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14)

in kr •  6 years ago  (edited)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14)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식 직접 민주주의는 민중에게 자유는 주어도
일자리는 주지 못하는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를 드러낸 최초의 사례였다.

하늘은 무심하게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스파르타가 아테네에 입힌 피해만큼의 손실과 고통을 페리클레스가 라케다이몬에게 신나게 돌려주고 있을 무렵 치명적 불청객이 아테네를 찾아왔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역병, 곧 전염병이었다. 전염병은 적의 창칼이 뺏어간 것의 몇 배에 달하는 목숨을 아테네 병사들로부터 앗아갔다. 병력이 줄어들자 그에 비례해 군대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반면에 페리클레스에 대한 반대파의 공격과 대중의 불만은 커졌다.

이 문제에서는 그의 비판자들의 말이 옳았다. 소독차도, 항생제도, 예방주사도, 깨끗한 수돗물도, 효과적 하수종말처리장도 없었던 아테네의 인구가 단박에 급격히 불어나자 도시의 위생상태가 금방 엉망이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도시에 거주하던 시민들도, 페리클레스의 청야전술에 협조하느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테네로 피난을 온 농촌 출신 주민들도 돌림병의 원인을 페리클레스가 제공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불평했다.

페리클레스는 급증한 아테네 시내의 인구에 맞춰서 식량 공급은 그럭저럭 맞춰갈 수 있었으나, 일자리까지 뚝딱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거대한 난민 수용소처럼 돼버린 아테네는 수많은 실업자들로 넘쳐났고, 실직자들은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위협하는 불온세력의 온상지가 되었다.

안에 쌓인 불만을 밖으로 분출시켜 해결하는 것은 페리클레스에게는 전가의 보도와 같았다. 150척의 대규모 함대를 조직한 그는 배들마다 보병과 기병으로 가득 채웠다. 그가 함대를 인솔해 출항에 나서려는데 때마침 일식현상이 일어나 천지사방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전염병이 한창 나도는 터였으므로 갑작스러운 일식은 병사들은 물론 경험 많은 뱃사람인 노련한 키잡이까지 공포에 떨게 했다.

페리클레스는 천문학에 조예가 있는 데다 아낙사고라스의 영향을 받아 미신에 휘둘리지도 않았다. 그는 걸치고 있는 외투를 벗어 키잡이의 눈을 가리고는 무섭냐고 물었다. 키잡이는 무섭지 않다고 대답했다.

“외투보다 큰 것이 잠시 태양을 가렸을 뿐이다.”

페리클레스는 이렇게 말하며 닻을 올릴 것을 독촉했다. 선단은 유유히 항구를 떠났고, 아테네군은 원래의 복안대로 작전을 수행해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쪽에 위치한 에피다우로스에 대한 포위공격을 시작했다.

작전계획은 곧 어그러졌다. 역병이 원정지까지 따라온 탓이었다. 병은 국적을 가리지 않았다. 아테네인들이 쓰러진 얼마 후 아테네와 교류와 접촉이 있는 나라의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가면서 페리클레스에 대한 아테네 민중의 인내심은 마침내 한계점에 다다랐다. 격노한 시민들은 투표로 페리클레스의 지휘권을 박탈하고는 그에게 벌금까지 부과하였다.

그가 공인으로서 당해야만 했던 수모는 개인적으로 겪은 고초에 견주면 지극히 짧은 것이었다. 그를 향한 동료 시민들의 격앙된 감정은 페리클레스가 사령관 자리에서 쫓겨나자마자 온 힘을 다해 침을 쏘고 난 직후의 벌처럼 이내 기력을 잃은 까닭에서였다. 페리클레스를 진짜로 만신창이로 만든 것은 가족과의 다툼, 특히 장남인 크산팁포스와의 불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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