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겉표지엔 분홍색과 하늘색의 사람과 그림자가 있다.
앞으로 보여줄 매우 ‘달콤한’ 이야기들을 상징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보이는 책의 제목 ‘백의 그림자’.
백OO 씨의 그림자라도 되어 계속 사랑하겠다는 의미인가.
궁금증을 유발하는 이 책은 황정은 작가의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이다.
- 가마. 가마.
그림자가 어머니의 오른쪽 어깨 부근에서
머리와 닮은 둥근 것을 치켜들고 가져와, 가져와, 라고 말하고
...(중략)... 발성 자체가 목적인 듯한
미미, 라거나 가가, 하는 소리일 뿐이었습니다. (70쪽)
가벼운 연애소설을 상상했던 나에게 이와 같은 기괴한 그림자 묘사는
이 책의 정체성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음을 알려주었다.
고통, 낙담, 실연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강화될 때 개인들의 그림자는 일어선다.
늘 주인에게 종속됐던 그림자가 그 연결고리를 끊고 주체적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를 자신의 주인에게 드리운다. 무엇이 그림자를 일어서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그토록 고분고분했던 그림자를 광기에 사로잡혀 주인을 덮치도록 만드는 것일까.
매일 같이 특별한 것 없이 사는 소시민들이 있다. 이 책에서 주인공이 일하는 전자상가는
그런 이들의 상징적인 터전이다. 이곳에서 이들은 자욱한 먼지만큼 시간을 조용히 쌓는다.
가나다라마, 다섯 개의 건물이었던 이 전자상가는 사십여 년의 시간이 흐르며 서로 연결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이곳의 사람들도 그렇게 건물과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이들과 건물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르면,
사는 이보다 떠나는 이가 더 많은 이 전자상가 건물은 비효율 그 자체이다.
철거가 결정되고 수십 년간 시간을 쌓아온 평범한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그 모든 것을 잃게 될 처지에 처한다.
소시민들의 그림자를 광기에 사로잡히게 한 건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적인 시장논리이다.
가마.
가마.
...(중략)...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히 폭력인거죠. (38쪽)
자본주의의 시장논리가 이처럼 폭력적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어떠한 인식이 이런 문제를 초래한 것은 아닐까.
작가는 우리 사회가 고통스럽게 된 근본적인 이유로 획일화된 인식을 말한다.
사실 저마다 가진 가마는 모두 다른데 우리는 모두 그것들을 가마라고 통칭한다.
이것은 개별성을 부정하는 우리 시대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개별성을 부정한 사회, 획일화된 인식이 팽배한 사회는 곧 문제를 겪는다.
획일화된 인식에 맞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정답과 오답, 유용(有用)과 무용(無用)의 이분법적 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미셸 푸코는 그의 1961년 저작 『광기의 역사』에서 이와 같은 인식에 대해서 말한다.
현대 사회는 광기를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현대 사회는 광기를 비정상적인 병리 현상으로 설정한다.
이것은 곧 사회는 광기의 여집합인 이성을 정상적인 것, 즉 정답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광인은 스스로 말을 할 수 없다.
광인의 말은 사회적으로 이해되거나 용인될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광인은 그들을 대변하는 이성적인 자가 필요로 하고, 이와 같은 관계의 불평등은
광인이 점점 더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경시되는 계기가 된다.
자본주의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교환이다.
교환은 서로 상대의 재화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이를 교환하여 양자 간에 모두 이익을 얻게 한다.
이 교환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는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교환의 전제는 동일화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교환하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을 수량화할 수 있어야 한다.
금과 은이 몇 톤인지 알아야 교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수량화의 과정에서 대상들은 동일화된다.
백만 원 가치의 노동을 하는 사람은 백만 원 가치의 노동을 하는 이와 같게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 우리 시대 속 개인들은 줄 세워진다.
이백만 원의 어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백만 원어치의 일을 하는 사람보다 두 배의 교환가치를 갖는다.
높은 교환가치를 가진 자가 사회적으로 더 인정받는다.
대상에 대한 획일적인 판단이 전제이자 용인되면 사회는 점차 광인들의 사회로 변한다.
높은 교환가치를 지닌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일등이 된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비정상의 낙인이 찍힌다.
은교 씨는 뭐가 되고 싶나요, 행성하고 위성 중에.
나는 도는 건 싫어요. (126쪽)
돈다는 것은 반복을 의미한다.
행성이 돌고 있는 오늘의 궤적은
어제의 궤적과 그저께의 궤적과 십오만 년 전의 궤적과 동일하다.
행성은 매 순간 무언가 열심히 인 것 같지만, 우리가 보기엔 늘 같은 일만 한다.
은교가 수리실에서 하는 일은 사회가 보기엔 그저 오천 원짜리 일에 불과하다.
사회에서 시급 오천 원짜리 일을 하는 이는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니기에
은교의 일은 특별히 가치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시급이 같다고 개인이 같은 사람이 아님을,
곰팡이 덮인 금속상자가 누군가에겐 죽을 만큼
그리운 추억이 될 수 있음을 현대 사회는 잊은 것이다.
- 노래할까요.
나가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죽지 않을까요.
죽나요.
어디서든 언젠가는 죽겠지만 나가지 못한다면 나가지 못한 채로 죽겠죠.
무서워요. (14쪽)
이 소설의 시작에서 숲에서 조난한 무재와 은교는 죽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둘이 함께 있지만, 둘은 심리적으로 연결된 상태가 아니다.
고로 어두운 숲 속 혼자 있는 것이다.
이 책 속 인물들은 그림자를 목격한다.
자신의 것을 포함하여 다른 이들의 것들도 목격한다.
하지만 바라만 볼 뿐 방관한다.
공포 또는 죽음에 허우적대고 있는 누군가를 그대로 바라만 본다.
우리는 이처럼 고독하다.
거대한 대도시 아래 그토록 수많은 사람이 있건만 우리는 고독하다.
다른 이의 감정에 신경을 쓸 만큼 시간이 나지 않거나, 자신이 목격하고 있는 것
다른 이의 고통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거나 어느 쪽이든 우리는 서로가 외롭다.
따라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중략)...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노래할까요. (168쪽)
소설 초반부와 같이, 소설 마지막에 은교와 무재는 어둠 속 갈 길을 잃는다.
하지만 이들의 태도는 그전과는 사뭇 다르다.
서로 사랑하기 시작한 이들에게 그림자와 어둠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타인과의 강력한 정서적 유대가 존재할 때 우리는 그림자를 극복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소설 속 그림자는
돈이 없거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이들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으레 다가오는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눌 끈끈한 사랑이 없을 때,
그림자는 사람을 잠식한다.
또한, 사랑을 하면 어둠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사랑하기 전의 유리된 개인에게 어둠은 그림자의 커다란 확장이다.
어두운 곳에 있는 것은 그림자에게 언제고 잠식될지 모르는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사랑하고 있는 이들에게 어둠은 그림자의 존재를 세상에서 없애주는 마음의 빛이다.
이 책을 그림자를 지닌 百인, 즉 모든 이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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