치한 자들을 저희가 처녀일 적에 왜 벌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이제 와서야 아내를 남편으로부터, 자식을 어머니로부터 떼어내려 하십니까? 만약 전쟁이 저희들 때문에 일어났다면 저희를 아버지와 집안사람들에게는 돌려보내시되, 저희 아이들과 남편을 빼앗아가지는 말아주세요. 제발 부탁이니 저희를 또다시 포로로 만들지는 말아주세요.”
헤르실리아가 앞장서 이와 같은 간청을 반복하자 다른 여인네들도 애원에 합세했다. 여인들의 바람에 더해 로마도, 사비니도 더 이상 출혈을 감수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희생을 치른 터였다. 결국 휴전이 선포되면서 평화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틈을 빌려 여인들은 이제는 장인과 사위로 묶이고, 매부와 처남으로 이어진 양측의 장병들을 서로 바쁘게 소개시켜주었다. 여인들은 부상자들을 피아를 가리지 않고 정성스럽게 치료하고 간호해주었다. 적십자 운동의 효시가 된 크리미아 전쟁에서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여인들은 사비니 사람인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자신들이 로마에서 어엿한 안주인으로 존중받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그네들에게 자기가 살고 싶은 나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하는 내용의 강화조약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여인들은 전쟁을 끝낸 공로를 인정받아 실잣기를 제외한 모든 노동과 임무를 면제받았다. 이와 동시에 여인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여러 가지 규칙이 제정되었다. 걸어 다닐 때는 여인들에게 길을 양보해야만 하고, 여인들과 같이 있을 경우에는 상스러운 말을 해서는 안 되며, 어느 남성도 공개된 장소에서는 여인에게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었다.
더 극적이고 중요한 사실은 로마와 사비니가 로마에서 함께 살기로 합의했다는 데 있다. 이들이 공존하기로 한 나라, 곧 도시의 이름은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 ‘로마’라고 부르기로 했다. 로마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호칭은 타티우스가 태어나 자란 고향의 이름을 빌려온 ‘퀴리네스’라고 정했다. 그리고 왕권은 로물루스가, 군대의 지휘권은 타티우스가 각각 나눠 갖기로 중지를 모았다.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인수합병(M&A)이었다.
이 성공적 인수합병 덕분에 로마의 인구는 단번에 두 배로 불어났다. 원로원 의원의 숫자 또한 두 배로 늘어났다. 사비니 족 가운데 투표로 선출된 100명이 새롭게 원로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두 나라 의회의 통합은 혹 있을지도 모를 정치적 혼란과 국정의 난맥상을 피하기 위해 점진적으로 이뤄졌다. 1개 군단의 정원도 기존 규모의 두 배로 확대되었다. 기병이 3백 명에서 6백 명으로, 보병이 3천 명에서 6천 명으로 각각 증원된 이유에서였다. 이외에도 신속하고 효과적인 국가통합을 꾀하기 위한 조치들로써 사비니 족은 로마의 역법을 도입했고, 로마인들은 사비니인들이 사용해온 긴 방패를 군대의 제식 무장으로 채택했다.
로마의 시민들은 이제 세 무리로 나눠졌다. 첫 번째 무리는 로물루스의 이름을 딴 ‘람넨세스로, 두 번째 무리는 타티우스의 이름을 따 ‘타티엔세스’라고 불렸다. 전자는 로마 출신, 후자는 사비니 출신으로 이해하면 그 정체를 파악하기가 쉽다. 우리가 주목할 대상은 세 번째 무리인 ‘루케렌세스’이다. 이들은 많은 도망자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었던 숲을 의미하는 로마어인 ‘루쿠스’에서 그 이름을 따온 집단으로서 출신과 전력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고 받아들인 로마 특유의 문호개방 정책을 상징하는 존재와 같았다. 이들 루케렌세스가 중간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면서 무게중심을 잡아준 덕분에 로마인들과 사비니인들이 무리 없이 조화롭게 섞일 수 있었다.
- 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로물루스 (6)
로물루스와 타티우스가 합의해 주도한 로마와 사비니의 성공적 통합은
남북한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오랫동안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저비용-고효율의 귀중하고 유용한 교훈과 원칙을 제공해주고 있다.
로물루스는 튼튼한 요새에 의지해 농성전을 펴려던 애초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타티우스가 지휘하는 사비니 군대와의 정면대결을 선택했다. 양군은 언덕들로 둘러싸인 좁은 들판에서 싸우게 됐는데, 며칠 동안 내린 폭우로 말미암아 전장은 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패배한 측은 도망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곧 격전이 벌어졌고 사비니군의 전사자들 중에는 호스틸리우라는 자도 있었다. 그는 유부녀로서는 유일한 피랍자였던 헤르실리아의 남편이자, 나중에 누마 왕으로부터 로마의 왕위를 이어받은 호스틸리우스의 할아버지였다.
로마군 쪽에서도 사상자가 속출했다. 특히 위기일발의 순간은 로물루스가 머리에 돌을 맞고 휘청거릴 때였다. 왕이 땅바닥에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보이자 로마 병사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팔라티움을 향해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정신을 수습한 로물루스는 두 손을 하늘에 뻗고는 로마군이 대열을 유지하기를 기원했다. 왕의 모습에 감동한 로마군은 적군과 다시 맹렬하게 교전했다. 로마인들이 후퇴를 멈추고 전열을 재정비한 곳에는 이후 유피테르 스타토르라는 신전이 지어졌다. 스타토르는 ‘멈추는 분’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이다.
로마군이 젖 먹던 힘을 다해 적을 쫓아냈다고는 하나 그래봐야 전투는 여전히 로마의 영토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양군이 전투를 재개하려는 찰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사비니의 딸이자 로마의 아내인 수많은 여인들이 갑자기 몰려나와 양쪽 군대 사이에 자리를 잡고는 더 이상 싸우지 말 것을 간절하고 애달프게 호소했기 때문이다. 납치될 당시에는 젊은 아가씨였지만, 이제는 제법 나이든 부인네의 티가 나는 여인들의 팔마다 로마인과 사비니인의 피가 반반씩 흐르는 어린아이들이 안겨 있었다.
“저희를 납치한 자들을 저희가 처녀일 적에 왜 벌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이제 와서야 아내를 남편으로부터, 자식을 어머니로부터 떼어내려 하십니까? 만약 전쟁이 저희들 때문에 일어났다면 저희를 아버지와 집안사람들에게는 돌려보내시되, 저희 아이들과 남편을 빼앗아가지는 말아주세요. 제발 부탁이니 저희를 또다시 포로로 만들지는 말아주세요.”
헤르실리아가 앞장서 이와 같은 간청을 반복하자 다른 여인네들도 애원에 합세했다. 여인들의 바람에 더해 로마도, 사비니도 더 이상 출혈을 감수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희생을 치른 터였다. 결국 휴전이 선포되면서 평화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틈을 빌려 여인들은 이제는 장인과 사위로 묶이고, 매부와 처남으로 이어진 양측의 장병들을 서로 바쁘게 소개시켜주었다. 여인들은 부상자들을 피아를 가리지 않고 정성스럽게 치료하고 간호해주었다. 적십자 운동의 효시가 된 크리미아 전쟁에서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여인들은 사비니 사람인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자신들이 로마에서 어엿한 안주인으로 존중받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그네들에게 자기가 살고 싶은 나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하는 내용의 강화조약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여인들은 전쟁을 끝낸 공로를 인정받아 실잣기를 제외한 모든 노동과 임무를 면제받았다. 이와 동시에 여인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여러 가지 규칙이 제정되었다. 걸어 다닐 때는 여인들에게 길을 양보해야만 하고, 여인들과 같이 있을 경우에는 상스러운 말을 해서는 안 되며, 어느 남성도 공개된 장소에서는 여인에게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었다.
더 극적이고 중요한 사실은 로마와 사비니가 로마에서 함께 살기로 합의했다는 데 있다. 이들이 공존하기로 한 나라, 곧 도시의 이름은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 ‘로마’라고 부르기로 했다. 로마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호칭은 타티우스가 태어나 자란 고향의 이름을 빌려온 ‘퀴리네스’라고 정했다. 그리고 왕권은 로물루스가, 군대의 지휘권은 타티우스가 각각 나눠 갖기로 중지를 모았다.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인수합병(M&A)이었다.
이 성공적 인수합병 덕분에 로마의 인구는 단번에 두 배로 불어났다. 원로원 의원의 숫자 또한 두 배로 늘어났다. 사비니 족 가운데 투표로 선출된 100명이 새롭게 원로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두 나라 의회의 통합은 혹 있을지도 모를 정치적 혼란과 국정의 난맥상을 피하기 위해 점진적으로 이뤄졌다. 1개 군단의 정원도 기존 규모의 두 배로 확대되었다. 기병이 3백 명에서 6백 명으로, 보병이 3천 명에서 6천 명으로 각각 증원된 이유에서였다. 이외에도 신속하고 효과적인 국가통합을 꾀하기 위한 조치들로써 사비니 족은 로마의 역법을 도입했고, 로마인들은 사비니인들이 사용해온 긴 방패를 군대의 제식 무장으로 채택했다.
로마의 시민들은 이제 세 무리로 나눠졌다. 첫 번째 무리는 로물루스의 이름을 딴 ‘람넨세스로, 두 번째 무리는 타티우스의 이름을 따 ‘타티엔세스’라고 불렸다. 전자는 로마 출신, 후자는 사비니 출신으로 이해하면 그 정체를 파악하기가 쉽다. 우리가 주목할 대상은 세 번째 무리인 ‘루케렌세스’이다. 이들은 많은 도망자들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었던 숲을 의미하는 로마어인 ‘루쿠스’에서 그 이름을 따온 집단으로서 출신과 전력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고 받아들인 로마 특유의 문호개방 정책을 상징하는 존재와 같았다. 이들 루케렌세스가 중간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면서 무게중심을 잡아준 덕분에 로마인들과 사비니인들이 무리 없이 조화롭게 섞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