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극복의 리더십 : 리쿠르고스 (2)

in kr •  7 years ago  (edited)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위기 극복의 리더십 : 리쿠르고스 (2)


리쿠르고스 무리가 일으킨 쿠데타 소식을 접한 카릴라오스 왕은
"올 것이 왔다"는 식의 지질하고 체념 섞인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

탈레스는 리쿠르고스가 크레타에서 만난 최고의 인재였다. 탈레스의 재주가 너무나 탐난 리쿠르고스는 그를 끈질기고 정성스럽게 설득해 스파르타로 영입했다. 탈레스는 표면상으로는 온유한 서정시인으로 활동했으나 실제로는 강력한 입법자였다. 그의 시구는 복종과 통합에 대한 호소였으며, 그가 노래하는 운율에는 질서와 엄격함을 향한 동경이 담겨 있었다. 탈레스의 시와 사상은 리쿠르고스가 장래에 스파르타에서 실시하게 될 법률들에 선구자적 영향을 주었다.

크레타를 출항한 리쿠르고스의 배는 이번에는 소아시아를 목적지로 잡았다. 그는 의사가 건강한 사람과 환자를 차례로 진단하며 그 차이점을 따지듯 크레타의 단순하고 소박한 문명을 이오니아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문화와 일일이 대조했다. 두 지역의 삶의 방식과 통치 형식의 우열을 세밀하게 분석해가며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가 걸어가야만 할 제3의 길을 주도면밀하게 탐구하고 모색했다.

리쿠르고스는 이오니아 지방에서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을 처음으로 접했다. 그는 호메로스의 시에 반영된 정치적 규범과 교훈에 대해 시 자체에 담긴 미학적 쾌감 이상의 가치와 효능을 부여했다. 그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부지런히 받아 적어 스파르타에 전한 이유다.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인구에 회자되어온 호메로스의 시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데에는 리쿠르고스의 공헌이 컸다. 리쿠르고스는 이외에도 리비아와 이베리아, 그리고 저 멀리 인디아까지 편력했다는 설이 있다. 이집트인들은 스파르타가 군인을 여타 사회계층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기술자와 수공업자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시킨 일은 리쿠르고스가 이집트를 둘러보고 느낀 내용들을 모방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리쿠르고스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에서의 그의 존재감은 조금도 희석되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이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으나 리쿠르고스는 출국하기에 앞서서 자파의 지지자들을 도처에 조직적으로 세력화해놓았을 것이 틀림없다.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단지 그가 그립다는 이유만으로 리쿠르고스의 조기 귀국을 종용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가 조카를 권좌에서 밀어내는 과정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무혈 쿠데타인지도 모른다.

리쿠르고스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였다. 그가 조직의 힘에만 의지에 권좌에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고 봐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더욱이 카릴라오스는 나이도 어릴뿐더러 외척에 휘둘렸으므로 백성들 사이에 권위와 인기가 없었다. 귀향한 리쿠르고스가 기존 질서의 변화와 정치체제의 개혁에 큰 반발 없이 착수할 수가 있었던 저변의 배경이다.

그는 의사가 온갖 중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듯이 부분적이 아닌 총체적 변혁을 시도했다. 리쿠르고스는 개혁에 대한 결의와 나라에 새로운 생활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열정으로 충만했다. 리쿠르고스는 개혁 추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델포이로 가서 신의 뜻을 구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신탁을 여사제로부터 받아냈다.

“신들의 사랑을 받는 이, 인간보다 신에 가까운.”

신탁은 신께서 좋은 법을 내려달라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면서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법률을 약속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의 일이다.

유리한 신탁에 고무된 그는 고위 관료들을 차례차례 동지로 끌어들였다. 비밀리에 시작된 포섭작업은 이윽고 노골적인 세력규합의 양상을 띠었다. “세가 세를 만든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경우였다. 마침내 행동에 나설 때가 되자 그는 무장한 대신 30명을 장터로 보내 반대자들을 충격과 공포로 질리게끔 만들었다. 대신들마다 제각기 동료와 부하들을 이끌고 나왔을 터이므로 실력 행사에 참가한 인원은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으리라. 이들 가운데 리쿠르고스에게 제일 큰 힘을 보탠 인물은 아르트미아다스였다.

쿠데타 사태에 직면한 카릴라오스는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궁성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나이어린 국왕은 박정희 소장이 주도하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급보를 받고서 제2공화국의 윤보선 전 대통령 보였다는 “올 것이 왔다”는 식의 초연하면서도 무책임한 반응을 표출했을 뿐이다. 그는 진압을 포기하고 아테네 여신을 모시는 신전으로 황급히 몸을 피했다. 수녀원으로 피신한 장면 전 총리를 연상시키는 치졸한 행동이었다.

카릴라오스가 스스로의 오판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대세는 결정된 후였다. 그는 신변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고는 피난처를 나와 리쿠르고스에게 순순히 협조했다. 스파르타의 왕이 당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지경의 참담한 굴욕의 연속이었다.

☞ 라케다이몬 : 스파르타가 자리한 라코니아 지방의 옛날식 명칭. 스파르타와 같은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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