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2)
페리클레스는 강남주민으로서의 기득권을 버리고 강북으로 이사한
보기 드문 강남좌파이자, 주장과 행동이 일치하는 진짜 진보파였다.
그러나 아리스테이데스의 죽음에 뒤이어 테미스토클레스가 도편추방을 당하고, 키몬이 해외원정 때문에 나라를 비우는 기간이 길어지자 페리클레스는 정치에 뛰어들 결심을 굳혔다. 페르시아 전쟁의 주역이었던 이들 세 사람이 차례로 정치 일선에서 자취를 감추자 아테네 조야는 자연스럽게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민중파의 거두였던 테미스토클레스의 망명은 평민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강력하게 대변해줄 새로운 얼굴의 출현을 열렬히 바라게 만들었다. 마침내 때가 왔음을 느낀 페리클레스는 길 잃은 양떼처럼 방황하고 있는 평민들을 위한 목자를 자처하며 공적인 삶에 투신했다.
페리클레스는 공인의 신분에 걸맞도록 기존의 삶의 방식과 생활태도를 곧장 고쳐나갔다. 그는 일체의 사적인 만남을 거부했다. 그가 국가를 이끈 오래 기간 동안 식사를 하러 지인의 집을 방문한 경우는 단 한 차례뿐이었다. 그마저 친척인 에우뤼프톨레모스의 결혼 피로연에 참석한 것인데, 그는 제주를 따르는 의식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자리를 떴다.
페리클레스는 개인적 만남이 잦아지면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자제심을 지키고 품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민주주의자였음에도 대중과의 빈번한 접촉을 지양했다. 아주 중요한 문제에 관련해서만 자신의 입장을 연설 등을 통해 직접 밝혔으며. 웬만한 일에 대해서는 대리인들을 내세워 정책을 제시하거나 업무를 처리했다.
말투 또한 바뀌었다. 페리클레스는 아낙사고라스로부터 배운 자연과학을 수사학과 접목시킴으로써 연설의 신뢰도를 높였다. 그 덕분에 흰 것을 검게 만들고, 검은 것을 희게 만들 수 있는 발군의 말솜씨를 지니게 되었다. 멜레시아스의 아들 투키디데스 같은 사람은 자기가 레슬링 시합에서 페리클레스를 아무리 자주 바닥으로 메다꽂아도 페리클레스는 교묘한 언설로 승부의 결과를 바꿔놓는다고 불평할 지경이었다.
페리클레스가 말솜씨 하나 믿고 까부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늘 조심스러운 자세로 대중 앞에 섰으며, 말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언행에 극도의 신중을 기했다. 그러나 필요한 경우에는 대담한 비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기나를 ‘페이에이라우스의 눈엣가시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냈다.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 정권이 다소 귀족적이었다고 묘사했다. 페리클레스가 지금의 한국으로 치자면 강남좌파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었던 까닭에서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유약한 지식인이나 무책임한 훈수꾼 역할에만 만족하는 21세기 남한의 강남좌파들과는 달리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카리스마적 지도자였다. 그는 진보적 주장을 단순히 늘어놓는 수준을 넘어 진보적 정책을 과감히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 레슬링 시합의 결과를 놓고서 페리클레스에게 불평을 늘어놓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인 역사가 투키디데스와는 동명이인이다.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2)
페리클레스는 강남주민으로서의 기득권을 버리고 강북으로 이사한
보기 드문 강남좌파이자, 주장과 행동이 일치하는 진짜 진보파였다.
그러나 아리스테이데스의 죽음에 뒤이어 테미스토클레스가 도편추방을 당하고, 키몬이 해외원정 때문에 나라를 비우는 기간이 길어지자 페리클레스는 정치에 뛰어들 결심을 굳혔다. 페르시아 전쟁의 주역이었던 이들 세 사람이 차례로 정치 일선에서 자취를 감추자 아테네 조야는 자연스럽게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민중파의 거두였던 테미스토클레스의 망명은 평민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강력하게 대변해줄 새로운 얼굴의 출현을 열렬히 바라게 만들었다. 마침내 때가 왔음을 느낀 페리클레스는 길 잃은 양떼처럼 방황하고 있는 평민들을 위한 목자를 자처하며 공적인 삶에 투신했다.
페리클레스는 공인의 신분에 걸맞도록 기존의 삶의 방식과 생활태도를 곧장 고쳐나갔다. 그는 일체의 사적인 만남을 거부했다. 그가 국가를 이끈 오래 기간 동안 식사를 하러 지인의 집을 방문한 경우는 단 한 차례뿐이었다. 그마저 친척인 에우뤼프톨레모스의 결혼 피로연에 참석한 것인데, 그는 제주를 따르는 의식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자리를 떴다.
페리클레스는 개인적 만남이 잦아지면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자제심을 지키고 품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민주주의자였음에도 대중과의 빈번한 접촉을 지양했다. 아주 중요한 문제에 관련해서만 자신의 입장을 연설 등을 통해 직접 밝혔으며. 웬만한 일에 대해서는 대리인들을 내세워 정책을 제시하거나 업무를 처리했다.
말투 또한 바뀌었다. 페리클레스는 아낙사고라스로부터 배운 자연과학을 수사학과 접목시킴으로써 연설의 신뢰도를 높였다. 그 덕분에 흰 것을 검게 만들고, 검은 것을 희게 만들 수 있는 발군의 말솜씨를 지니게 되었다. 멜레시아스의 아들 투키디데스 같은 사람은 자기가 레슬링 시합에서 페리클레스를 아무리 자주 바닥으로 메다꽂아도 페리클레스는 교묘한 언설로 승부의 결과를 바꿔놓는다고 불평할 지경이었다.
페리클레스가 말솜씨 하나 믿고 까부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늘 조심스러운 자세로 대중 앞에 섰으며, 말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언행에 극도의 신중을 기했다. 그러나 필요한 경우에는 대담한 비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기나를 ‘페이에이라우스의 눈엣가시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냈다.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 정권이 다소 귀족적이었다고 묘사했다. 페리클레스가 지금의 한국으로 치자면 강남좌파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었던 까닭에서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유약한 지식인이나 무책임한 훈수꾼 역할에만 만족하는 21세기 남한의 강남좌파들과는 달리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카리스마적 지도자였다. 그는 진보적 주장을 단순히 늘어놓는 수준을 넘어 진보적 정책을 과감히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 레슬링 시합의 결과를 놓고서 페리클레스에게 불평을 늘어놓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인 역사가 투키디데스와는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