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10)

in kr •  6 years ago  (edited)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10)


페리클레스는 고대 아테네판의 음험한 ‘종북몰이’를 통해
잠재적 반대파를 무력화하는 교활한 정치공작을 획책했다.

사모스 주둔군에 닥친 재앙에 관한 소식은 페리클레스에게 재빨리 알려졌다. 그는 사모스 섬으로 지체 없이 뱃머리를 돌렸다. 복수의 열망으로 불타는 페리클레스에게 멜릿소스의 급조된 민병대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야전에서 사모스 인들을 대파한 아테네는 종전보다 더 철통같이 성을 에워쌌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군의 사상자를 최소화하고자 무모한 공격을 삼가고, 성 안의 양식이 떨어지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페리클레스는 부대를 여덟 개로 나눠 하루에 한 부대씩 공성전에 투입했다. 나머지 7개 부대는 때로는 흥청망청한 잔치까지 벌여가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반면에 수비자인 사모스인들 입장에서는 더 죽을 맛이었다. 단 하루도 쉴 수 있는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중의 식량마저 바닥났다.

포위전이 시작된 지 8개월째 되는 달에 사모스는 백기를 들었다. 페리클레스는 사모스가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끔 성벽을 철거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막대한 배상금을 비롯한 가혹한 강화조건을 사모스인들에게 강요해 관철시켰다.

사모스와의 전쟁을 마친 페리클레스는 고국으로 돌아와 전사자들을 위한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그는 관습대로 사망자들의 무덤 앞에서 엄숙한 추모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은 많은 참석자들의 심금을 울리며 페리클레스를 향한 대중의 존경심을 더더욱 높이는 역할을 했다.

그는 사모스 정벌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꼈다. 신화 속의 영웅인 아가멤논은 트로이를 함락시키는 데 무려 10년이 걸렸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함대에 호시탐탐 도전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사모스의 만만치 않은 군사력을 채 열 달도 되지 않아 굴복시켰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비판적으로 서술한 역사가 투키디데스마저 페리클레스가 주도한 사모스 전역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정도였다.

사모스 원정으로 이미 휴지조각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평화조약은 케르키라와 코린트 간의 영토분쟁에 아테네가 뛰어듦으로써 폐지로도 재활용이 불가능한 완전한 넝마가 되고 말았다. 페리클레스는 해운의 요충지인 케르키라를 친아테네 진영에 확실히 끌어들임으로써 아테네의 해상패권에 화룡점정을 찍기를 바랐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패권을 확립하기에 앞서서 자신의 정권부터 더 안정된 바탕 위에 올려놓고 싶었다. 그는 손에 콧물을 묻히지 않고도 코를 풀 수 있는 한 가지 꼼수를 궁리해냈다. 라케다이몬에 우호적이라고 비판을 받아온 키몬의 집안에 폭탄을 넘긴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키몬의 장남인 라케다이모니오스에게 지원군으로는 너무 작고, 코린트와 그 후견국인 스파르타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규모인 10척의 함선을 주어 케르키라로 보냈다.

라케다이모니오스는 ‘라케다이몬의 남자’, 곧 ‘스파르타 사나이’라는 뜻이었다. 생전의 키몬은 그리스인들의 단결과 화합을 염원하는 바람을 담아 그의 세 아들에게 그리스 주요 지역의 지명이 들어간 이름을 지어주었다. 페리클레스는 이를 교묘하게 악용해 스파르타와의 충돌을 적극 반대할지도 모르는 키몬 가문의 손발을 미리 묶어놓았다.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