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로물루스 (5)
로물루스는 납치한 사비니 여인들의 숫자가
고작 서른 명뿐이라고 강변하면서
그 알리바이로 로마를 30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는
뻔뻔하고 지능적인 면모를 보였다.
로물루스는 땅속에서 제단이 하나 발견됐다며 이를 기념한다는 구실로 성대한 잔치를 열고는 사비니 사람들을 초청했다. 잔치의 흥이 한창 오를 즈음 로물루스가 입고 있던 자줏빛 외투를 벗었다가 다시 고쳐 입었다. 행동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그러자 무장한 채로 숨어 있던 로마인들이 갑자기 사방에서 튀어나와 젊은 사비니 족 여인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 불의의 기습이라 사비니 족 남자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로마인들은 달아나는 사비니인들을 해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이때 납치된 여인들의 숫자는 527명이라고도 하고, 683명이라고 하는데 당시의 인구수를 고려하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인원이다. 이들 가운데 유부녀는 헤르실리아 단 한 명이었다고 한다. 로물루스는 바로 이 점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핑계로 삼았다. 그는 사비니 족 여인들을 납치한 행위는 욕정을 못 이겨서가 아니라 로마와 사비니 사이에 굳건한 인연을 맺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고 강변하며, 강탈한 여인들이 서른 명뿐임을 주장하기 위해 로마를 30개의 쿠리아로 나누는 눈 가리고 아웅 마저 서슴지 않았다. 로물루스가 불순한 동기에서 임시방편으로 급조해낸 30개의 쿠리아는 이후 장기간에 걸쳐 로마 시민들을 구분하는 행정 단위로 기능하게 된다.
사비니 부족은 수가 많을뿐더러 라케다이몬, 곧 스파르타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의 후예답게 호전적 성향을 띠었다. 하지만 인질로 잡힌 딸들의 안위가 걱정되는지라 로마를 응징하기 위한 군사행동에 즉각 착수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단 사절단을 파견해 ① 납치된 여인들의 신속한 송환 ② 납치 사건에 대한 사과와 책임자 처벌 ③ 사비니와 로마 사이의 우호관계 수립이라는 세 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비니인들도 제시된 요구 사항이 관철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던지 그들은 로마와의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예상대로 로물루스는 이러한 요구들을 모두 일축하고는 납치된 여인들과 로마 남성들 간의 정식 결혼을 허락해줄 것을 사비니 측에 촉구했다.
카이니나의 왕 아크론은 로물루스의 잠재력과 위험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수의 여인들을 납치해 능욕한 로물루스를 그대로 놔뒀다가는 더 큰 화가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군사를 움직여 로마 정벌에 나섰다. 양쪽 군대 사이의 본격적 전투에 앞서서 두 사람은 일대일 결투로 자웅을 겨루기로 합의했다. 로물루스는 아크론을 쓰러드린 다음 출정 시에 신에게 맹세한 대로 죽은 적장의 갑옷을 벗겨 유피테르 신전에 봉헌했다. 물론 전투에서는 로마군이 대승을 거뒀고, 그 결과 카이니나는 로마에게 정복당한 최초의 이방인 도시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로물루스는 함락된 카이니나의 시민들에게 치욕을 안기지 않았다. 그는 병사들에게 폭행과 약탈을 엄금하고는 정복된 도시의 집들을 모두 파괴하는 일만을 허락했다. 살 곳을 잃은 카이니나 사람들에게는 로마로 이주할 것을 명령했다. 로마로 당도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노예의 사슬이 아니었다. 로물루스는 로마로 온 카이니나 주민들에게 기존의 로마 시민과 동등한 대우를 약속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장면을 서술하면서 “로마가 팽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로마는 언제나 정복당한 이들과 기꺼이 융합했기 때문이다”라고 단언했다. 성장기의 로마는 정복된 사람들을 2등 시민으로 삼는 대신 똑같은 1등 시민으로 받아들였다.
카이니나 실함은 다른 사비니인들에게 일파만파의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번에는 피데나이, 크루스투레미움, 안템나이 세 도시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 로마에 도전해왔다. 로물루스는 이들의 도전을 손쉽게 분쇄하고 도시들을 수중에 넣었다. 그는 정복한 땅을 혼자 독차지하지 않고 다른 로마인들에게 고루 나눠주었다. 그러나 지난번 딸을 납치당했던 사비니인들의 땅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딸에 이어 땅까지 빼앗긴 사람들이 죽기 살기로 저항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로물루스는 최소한의 희생만을 치르며 나라의 영토와 인구를 늘리기 바랐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사비니 부족은 타티우스에게 군대의 통수권을 맡겼다. 타티우스는 로물루스가 이제껏 만났던 적들과는 체급이 달랐다. 그는 교활함과 용맹함을 겸비한 유능한 장수였다.
타티우스는 계략을 써서 카피톨리움에 자리 잡은 로마의 주요한 요새를 함락시켰다. 그는 요새의 수비를 책임지고 있던 타르페이우스 장군의 딸 타르페이아를 매수해 성문을 열게 했기 때문이다. 타르페이아가 사비니인들이 약속한 대로 왼팔에 차고 있던 황금 팔찌를 달라고 하자 타티우스는 부하들에게 왼팔에 들고 있는 모든 물건들을 그녀에게 아낌없이 주라고 명령했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수많은 사비니 장병들이 조국을 배반한 이 어리석은 여성을 향해 팔찌는 물론이고 왼손으로 들고 있던 방패까지 일제히 던졌다. 타르페이아는 황금에 얻어맞고 방패에 깔려 매국노에게 어울리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타티우스는 안티노고스의 말처럼 배신을 제안한 사람은 좋아해도 배신을 이행한 사람은 혐오했다. 카이사르 또한 반역은 좋아도 역적은 싫다고 일갈한 바 있다. 타티우스도, 카이사르도 배신이 필요할 때는 배신자를 참고 견뎠지만, 배신자를 이용해 얻고 싶은 바를 구한 다음에는 배신자의 비열함에 넌더리를 냈다.
- 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로물루스 (5)
고작 서른 명뿐이라고 강변하면서
그 알리바이로 로마를 30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는
뻔뻔하고 지능적인 면모를 보였다.
로물루스는 땅속에서 제단이 하나 발견됐다며 이를 기념한다는 구실로 성대한 잔치를 열고는 사비니 사람들을 초청했다. 잔치의 흥이 한창 오를 즈음 로물루스가 입고 있던 자줏빛 외투를 벗었다가 다시 고쳐 입었다. 행동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그러자 무장한 채로 숨어 있던 로마인들이 갑자기 사방에서 튀어나와 젊은 사비니 족 여인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 불의의 기습이라 사비니 족 남자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로마인들은 달아나는 사비니인들을 해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이때 납치된 여인들의 숫자는 527명이라고도 하고, 683명이라고 하는데 당시의 인구수를 고려하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인원이다. 이들 가운데 유부녀는 헤르실리아 단 한 명이었다고 한다. 로물루스는 바로 이 점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핑계로 삼았다. 그는 사비니 족 여인들을 납치한 행위는 욕정을 못 이겨서가 아니라 로마와 사비니 사이에 굳건한 인연을 맺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고 강변하며, 강탈한 여인들이 서른 명뿐임을 주장하기 위해 로마를 30개의 쿠리아로 나누는 눈 가리고 아웅 마저 서슴지 않았다. 로물루스가 불순한 동기에서 임시방편으로 급조해낸 30개의 쿠리아는 이후 장기간에 걸쳐 로마 시민들을 구분하는 행정 단위로 기능하게 된다.
사비니 부족은 수가 많을뿐더러 라케다이몬, 곧 스파르타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의 후예답게 호전적 성향을 띠었다. 하지만 인질로 잡힌 딸들의 안위가 걱정되는지라 로마를 응징하기 위한 군사행동에 즉각 착수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단 사절단을 파견해 ① 납치된 여인들의 신속한 송환 ② 납치 사건에 대한 사과와 책임자 처벌 ③ 사비니와 로마 사이의 우호관계 수립이라는 세 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비니인들도 제시된 요구 사항이 관철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던지 그들은 로마와의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예상대로 로물루스는 이러한 요구들을 모두 일축하고는 납치된 여인들과 로마 남성들 간의 정식 결혼을 허락해줄 것을 사비니 측에 촉구했다.
카이니나의 왕 아크론은 로물루스의 잠재력과 위험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수의 여인들을 납치해 능욕한 로물루스를 그대로 놔뒀다가는 더 큰 화가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군사를 움직여 로마 정벌에 나섰다. 양쪽 군대 사이의 본격적 전투에 앞서서 두 사람은 일대일 결투로 자웅을 겨루기로 합의했다. 로물루스는 아크론을 쓰러드린 다음 출정 시에 신에게 맹세한 대로 죽은 적장의 갑옷을 벗겨 유피테르 신전에 봉헌했다. 물론 전투에서는 로마군이 대승을 거뒀고, 그 결과 카이니나는 로마에게 정복당한 최초의 이방인 도시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로물루스는 함락된 카이니나의 시민들에게 치욕을 안기지 않았다. 그는 병사들에게 폭행과 약탈을 엄금하고는 정복된 도시의 집들을 모두 파괴하는 일만을 허락했다. 살 곳을 잃은 카이니나 사람들에게는 로마로 이주할 것을 명령했다. 로마로 당도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노예의 사슬이 아니었다. 로물루스는 로마로 온 카이니나 주민들에게 기존의 로마 시민과 동등한 대우를 약속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장면을 서술하면서 “로마가 팽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로마는 언제나 정복당한 이들과 기꺼이 융합했기 때문이다”라고 단언했다. 성장기의 로마는 정복된 사람들을 2등 시민으로 삼는 대신 똑같은 1등 시민으로 받아들였다.
카이니나 실함은 다른 사비니인들에게 일파만파의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번에는 피데나이, 크루스투레미움, 안템나이 세 도시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 로마에 도전해왔다. 로물루스는 이들의 도전을 손쉽게 분쇄하고 도시들을 수중에 넣었다. 그는 정복한 땅을 혼자 독차지하지 않고 다른 로마인들에게 고루 나눠주었다. 그러나 지난번 딸을 납치당했던 사비니인들의 땅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딸에 이어 땅까지 빼앗긴 사람들이 죽기 살기로 저항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로물루스는 최소한의 희생만을 치르며 나라의 영토와 인구를 늘리기 바랐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사비니 부족은 타티우스에게 군대의 통수권을 맡겼다. 타티우스는 로물루스가 이제껏 만났던 적들과는 체급이 달랐다. 그는 교활함과 용맹함을 겸비한 유능한 장수였다.
타티우스는 계략을 써서 카피톨리움에 자리 잡은 로마의 주요한 요새를 함락시켰다. 그는 요새의 수비를 책임지고 있던 타르페이우스 장군의 딸 타르페이아를 매수해 성문을 열게 했기 때문이다. 타르페이아가 사비니인들이 약속한 대로 왼팔에 차고 있던 황금 팔찌를 달라고 하자 타티우스는 부하들에게 왼팔에 들고 있는 모든 물건들을 그녀에게 아낌없이 주라고 명령했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수많은 사비니 장병들이 조국을 배반한 이 어리석은 여성을 향해 팔찌는 물론이고 왼손으로 들고 있던 방패까지 일제히 던졌다. 타르페이아는 황금에 얻어맞고 방패에 깔려 매국노에게 어울리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타티우스는 안티노고스의 말처럼 배신을 제안한 사람은 좋아해도 배신을 이행한 사람은 혐오했다. 카이사르 또한 반역은 좋아도 역적은 싫다고 일갈한 바 있다. 타티우스도, 카이사르도 배신이 필요할 때는 배신자를 참고 견뎠지만, 배신자를 이용해 얻고 싶은 바를 구한 다음에는 배신자의 비열함에 넌더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