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테세우스 (6)
테세우스는 함대 건설이 완료되자 다이달로스와 같은 크레타 망명객들을 길라잡이로 삼아 크레타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크레타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연합함대 함재기들의 기습을 받은 진주만만큼이나 무방비 상태였다. 순식간에 항구를 제압한 테세우스와 그 부하들은 왕궁이 있는 크로노스까지 전광석화처럼 쳐들어가 미궁 앞에서 크로노스의 아들인 데우칼리온을 살해하고 크레타 군대를 전멸시켰다. 미노스는 왕명을 어기고 크레타를 탈출하는 다이달로스를 추격하던 도중 풍랑을 만나 시칠리아에 표착했다가 그곳에서 이미 오래전에 생을 마감한 터였다.
이 결과 크레타 왕국의 주인 자리는 자연스럽게 아리아드네의 차지가 되었고, 테세우스는 크레타 공주를 상대로 아테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한 다음 함대를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모든 함선들이 돌려받은 인질들에 더해 막대한 양의 전리품으로 만선을 이뤘음은 물론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테세우스가 크레타 왕국을 고질적으로 분열시켜온 오누이 사이의 권력 다툼을 영악하게 이용했음을 손쉽게 유추할 수가 있다. 아리아드네가 운동경기에 참가한 테세우스의 늠름한 모습에 반해 조국을 배반했다는 사연은 양측 사이의 정치적 밀약을 낭만적으로 은폐하기 위해 나중에 지어낸 이야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크레타의 장군인 타우로스는 아테네의 왕자와 크레타의 공주가 공모해 꾸민 쿠데타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는 씨름 시합에서 테세우스에게 패배한 일을 계기로 실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단지 운동경기에서 패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라의 용장을 숙청하는 국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타우로스가 실각한 결정적 원인은 그의 세력이 왕가를 위협할 정도로 강성해졌다는 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타우로스는 미노스의 왕비인 파시파에와 부적절한 관계라는 소문마저 나돈 터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크레타 궁정 내부에서 테세우스에게 협조한 세력을 완곡히 가리키는 표현으로 해석해야 할 듯싶다.
아이게우스는 다른 청년들의 부모들처럼 아들이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테세우스는 뿌듯한 성취감 때문에 너무나 흥분한 탓인지 무사귀환을 알리는 하얀색 돛을 다는 일을 깜빡 잊고 말았다. 배에 검은 돛이 걸렸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아이게우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절벽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뭍에 올라서야 아버지의 죽음을 비로소 알게 된 테세우스는 통한의 눈물을 뿌렸다.
이 또한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테세우스의 크레타 평정 작전이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뤄졌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전황에 대한 보고가 정기적으로 전령을 통해 아테네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태종 이방원이 생생히 보여주듯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나눠 갖기가 불가능한 자원이 권력이다. 더욱이 아이게우스는 구질서의 구심점이었고, 테세우스는 신흥 세력의 맹주였다. 공동의 적이 타도된 지금 두 남자는 더 이상 공존하기 어려운 관계로 치달았고, 잠깐의 반가움을 지나 곧장 서먹한 사이가 되었을 부자간의 권력투쟁은 아들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리라. 아이게우스의 석연치 않은 죽음은 나중에 테세우스에 의해 되풀이된다. 물론 이는 먼 훗날의 일이다.
아이게우스의 돌연한 죽음을 계기로 테세우스는 명실상부한 아테네의 1인자가 되었다. 자신의 구상과 청사진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여건이 제대로 마련된 셈이다. 테세우스가 집권하기 이전의 아테네의 세력권은 아테네 시와 그 인근의 촌락을 합친 데 지나지 않았다. 아이게우스는 명목상의 왕이었으나 실질적 위상과 역할은 부족장 정도에 머물렀다, 테세우스는 나라도 아니고, 마을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의 아테네를 번듯한 도시국가로 바꿔놓길 바랐다. 한마디로 나라를 세우고 싶었다. 이를 위해 테세우스가 내건 아테네의 양대 건국이념이 통합과 개방이었다.
종전까지 아테네인들은 아티카 지방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왔다. 이처럼 고립분산적 상태로는 공동의 이익도, 효율적 방어도 도모하기가 어려웠다. 반대로 다툼과 오해는 잦았다. 정신적 통합에 이르는 최적의 경로는 물리적 통합인 경우가 많다. 테세우스는 아티카의 주민들을 단일한 도시 내에 거주하도록 했다. 그가 동원한 방법은 20세기에 스탈린이 채택한 강제이주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각각의 촌락과 씨족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대화와 설득을 거듭하면서 아테네 시내로 거주지를 옮길 것을 제안했다. 평민과 빈자들은 그의 권유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반면에 재산과 권세를 지닌 계층은 이주를 망설였다. 도시로 거처를 옮기면 테세우스의 권력에 완전히 굴복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테세우스는 기득권층의 저항을 종식시킬 비장의 승부수를 띄웠다. 그는 모든 아티카 사람들이 아테네로의 이주를 완료하는 즉시 왕정을 폐지하고 민주정치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신은 군사령관과 법의 수호자 역할만을 맡겠다고 맹세했다. 상대방이 내려놓게 하려면 내가 먼저 내려놔야 한다는 소신의 실천이었다. 사실 기득권층 입장에서도 떠오르는 해인 테세우스와 무한정 대치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테세우스는 이들에게 타협에 나설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군대의 지휘권은 계속 손에 쥐었으니 테세우스로서는 명분과 실리 모두를 챙겼다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군함인 삼단노선
테세우스와 아테네의 병사들은 이 배를 타고서 크레타 항구를 급습했다.
- 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테세우스 (6)
테세우스는 함대 건설이 완료되자 다이달로스와 같은 크레타 망명객들을 길라잡이로 삼아 크레타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크레타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연합함대 함재기들의 기습을 받은 진주만만큼이나 무방비 상태였다. 순식간에 항구를 제압한 테세우스와 그 부하들은 왕궁이 있는 크로노스까지 전광석화처럼 쳐들어가 미궁 앞에서 크로노스의 아들인 데우칼리온을 살해하고 크레타 군대를 전멸시켰다. 미노스는 왕명을 어기고 크레타를 탈출하는 다이달로스를 추격하던 도중 풍랑을 만나 시칠리아에 표착했다가 그곳에서 이미 오래전에 생을 마감한 터였다.
이 결과 크레타 왕국의 주인 자리는 자연스럽게 아리아드네의 차지가 되었고, 테세우스는 크레타 공주를 상대로 아테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한 다음 함대를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모든 함선들이 돌려받은 인질들에 더해 막대한 양의 전리품으로 만선을 이뤘음은 물론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테세우스가 크레타 왕국을 고질적으로 분열시켜온 오누이 사이의 권력 다툼을 영악하게 이용했음을 손쉽게 유추할 수가 있다. 아리아드네가 운동경기에 참가한 테세우스의 늠름한 모습에 반해 조국을 배반했다는 사연은 양측 사이의 정치적 밀약을 낭만적으로 은폐하기 위해 나중에 지어낸 이야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크레타의 장군인 타우로스는 아테네의 왕자와 크레타의 공주가 공모해 꾸민 쿠데타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는 씨름 시합에서 테세우스에게 패배한 일을 계기로 실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단지 운동경기에서 패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라의 용장을 숙청하는 국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타우로스가 실각한 결정적 원인은 그의 세력이 왕가를 위협할 정도로 강성해졌다는 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타우로스는 미노스의 왕비인 파시파에와 부적절한 관계라는 소문마저 나돈 터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크레타 궁정 내부에서 테세우스에게 협조한 세력을 완곡히 가리키는 표현으로 해석해야 할 듯싶다.
아이게우스는 다른 청년들의 부모들처럼 아들이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테세우스는 뿌듯한 성취감 때문에 너무나 흥분한 탓인지 무사귀환을 알리는 하얀색 돛을 다는 일을 깜빡 잊고 말았다. 배에 검은 돛이 걸렸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아이게우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절벽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뭍에 올라서야 아버지의 죽음을 비로소 알게 된 테세우스는 통한의 눈물을 뿌렸다.
이 또한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테세우스의 크레타 평정 작전이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뤄졌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전황에 대한 보고가 정기적으로 전령을 통해 아테네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태종 이방원이 생생히 보여주듯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나눠 갖기가 불가능한 자원이 권력이다. 더욱이 아이게우스는 구질서의 구심점이었고, 테세우스는 신흥 세력의 맹주였다. 공동의 적이 타도된 지금 두 남자는 더 이상 공존하기 어려운 관계로 치달았고, 잠깐의 반가움을 지나 곧장 서먹한 사이가 되었을 부자간의 권력투쟁은 아들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리라. 아이게우스의 석연치 않은 죽음은 나중에 테세우스에 의해 되풀이된다. 물론 이는 먼 훗날의 일이다.
아이게우스의 돌연한 죽음을 계기로 테세우스는 명실상부한 아테네의 1인자가 되었다. 자신의 구상과 청사진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여건이 제대로 마련된 셈이다. 테세우스가 집권하기 이전의 아테네의 세력권은 아테네 시와 그 인근의 촌락을 합친 데 지나지 않았다. 아이게우스는 명목상의 왕이었으나 실질적 위상과 역할은 부족장 정도에 머물렀다, 테세우스는 나라도 아니고, 마을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의 아테네를 번듯한 도시국가로 바꿔놓길 바랐다. 한마디로 나라를 세우고 싶었다. 이를 위해 테세우스가 내건 아테네의 양대 건국이념이 통합과 개방이었다.
종전까지 아테네인들은 아티카 지방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왔다. 이처럼 고립분산적 상태로는 공동의 이익도, 효율적 방어도 도모하기가 어려웠다. 반대로 다툼과 오해는 잦았다. 정신적 통합에 이르는 최적의 경로는 물리적 통합인 경우가 많다. 테세우스는 아티카의 주민들을 단일한 도시 내에 거주하도록 했다. 그가 동원한 방법은 20세기에 스탈린이 채택한 강제이주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각각의 촌락과 씨족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대화와 설득을 거듭하면서 아테네 시내로 거주지를 옮길 것을 제안했다. 평민과 빈자들은 그의 권유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반면에 재산과 권세를 지닌 계층은 이주를 망설였다. 도시로 거처를 옮기면 테세우스의 권력에 완전히 굴복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테세우스는 기득권층의 저항을 종식시킬 비장의 승부수를 띄웠다. 그는 모든 아티카 사람들이 아테네로의 이주를 완료하는 즉시 왕정을 폐지하고 민주정치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신은 군사령관과 법의 수호자 역할만을 맡겠다고 맹세했다. 상대방이 내려놓게 하려면 내가 먼저 내려놔야 한다는 소신의 실천이었다. 사실 기득권층 입장에서도 떠오르는 해인 테세우스와 무한정 대치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테세우스는 이들에게 타협에 나설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군대의 지휘권은 계속 손에 쥐었으니 테세우스로서는 명분과 실리 모두를 챙겼다고 할 수 있다.
테세우스와 아테네의 병사들은 이 배를 타고서 크레타 항구를 급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