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 아감벤의 <빌라도와 예수: 죽인자와 죽임을 당한자>를 모티브로 이 글을 쓴다. 성경에서 빌라도는 아직까지 논쟁적인 인물이고, 고 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한 주제의 글은 민감할 수도 있다. 이 두 논쟁적 인물을 엮기 전에 아감벤의 빌라도와 예수로부터 논쟁적 인물임을 살펴보자.
로마제국의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총독 빌라도는 예수가 결백할 뿐만아니라 신적인 기적을 행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죄인 예수를 자신들에게 넘기라는 유대인 사제에게 굴복했다. 이런 성경의 기록으로 빌라도는 신의 아들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한 종교적 원흉의 인물이었다. 한편으로 역사적 사실로서 빌라도는 현명한 정치적 판단을 했다는 평가가 있다. 이 빛과 어둠의 평가를 받는 빌라도는 논쟁적 인물로 비난뿐만아니라 재조명 받는 인물이다.
“예수가 빌라도 앞에 끌려 갔을 때, 그 곳에서는 사실의 세계와 진리의 세계가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직접 맞서 있었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선명하고 압도적인 상징성을 가지 이 장면은 세계사를 통틀어 두번다시 있을 수없는 것이다.” -슈펭클러
빌라도가 주재하는 재판 과정에서 두개의 심판, 두개의 왕국이 맞선다.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시간적인 것과 영원적인 것이 대립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를 처형한 인물로 남는다. 이 총관은 유대지역을 총괄하는 로마인으로 비지배자인 유대인에게 적이다. 그리고 신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원흉으로 묘사된다. 성경의 복음서에는 빌라도는 예수를 즉시 풀어주려 했지만, 유대인 사제들은 그를 풀어준다면, 당신은 황제의 편이 아닌 것이오. 누구라도 왕을 참칭한다면 그것은 황제에게 반역하는 것이오라 시위하며 경고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인 사제에게 피고인 예수를 넘겨주었을 따름이었다.
이렇게 빌라도는 재판석에서 판결을 내리지 않고, 방에서 예수를 불러들여 사적인 대화만 했다. 그는 재판관이 아니라 조정자, 중재자였다. 그리고 빌라도는 죄인으로 넘겨진 예수를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묻는다.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가 물었다.
예수에게 진리를 묻는 빌라도는 가장 신성한 인간이다고 니체는 말했다. 예수는 대답으로 “당신 스스로 내가 왕이라 말하였고,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 이 세상에 왔소. 누구든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나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보나 벤투라, 제왕을 찬양하는 징표와 같은 것으로 승자를 일컫는 칭호이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이어, 유대인 왕의 문구에 항의하는 유대인 사제들에게 “내가 그렇게 썼으니 그만이오.”라고 결정적인 말을 던진다. 유대에 의해 시작되고 산헤드린 유대인과 빌라도에 이어진 세속의 “넘겨준”은 하나님의 “넘겨줌”을 완결한 것이었다.
빌라도는 새로운 약속 집행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안에 풀 수 없는 모순을 지닌 한 명의 역사적인 행위자이다. 이 모순 속에 드러나는 것은 한층 더 심오한 대립, 경제와 역사, 지상과 영원, 정의와 구원간의 대립이다.
빌라도는 영원한 것에 직면 해 인간적 본성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예수와 달리 상충하는 두 개의 의지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나름의 방식으로 정의와 진리를 구했던 것이다. 인간적인 본성을 통해 다른 한쪽, 신적인 본성을 증명해야 했다. 예수는 왕국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이곳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역설이다. 예수는 역사 속에서 그리고 시간 속에서 초역사적인, 영원한 진리의 현전을 증언해야 했다.
“끊임없이 서로를 배척하면서 서로를 불러내는 정의와 구원은 결코 화해할 수 없다. 구원은 은혜롭지만 무기력하다. 왜냐하면 구원 속에서 사건은 판결 내릴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이런 상황에서 재판도 구원도 할 수 없었다. 재판도 구원도 결정되지 않은, 결정할 수 없는 진위 불명 상태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세계는 구원이 아니라 정의를 원한다. 그리고 세계가 정의를 원하는 이유는 구원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 받을 수 없는 피조물이 영원한 것에 판결을 내린다. 바로 이 역설이 결국 빌라도 앞에서 예수를 돌연 끝내버린다. 여기가 십자가고, 여기가 역사다.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빌라도)은 계속 결정하고, 결정할 수 있는 사람(예수)는 아무것도 결정할게 없어졌다.” –아감벤-
아감벤은 <빌라도와 예수>에서 예수가 구원이라는 정의를 앞세운 빌라도 법정에서 넘겨짐을 선고 받은 사실에서 “세계는 구원보다 정의를 원한다”라고 결론을 지었다. 여기에서 구원에 반한 정의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구원의 개념을 미리 밝히자면 이는 윤리의 최종 과정이다. 윤리는 정치와 연결할 수 있다. 정치적인 가장자리에서 개인의 삶이 조명되는 정치미학이다. 실천으로서의 주체가 자기배려(푸코의 주체)를 거쳐 자기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구원’이다. 도래할 메시아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도래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역사에서 빌라도와 같이 진리를 묻는 한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노무현 전대통령이다. 그는 한 국가의 민주주의 체제의 대통령의 자리에 있었다. 그가 빌라도와 같은 진리를 물은 이는 바로 민주주의 아래 있는 사람들이었다.
“진리가 무엇이냐?” 노무현이 물었다.
그가 변호사 출신으로 끊임없는 정치적 물음의 길을 걸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렇지만 그는 빌라도의 상황처럼 재판도 구원도 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불완전한 체제를 이어갈 무렵 그 앞에 민주주의를 확립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러나 이 구원의 시간은 정치적 속박의 판결 앞에서 정치적 유대인에게 넘겨지고 말았다. 예수의 기적을 따랐던 유대인은 이중적 의미를 내포한다. 정치적 해방과 구원을 원하면서, 강력한 권력체계를 원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욕망의 끊에 옭아매진 사람들이었다. 이들 앞에서 민주주의 진리의 물음은 구원받아 마땅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렇게 노무현은 민주주의의 진리를 물었으나, 구원하지는 못했다. 노무현은 빌라도처럼 영원한 것에 직면 했을 때 인간적 본성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경제와 역사, 지상과 영원, 정의와 구원이라는 상충하는 두 개의 의지를 감당할 수 없어 나름의 방식으로 정의와 진리를 구했던 것이다.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 “친노세력이 여권을 지배한다.” 그는 이자리에 없음에도 항상 정치권에서 회자된다. 한쪽은 노무현을 원흉으로 삼아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다. 그한쪽은 극우보수 세력일뿐만 아니라, 소위 그들의 반대편에 있는 세력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또 한쪽은 노무현을 그리워한다. 역대 대통령에서 가장 친근했던 대통령, 가장 솔직했던 지도자의 모습을 추억한다. 평가는 극과 극이지만 공통점은 항상 정치에서 노무현은 논쟁적 인물이었다. 그가 있음으로 민주주의는 작동한다.
다시 아감벤의 책으로 돌아가 주어와 목적어를 노무현과 민주주의로 바꿔보자.
“끊임없이 서로를 배척하면서 서로를 불러내는 정의와 구원은 결코 화해할 수 없다. 구원은 은혜롭지만 무기력하다. 왜냐하면 구원 속에서 사건은 판결 내릴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이런 상황에서 재판도 구원도 할 수 없었다. 재판도 구원도 결정되지 않은, 결정할 수 없는 진위 불명 상태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세계는 구원이 아니라 정의를 원한다. 그리고 세계가 정의를 원하는 이유는 구원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 받을 수 없는 피조물이 영원한 것에 판결을 내린다. 바로 이 역설이 결국 노무현 앞에서 민주주의를 돌연 끝내버린다. 여기가 십자가고, 여기가 역사다.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노무현)은 계속 결정하고, 결정할 수 있는 사람(민주주의)는 아무것도 결정할게 없어졌다.”
우리의 슬픔, 민주주의의 종말은 여기서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