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극복의 리더십 : 리쿠르고스 (1)

in kr •  6 years ago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위기 극복의 리더십 : 리쿠르고스 (1)


벨기에 브뤼셀의 대법원에 들어서 있는 리쿠르고스의 석상
군국주의의 창시자와는 거리가 먼 문약한 철학자 같은 인상을 준다.

플루타르코스는 리쿠르고스(BC 800년?~BC 730년)를 정치가이자 입법가로 표현해놓았다. 리쿠르고스 이전에도 정치가들은 많았다. 리쿠르고스는 서구문명 최초의 본격적 입법자였다. 그의 활약 덕분에 서양은 인치(人治)에서 법치, 즉 법의 지배로 나아갈 수가 있었다. 미국 워싱턴의 연방하원 회의장에는 그를 기념하는 돋을새김이, 브뤼셀에 있는 벨기에 대법원에 그의 전신상이 각각 존재하는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이다.

리쿠르고스가 활동한 시기는 제1회 올림픽 경기가 치러지기 얼마 전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올림피아 대회는 서력으로 기원전 776년경에 열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나라 유왕이 웃지 않는 미녀 포사에게 흠뻑 빠졌다가 나라는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 잃었을 때와 대략 비슷한 시기다.

리쿠르고스는 프로클레스의 6대손으로, 헤라클레스로부터는 11대손이었다. 신화 속의 인물인 헤라클레스를 제외하고 그의 선조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소오스였다. 소오스의 지휘 아래 스파르타는 아르카디아를 정복하고 무수한 전쟁포로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소오스가 유명세를 탄 것은 스파르타군이 클레이토르 사람들에게 포위돼 거칠고 메마른 땅에 갇혔던 일 때문이었다. 소오스는 적에게는 샘물을 마시게 해주면 정복한 땅을 돌려주겠다는 맹세를, 부하들에게는 물을 마시지 않는 자에게 왕국을 주겠다는 약속을 차례로 했다. 소오스는 부하들은 전부 샘물을 마시게 한 다음 정작 자신은 얼굴에 물만 적심으로써 적과 아군 모두를 기만해 포위도 풀고, 왕권도 지키는 일석이조를 거뒀다.

그럼에도 왕가는 소오스의 이름 대신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우리폰 왕조로 불렸다. 에우리폰이 통치의 틀과 성격에 커다란 변화를 가했던 이유에서였다. 에우리폰은 절대주의적이었던 통치 방식을 대중의 호감과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에서 대폭 완화시켰다. 그 결과 왕실을 만만하게 생각하게 된 대중은 에우리폰의 후계자들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해댔고, 왕들은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스파르타는 오랫동안 무법과 혼란에 빠졌고, 이 와중에 리쿠르고스의 아버지인 에우노모스는 폭도들에게 식칼에 찔려 죽는 치욕적 최후를 맞아야 한다. 왕국은 에우노모스의 첫째 아들이자 리쿠르고스의 이복형인 플뤼덱테스에게 넘어갔다.

플뤼덱테스는 얼마 후 죽었고, 리쿠르고스는 자연스럽게 왕위를 물려받았다. 리쿠르고스는 고작 여덟 달 동안을 재위에 머물렀다. 죽은 형의 아내가 뱃속에 유복자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수의 임신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아들이 태어나면 왕위를 양보한 다음 어린 왕의 보호자 자리로 물러앉겠다고 선언했다.

이때 이제는 미망인이 된 플뤼덱테스의 왕비가 대단히 위험한 제안을 해왔다. 그녀는 태중의 아이를 낙태시키겠으니 자신과 결혼해 달라고 리쿠르고스를 은밀히 유혹했다. 남성의 사망률이 높던 고대에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으되 부도덕한 일도 아니었다. 허나 형의 후계자가 비록 태중일지언정 어엿이 있는 상태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리쿠르고스는 형수가 극단적 행동을 선택하는 사태를 막고자 그녀의 제안에 일단 조용히 응했다. 그는 산달이 되어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갓난아기가 아들임을 확인하고는 곧장 이 아이가 왕국의 새로운 왕임을 선포했다. 왕에서 왕의 후견인으로 자발적으로 내려앉은 그는 아기에게 카릴라오스, 즉 ‘사람들의 기쁨’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을 지어주었다. 스파르타인들은 아기의 탄생보다는 리쿠르고스의 고귀한 덕성에 더욱 기뻐했다. 그는 권력이 아닌 인품으로 백성들의 동의와 복종을 이끌어냈다.

인격의 힘으로 동지는 얻을 수 있어도 적까지 전부 제압할 수는 없었다. 특히, 그에게 엄청난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왕의 어머니와 그녀의 가족들은 리쿠르고스를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다. 반대파의 선봉에는 카릴라오스의 외삼촌 레오니다스가 섰다. 그는 리쿠르고스가 언젠가는 어린 국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헛소문을 열심히 퍼뜨렸고, 왕의 모후 또한 이러한 음해에 적극 가세했다. 심란해진 리쿠르고스는 의혹을 불식시킬 방법은 자기가 나라를 떠나는 길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조카가 성인이 되어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계획 아래 길고 먼 여행길에 나섰다.

리쿠르고스의 여행은 정계은퇴 후의 한가한 외유가 아니었다. 사비를 들여서 하는 장기간의 체계적인 해외연수와 같았다. 그가 다닌 곳들이 주로 당대의 최선진국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사실은 뚜렷이 드러난다.

그가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크레타였다. 그는 이곳에서 크레타의 실력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들 중에는 진정으로 존경할 만한 인물도 있었고, 속으로는 경멸했어도 필요성 때문에 그가 가짜로 교분을 나눈 자들도 있었다.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에서도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크레타 현지의 문물들을 열심히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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