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테세우스 (4)
에리네우스에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성씨로 더 잘 알려진 다마스테스가 버티고 있었다. 다마스테스는 운 나쁘게 사로잡힌 나그네들을 침대에 강제로 눕힌 후 침대에 비해 키가 크면 침대 바깥으로 나온 신체 부분을 잘라서, 작을 경우에는 침대의 크기에 맞도록 몸을 억지로 잡아 늘려 살해해왔다.
악당들이 남들이 해치는 방식을 악당들에게 그대로 돌려주는 동형보복의 응징 방법은 헤라클레스의 주특기였다. 이를테면 그는 박치기로 사람들을 해쳐온 테르메로스를 머리로 들이받아 저 세상으로 보냈다. 헤라클레스를 숭배하는 테세우스가 이러한 방식을 따라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다마스테스가 피비린내 진동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누울 차례였다. 그는 침대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다마스테스가 사라지는 것과 함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도 지상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췄다. 이것은 아주 중차대한 사건이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원칙과 기준이 없는 자의적 척도의 세상을 뜻했다. 테세우스는 이러한 고무줄 잣대가 더 이상 활개 치지 못하도록 확실히 대목을 박음으로써 통일된 법률과 일관된 기준이 출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육국을 멸하고 천하를 손에 넣은 진시황이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한 일도 따지고 보자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박살낸 것과 비슷했다.
테세우스는 여정을 계속해 케피소스 강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퓌탈로스의 자손들을 만난 테세우스는 두 가지 중요한 일을 겪었다.
첫째는 그동안 손에 묻힌 피에 대해 속죄의 제물을 바치며 정화의식을 치른 것이었다. 둘째는 고향을 떠난 이후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푸짐하고 따듯한 식사를 대접받은 것이었다. 주목한 만한 사실은 테세우스에게 퓌탈로스의 후예들 쪽에서 먼저 예를 갖췄다는 점이었다. 이는 테세우스가 더 이상 노골적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복종을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명성이 이미 세간에 널리 퍼졌음과 함께, 그가 이제는 완력뿐 아니라 설득력에서도 상당한 경지의 수준에 올라섰음을 뜻했다.
그가 그리고 그리던 아테네에 드디어 도착한 날은 헤카톰바이온 달의 여드렛날이었다. 모든 영웅서사가 그렇듯이 테세우스가 첫발을 들여놓을 당시의 아테네는 혼란과 아비규환의 도가니였다. 도시만 엉망진창인 것이 아니었다. 생부의 집안은 더욱더 처참한 상황이었다. 코린토스에서 도망쳐온 메데이아가 아버지와 살림을 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법으로 아이를 갖게 해주겠다며 아이게우스 집안의 안주인 행세를 해오고 있었다.
역시나 마녀답게 메데이아는 장성한 아들의 존재를 까맣게 모르던 아이게우스와 다르게 아테네에 들어온 테세우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잔치를 연 다음 테세우스를 독살하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테세우스는 아이게우스가 주고 간 칼로 고기를 썰었고, 아버지는 단박에 혈육을 알아봤다. 감격적 부자 상봉이 있은 후 아이게우스는 테세우스가 자신의 아들임을 정식으로 선포했고, 테세우스의 용기와 기지에 감탄한 아테네 사람들은 즉시 그를 동료 시민으로 받아들였다.
아이게우스의 왕국과 유산을 거저먹으려던 팔라스의 아들들로서는 테세우스의 느닷없는 출현이 당혹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팔라스 가문은 무력으로 사태를 해결하기로 결심하고는 두 무리로 나눠 한 무리는 아테네를 향해 행군하고, 나머지 한 무리는 가르겟토스에 매복했다. 그들은 요격을 위해 출동할 테세우스를 앞뒤에서 협공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팔라스 진영의 전령인 레오스로부터 이러한 계획을 귀띔 받은 테세우스가 매복한 무리를 덮쳐 전멸시키자 행진에 나선 무리마저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했다. 아이게우스 집안과 팔라스 가문 사이의 오랜 분쟁은 이로써 허망할 정도로 순식간에 종식되었다.
아이게우스 가문의 궤멸이 아테네의 질서와 안정의 회복을 곧바로 뜻하지는 않았다. 마라톤의 황소가 여전히 행패를 부리고 있었던 탓이다. 테세우스는 황소를 수호신으로 섬겼을 아테네 교외의 이 난폭한 부족을 굴복시킴으로써 그의 실력과 정통성에 대한 아테네 시민들의 의구심에 확실하게 종지부를 찍었다.
그렇지만 테세우스가 아테네를 이끌 만한 지도력과 수권능력이 있는지를 검증받을 시험대는 바다 건너 외부로부터 찾아왔다. 크레타의 사절단이 조공을 징수하려고 아테네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전설에 따르면 크레타에 조공을 바쳐온 것은 아테네에 들이닥친 재해와 질병을 모면할 방법은 그것뿐이라는 신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크레타의 왕인 미노스를 달래라는 신탁은 아테네인들이 체면치레를 목적으로 지어낸 핑계였을 가능성이 크다. 재앙을 피하려고 바치는 공물 자체가 바로 재앙이었던 이유에서다.
9년마다 일곱 명의 청년과 같은 숫자의 처녀들을 보내는 인신 공물은 커다란 인력 유출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면 14명의 젊은이들은 한결같이 명문가의 자제였을 테고, 따라서 그들을 따라간 수행원의 숫자까지 합치면 인구가 국력인 시대에 아테네는 국가의 성장과 발전을 심각하게 가로막을 무겁고 치명적 족쇄를 발목에 차고 있었던 셈이다.
☞ 퓌탈로스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고대 아티카 지방 출신의 영웅으로서 일설에는 아티카의 왕이었다고도 한다. 데메테르 여신에게 호의를 베푼 대가로 무화과나무를 받았다. (출처 : 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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