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마르쿠스 카토 (9)
카토는 로마의 고소왕이었다. 그는 90살까지 남들을 고소했고,
그 반대급부로 평생 동안 50번 이상 남들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카토는 남을 칭찬하는 데는 인색했어도 자기를 찬양하는 일에는 아낌이 없는 인물이었다. 카토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적병을 추격해 베어 넘기는 모습을 본 사람들마다 카토가 로마에 빚진 것보다는 로마가 카토에 빚진 것이 많다고 한결같이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니우스가 카토가 조국에 선사한 은혜에 보답하려면 온 로마 시민을 동원해도 부족하다고 이야기한 일은 사실인 듯하다.
카토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승전보를 본국에 알리는 전령 역할을 스스로 자임하기까지 했다. 자기자랑을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로마로 뛰어가는 카토의 모습을 생각하면 필자 역시 빙그레 웃게 된다. 이처럼 푼수끼 넘치는 모습들이 카토를 나이가 먹은 다음에도 귀여운 악동으로 만들어준 요소였다.
안티오코스 2세와 창검을 부딪칠 무렵이 카토가 군인으로서의 명성에서 정점을 찍었을 시기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치인으로서의 카토에게는 특별한 전성기가 없었다. 그는 늘 전성기였다. 그는 아흔의 나이에 세르비우스 갈바를 탄핵한 사건에서 보이듯이 죽기 직전까지도 왕성한 활동력을 과시했다.
카토는 부패한 관리들을 고소고발해 유죄 판결을 받아내는 데 최고의 열정과 노력을 쏟아 부었다. 본인이 고소고발을 직접 수행하기가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남들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열심히 부추겼다. 카토는 한마디로 ‘로마의 고소왕’이었다.
포에니 전쟁의 명장 스키피오도 카토의 고소를 피해가지 못했다. 카토는 페틸리우스를 사주해 스키피오를 법의 올가미에 엮으려 시도했으나 스키피오는 명문가의 후예이자 고귀한 인격자답게 카토의 법적 공세를 벗어났다. 반면에 그의 동생인 루키우스는 형과는 달리 무거운 벌금형에 처해졌다. 벌금을 납부할 능력이 없는 그는 옥에 갇힐 뻔했으나 호민관들의 개입 덕분에 영어의 몸이 되는 불행만은 가까스로 면할 수가 있었다.
카토의 “너 고소!” 정신을 설명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버지의 정적들을 고발하여 유죄를 끌어낸 젊은이를 그가 이렇게 격려한 일이었다.
“우리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영전에 고기가 아니라 부모님의 원수들이 흘린 눈물을 바쳐야 하네.”
카토가 남들을 고소하기를 즐겼으므로 당연히 남들 역시 카토를 고소하기 일쑤였다. 그는 평생에 걸쳐 최소한 50번 이상 피고석에 앉았다. 그중에는 유죄에 처해질 수도 있었던 위중한 사건들도 많았다. 마지막으로 고소를 당했을 때 그는 이미 여든여섯 살의 고령에 달해 있었다. 그는 “후배들 앞에서 선배가 자신을 변호하려니 쉽지가 않구려”라면서 착잡한 심경을 피력했다. 그로부터 4년 후 카토로부터 부고장이 아닌 고소장이 날아올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마르쿠스 카토 (9)
카토는 로마의 고소왕이었다. 그는 90살까지 남들을 고소했고,
그 반대급부로 평생 동안 50번 이상 남들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카토는 남을 칭찬하는 데는 인색했어도 자기를 찬양하는 일에는 아낌이 없는 인물이었다. 카토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적병을 추격해 베어 넘기는 모습을 본 사람들마다 카토가 로마에 빚진 것보다는 로마가 카토에 빚진 것이 많다고 한결같이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니우스가 카토가 조국에 선사한 은혜에 보답하려면 온 로마 시민을 동원해도 부족하다고 이야기한 일은 사실인 듯하다.
카토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승전보를 본국에 알리는 전령 역할을 스스로 자임하기까지 했다. 자기자랑을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로마로 뛰어가는 카토의 모습을 생각하면 필자 역시 빙그레 웃게 된다. 이처럼 푼수끼 넘치는 모습들이 카토를 나이가 먹은 다음에도 귀여운 악동으로 만들어준 요소였다.
안티오코스 2세와 창검을 부딪칠 무렵이 카토가 군인으로서의 명성에서 정점을 찍었을 시기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치인으로서의 카토에게는 특별한 전성기가 없었다. 그는 늘 전성기였다. 그는 아흔의 나이에 세르비우스 갈바를 탄핵한 사건에서 보이듯이 죽기 직전까지도 왕성한 활동력을 과시했다.
카토는 부패한 관리들을 고소고발해 유죄 판결을 받아내는 데 최고의 열정과 노력을 쏟아 부었다. 본인이 고소고발을 직접 수행하기가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남들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열심히 부추겼다. 카토는 한마디로 ‘로마의 고소왕’이었다.
포에니 전쟁의 명장 스키피오도 카토의 고소를 피해가지 못했다. 카토는 페틸리우스를 사주해 스키피오를 법의 올가미에 엮으려 시도했으나 스키피오는 명문가의 후예이자 고귀한 인격자답게 카토의 법적 공세를 벗어났다. 반면에 그의 동생인 루키우스는 형과는 달리 무거운 벌금형에 처해졌다. 벌금을 납부할 능력이 없는 그는 옥에 갇힐 뻔했으나 호민관들의 개입 덕분에 영어의 몸이 되는 불행만은 가까스로 면할 수가 있었다.
카토의 “너 고소!” 정신을 설명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버지의 정적들을 고발하여 유죄를 끌어낸 젊은이를 그가 이렇게 격려한 일이었다.
“우리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영전에 고기가 아니라 부모님의 원수들이 흘린 눈물을 바쳐야 하네.”
카토가 남들을 고소하기를 즐겼으므로 당연히 남들 역시 카토를 고소하기 일쑤였다. 그는 평생에 걸쳐 최소한 50번 이상 피고석에 앉았다. 그중에는 유죄에 처해질 수도 있었던 위중한 사건들도 많았다. 마지막으로 고소를 당했을 때 그는 이미 여든여섯 살의 고령에 달해 있었다. 그는 “후배들 앞에서 선배가 자신을 변호하려니 쉽지가 않구려”라면서 착잡한 심경을 피력했다. 그로부터 4년 후 카토로부터 부고장이 아닌 고소장이 날아올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