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8)
아테네인들은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종국에 함락시켰던 것처럼
이 세상에 그리스인들이 정복하지 못할 도시와 왕국은 없다고 믿었다.
당시의 아테네의 기세는 천하무적으로 보였다. 알키비아데스를 위시한 과격한 선동가들이 세계정복에 나서자고 대놓고 떠들 수 있는 배경이었다. 그들 생각에 인접한 시칠리아는 물론이고, 지중해 건너편에 자리한 전통의 강국 이집트와 신흥 강호인 카르타고조차 아테네 앞에 당장 무릎을 꿇을 것만 같았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인들 사이에 끓어오르는 위험한 충동과 과도한 모험심을 효과적으로 제어했다. 그러나 그가 퇴장한 이후에도 아테네 사회에 널리 팽배한 무모한 팽창욕구가 과연 안정적으로 다스려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페리클레스가 살아있을 때에는 아테네인들의 무절제한 정복욕은 위험수위를 넘지 않았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군사력을 기존의 영토와 세력권을 방어하는 데 주로 사용하였다. 그는 스파르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대립각을 세웠다. 스파르타 원정대에 의해 델포이의 성소로부터 축출당한 포키스 사람들을 무력을 써서 성소의 관리자들로 다시 복귀시킨 것도 이러한 기조의 연장선상에서였다.
플루타르코스는 아테네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시칠리아 원정의 결말을 후세인의 입장에서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전쟁을 그리스 안에서만 치르려고 했던 페리클레스의 선택이 옳았다고 평가한 이유다. 그러나 이건 결과론적인 얘기일 뿐, 전쟁의 향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었던 아테네인들은 페리클레스의 국지전 전략에 불만이 많았다.
페리클레스는 국지전 전략과 함께 매수 작전을 병행하였다. 스파르타의 왕인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중장보병이 주축을 이루는 대군을 이끌고 아티카로 침입해오자 그는 왕의 고문관으로 종군한 클레안드리다스를 매수해 적군을 철수시켰다. 진상을 알게 된 스파르타는 발칵 뒤집혔다. 왕은 무거운 벌금을 피해 도망쳤고, 클레안드리다스는 사형에 처해졌다.
클레안드리다스의 명예는 그의 아들인 귈립포스가 시칠리아 섬에 상륙한 아테네군을 전멸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일부나마 회복되었다. 뒤늦은 명예회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전자전이라고, 귈립포스가 공금을 횡령한 일이 발각되어 나라에서 치욕스럽게 쫓겨났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와의 싸움에 들어간 비용을 결산하면서 ‘잡비’로 10 탈란톤을 썼다고 장부에 기록하였다. 일각에서는 실제로는 해마다 10 탈란톤이 지출됐다고 주장했다. 페리클레스가 다수의 스파르타의 관리들을 회유하는 데 쓰인 돈이었다.
아테네는 중국의 송나라처럼 막대한 세폐를 거란이나 금나라에 바쳐가며 돈으로 평화를 산 것은 아니었다. 아테네 정부가 스파르타 관가에 돈을 뿌린 이유는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전쟁준비가 어느 정도 갖춰줬다는 판단이 서자 페리클레스는 신속하고 단호한 군사행동에 착수했다. 에우보이아 섬으로 건너가 아테네에 반기를 든 도시들을 공략했으며, 칼키디케와 헤스티아이아를 차례로 함락시켰다. 칼키디케와 헤스티아이아를 점령한 그는 원래 살고 있던 거주민들을 쫓아낸 다음 아테네의 시민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다. 아테네 함선들을 나포하고, 배에 탄 승조원들을 살해한 사건에 대한 복수였다.
에우보이아 원정이 있은 지 얼마 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30년의 효력을 갖는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강적 중의 강적이라고 할 스파르타와의 싸움을 피함으로써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페리클레스는 사모스 정벌을 위한 법안을 민회에서 통과시켰다. 사모스가 아테네가 중재하는 밀레토스와의 정전협상을 거부한 것이 개전의 명분이었다.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8)
아테네인들은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종국에 함락시켰던 것처럼
이 세상에 그리스인들이 정복하지 못할 도시와 왕국은 없다고 믿었다.
당시의 아테네의 기세는 천하무적으로 보였다. 알키비아데스를 위시한 과격한 선동가들이 세계정복에 나서자고 대놓고 떠들 수 있는 배경이었다. 그들 생각에 인접한 시칠리아는 물론이고, 지중해 건너편에 자리한 전통의 강국 이집트와 신흥 강호인 카르타고조차 아테네 앞에 당장 무릎을 꿇을 것만 같았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인들 사이에 끓어오르는 위험한 충동과 과도한 모험심을 효과적으로 제어했다. 그러나 그가 퇴장한 이후에도 아테네 사회에 널리 팽배한 무모한 팽창욕구가 과연 안정적으로 다스려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페리클레스가 살아있을 때에는 아테네인들의 무절제한 정복욕은 위험수위를 넘지 않았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군사력을 기존의 영토와 세력권을 방어하는 데 주로 사용하였다. 그는 스파르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대립각을 세웠다. 스파르타 원정대에 의해 델포이의 성소로부터 축출당한 포키스 사람들을 무력을 써서 성소의 관리자들로 다시 복귀시킨 것도 이러한 기조의 연장선상에서였다.
플루타르코스는 아테네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시칠리아 원정의 결말을 후세인의 입장에서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전쟁을 그리스 안에서만 치르려고 했던 페리클레스의 선택이 옳았다고 평가한 이유다. 그러나 이건 결과론적인 얘기일 뿐, 전쟁의 향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었던 아테네인들은 페리클레스의 국지전 전략에 불만이 많았다.
페리클레스는 국지전 전략과 함께 매수 작전을 병행하였다. 스파르타의 왕인 플레이스토아낙스가 중장보병이 주축을 이루는 대군을 이끌고 아티카로 침입해오자 그는 왕의 고문관으로 종군한 클레안드리다스를 매수해 적군을 철수시켰다. 진상을 알게 된 스파르타는 발칵 뒤집혔다. 왕은 무거운 벌금을 피해 도망쳤고, 클레안드리다스는 사형에 처해졌다.
클레안드리다스의 명예는 그의 아들인 귈립포스가 시칠리아 섬에 상륙한 아테네군을 전멸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일부나마 회복되었다. 뒤늦은 명예회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전자전이라고, 귈립포스가 공금을 횡령한 일이 발각되어 나라에서 치욕스럽게 쫓겨났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와의 싸움에 들어간 비용을 결산하면서 ‘잡비’로 10 탈란톤을 썼다고 장부에 기록하였다. 일각에서는 실제로는 해마다 10 탈란톤이 지출됐다고 주장했다. 페리클레스가 다수의 스파르타의 관리들을 회유하는 데 쓰인 돈이었다.
아테네는 중국의 송나라처럼 막대한 세폐를 거란이나 금나라에 바쳐가며 돈으로 평화를 산 것은 아니었다. 아테네 정부가 스파르타 관가에 돈을 뿌린 이유는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전쟁준비가 어느 정도 갖춰줬다는 판단이 서자 페리클레스는 신속하고 단호한 군사행동에 착수했다. 에우보이아 섬으로 건너가 아테네에 반기를 든 도시들을 공략했으며, 칼키디케와 헤스티아이아를 차례로 함락시켰다. 칼키디케와 헤스티아이아를 점령한 그는 원래 살고 있던 거주민들을 쫓아낸 다음 아테네의 시민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다. 아테네 함선들을 나포하고, 배에 탄 승조원들을 살해한 사건에 대한 복수였다.
에우보이아 원정이 있은 지 얼마 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30년의 효력을 갖는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강적 중의 강적이라고 할 스파르타와의 싸움을 피함으로써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페리클레스는 사모스 정벌을 위한 법안을 민회에서 통과시켰다. 사모스가 아테네가 중재하는 밀레토스와의 정전협상을 거부한 것이 개전의 명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