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극복의 리더십 : 리쿠르고스 (7)

in kr •  7 years ago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위기 극복의 리더십 : 리쿠르고스 (7)


스파르타는 칼에 앞서 말로 적들을 제압하곤 했다.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인들이 짧고 단순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이를 위해 소년들을 신랄하고 품위가 있으면서도 함축적 화법을 쓰도록 교육시켰다. 장황하고 번잡스러운 말투가 대화를 헛되고 지루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스파르타 사람들은 짧아도 요점만은 확실하게 전달하는 대화를 구사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를 바로 리쿠르고스 스스로가 보여줬는데, 그는 나라의 정치체제로 민주정을 채택할 것을 주장하는 논자를 이렇게 반박했다고 한다.

“당신의 집안에서부터 먼저 민주주의를 실천해보시구려.”

리쿠르고스는 도시의 방위를 강화할 효과적 방안이 있느냐는 물음에 관해선 “두꺼운 벽돌이 아니라 용감한 시민들로 둘러싸인 도시가 튼튼한 방어망을 가진 도시요”라고 대꾸했다.

리쿠르고스의 조카 카릴라오스도 삼촌과 난형난제였다. 그는 숙부가 만든 법률들의 분량이 너무 적다고 푸념하는 이를 향해서 “말이 필요 없는 사람은 법도 필요가 없습니다”라며 퉁명스럽게 핀잔을 주었다.

스파르타식의 대화법은 숙적인 아테네를 상대할 때 특히 빛을 발했다. 아테네의 한 웅변가가 스파르타인들을 못 배운 자들이라고 비난하자 파우사니아스의 아들 플레이스토낙스는 “지당한 말씀입니다. 우리 헬라스 민족들 중에서 아테네인들의 악랄한 짓거리를 배우지 못한 것은 오직 스파르타 사람들뿐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재치 있게 되받아쳤다.

리쿠르고스에 의해 개변된 스파르타에서는 정갈한 언어습관만큼이나 음악과 시 또한 중시되었다. 스파르타인의 시가들은 담백하고 소탈했다. 그들은 전쟁터에 나선 전사들의 상무정신을 꾸밈이 없는 운율로 일깨웠다. 진지하고 교훈적 주제를 담은 스파르타의 시와 노래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찬양하는 것들이 주된 내용이었다. 스파르타인들은 전쟁에 능해지기 위해 노래에 능해졌고, 노래에 익숙해짐으로써 전쟁에도 익숙해졌다. “칼과 키타라 연주자의 아름다운 기술은 저울의 양쪽에서 균형을 이루니”라고 읊은 한 스파르타 시인의 시가 근거 없는 허장성세만은 아니었다.

리쿠르고스가 호전적 성격이었다는 주장은 그가 전쟁에 매우 능했으며, 스파르타의 기병들을 50명으로 편제된 사각 대형으로 나눈 장본인이 리쿠르고스였다는 이야기 등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팔레론의 데메트리오스의 말을 빌려 리쿠르고스가 평화로운 시대에 법률을 완성했다는 쪽에 더욱 무게를 싣고 있다. 필자는 「영웅전」의 리쿠르고스 부분에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실려 있지 않은 사실을 감안해볼 때 그와 전쟁은 별 인연이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스파르타 군국주의의 아버지라고 할 사람이 정작 본인은 전쟁과 담을 쌓았다고 하니 상당히 역설적인 노릇이다.

리쿠르고스의 승부욕은 전쟁터가 아닌 운동경기장에서 발휘되었다. 그가 올림피아 전쟁 협정을 고안한 주인공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올림픽을 창시한 것은 아니고 단지 신의 명령에 따라 올림피아 대회를 대중적으로 크게 흥행시켰을 따름이라고 한다. 19세기 프랑스의 쿠베르탱 남작 같은 상상력 넘치는 창시자였건, 20세기 미국의 돈 킹처럼 탁월한 프로모터였건 리쿠르고스가 전쟁에서 헛되이 흘릴 피를 스포츠에서의 평화로운 땀으로 바꿔놓으려고 노력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성년이 될 때까지 의무적으로 계속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마치 병영생활에서처럼 철저한 규율과 빽빽한 일정 아래 놓였다. 스파르타인의 생명과 육체는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나라의 소유물이었던 탓이다.

숨 막힐 것 같은 통제가 채찍이었다면 당근은 풍부한 여가였다. 스파르타 시민들은 노동의 부담으로부터 원천적으로 해방, 아니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농사와 같은 필수적 노동은 모두 헤일로테스, 곧 노예들의 몫이었다. 따라서 스파르타인들은 전쟁에 관련되지 않은 그 어떠한 기술도 배울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사유재산이 금지된 사회인 터라 부를 축적하기 위한 노력도, 부를 지키기 위한 다툼도 요구되지 않았다. 전투에 참가하지 않거나 무예를 연마하지 않는 기간에는 화려한 합창이 동반된 성대한 축제가 열렸다. 축제가 없는 동안에는 사냥과 운동, 그리고 사람 사이의 교제 활동으로 시간을 보냈다.

서른 살이 되지 않은 시민들은 시장 출입이 엄금되었다. 그들은 필요한 물품을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조달했다. 30세 이후의 사람들도 시장에 들락거리는 일을 최소한으로 줄인 채 ‘레스케’라고 불린 수련장에 머물기를 즐겼다. 레스케에 모인 스파르타 시민들은 돈벌이나 상거래에 대한 얘기 대신에 고귀한 행위를 기리고 비열한 짓거리를 성토하는 대화를 나눴다.

후세인들은 스파르타가 경건하고 엄숙한 사회였다고 오해하기 쉽다. 스파르타는 부를 경계했을 뿐, 웃음마저 터부시한 나라는 아니었다. 일례로 웃음의 신의 모습을 본뜬 작은 조각상을 만들게 할 정도로 리쿠르고스부터가 농담과 익살을 즐겼다. 그는 시민들이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려는 이기적 욕망에 굴복하지 않기를 바랐을 따름이다.

스파르타인들은 여왕벌 주위에 모여든 일벌들처럼 공동체의 요구와 부름에 언제나 지체 없이 응할 능력과 태세를 갖춰야 했다. 파이다레토스는 스파르타 사람의 이러한 이타적 헌신성을 모범적으로 체현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300명의 최고시민에 뽑히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스파르타에는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이 300명이나 된다는 증거라며 오히려 크게 기뻐했다.

☞ 키타라 :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발현악기로 U자 모양의 나무로 된 공명통에 세로로 줄을 친 형태로 만들어졌다. 왼쪽 가슴에 안고서 오른손 손가락이나, 또는 상아로 된 픽으로 연주했다. (두산백과사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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