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전 스스로에게 건네는 한 마디

in kr •  6 years ago 

"당신은 당신 스스로와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신가요?"라는 물음을 받은 사람들 표정이 어떤 식으로 제각각일지 잠시 생각해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심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수도 있겠고, 어떤 사람들은 미간을 바짝 좁히며 얼굴을 붉힐 수도 있겠고, 어떤 사람들은 그 질문이 딴 세계의 언어처럼 느껴지는 듯 어리둥절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내가 나인데, 내가 나와 관계를 맺는다니요?"라는 반문을 던질 수도 있겠어요.

언젠가 어떤 사람이 나에게 "본인 아침은 챙겨 먹이고 왔어요?"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을 받은 순간, 나는 조금 의아하다는 듯 웃으며 "네?"라는 대답만 했어요. 질문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깜깜해서. 나는 잠깐의 침묵을 지킨 뒤 "네, 먹고 왔어요, 아침."이라고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거렸습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밥을 먹인다는 관념이 생각보다 많이 생소했고, 그 부피 큰 생소함 때문에 스스로에게 약간 미안해지더라구요. 내가 나라는 이유로 나는 내 아침 끼니에 소홀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날 아침 대충 때우고 나왔거든요. 진짜 대충.

그 날 나에게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은 스스로를 손님처럼 생각한다고 하네요.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에게 잘해 주는 경우보다, 정도가 지나치게 스스로를 홀대하는 경우가 많아서, 스스로를 손님처럼 생각하는 것으로 스스로와의 관계에서 최소한의 덕목 정도는 지켜보겠다고 그 사람은 곧은 결심을 했습니다. 그 결심 끝에 나온 구체적인 실행 방안들 중에 하나가 이거였어요. 스스로에게 식사 대접 잘하는 거.

그 사람과 여러 계절 함께하면서, 나는 많은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 행동해 왔는지에 관해서요. 나는 나에게서 단 1초도 떠나 있지 않지만, 내가 나에게 하는 행동들은 대부분 무의식중에 일어나더라구요. 내 일상을 한 번 세세하게 돌이켜보고 나서야, 나는 내가 나에게 어떻게 구는 사람인지 조금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거죠. 나는 나에게 괜찮은 밥을 먹여 주는가. 나는 나에게 날씨에 맞는 옷을 입혀 주는가. 나는 나에게 충분한 분량의 수면 시간을 제공하는가.

나는 나를 잘 데리고 사는가.

안 그런 사람 별로 없겠는데, 나도 나랑 되게 많이 싸우면서 살았어요. 그 싸움을 멈추고 싶은데 멈추는 방법을 잘 몰랐고, 사실 그걸 멈추려는 데 제대로 적극적이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는 바깥에서 열 받고 들어오면 현관문 닫자마자 스스로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 자리에서부터 밤새도록 피 터지게 싸우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했던 것 같아요(그런다고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도 아닌데요). 고질적인 패턴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나 스스로와 끊임없이 벌이는 싸움 때문에 내가 계속 세상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가 나 자신에게 괜찮다고, 이만하면 잘했다고 하지 못하니까 남들에게도 괜찮다고, 이만하면 잘했다고 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 관용을 내 안에서 진심으로 베풀어 본 적이 없으니까, 밖에서도 안 되는 거예요. 가짜로 그런 척을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내가 나하고 맺는 관계가 결국 나 아닌 사람들과의 관계와 연결되어 있는 거 같은 거예요. 아니, 나 자신과의 관계가 모든 관계의 뿌리 같은 거예요. 나 자신이 너무 싫어져 버릴 때마다 모든 관계를 정리하고 이리로 저리로 도망쳐 버리는 나를 떠올려 보면,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나랑 사이가 안 좋으니까 남들하고도 사이좋게 못 지내는 거 아닌가. 내 마음이 지옥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내가 평탄한 일상을, 아름다운 시간을 줄 수 있단 거지.

그걸 결정적으로 깨닫고 나서 내가 시작한 게 있습니다. 자기 전마다 나 자신에게 "수고했어." 한 마디 해 주는 거. 처음에는 블로그 일기장에다가 그걸 썼어요. 밤마다. "오늘도 수고했습니다."라고. 스스로에게 그런 말을 처음 해 주는 거다 보니까, 처음에는 마음이 이상하데요. 참 희한한 게, 스스로와의 관계에서도 쑥스러운 게 있고 서먹한 게 있고 어색한 게 있는 거예요. 내가 나라서 나는 나랑 제일 친하고 허물 하나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반 정도는 강제적으로 시작한 "오늘도 수고했습니다." 습관을 만든 지 3개월쯤 된 때인가.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내 인생에서 제일 버티기 힘든 일이 나를 와장창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도무지 진정이 안 되고, 원래 내 일상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는 거예요. 이러다 큰일 나겠다, 이러다 진짜 큰일 나겠다, 하면서 전전긍긍하다가 1주일 보내고. 머리 터진 사람처럼 멍하니 1주일 보내고. 조금 정신 났을 때 일기장 들어가서 일기 몇 줄 쓰고 아무 생각 없이 "오늘도 수고했습니다."라고 쓰는데 갑자기 눈알이 뻐근하니 눈물이 비죽 나오더라구요. 아, 얘는 내가 뭘 어떻게 겪은지 알고 나한테 수고한다고 하는구나, 그런 느낌이 들어서. 내가 며칠 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고스란히 알고 있는 내가 나한테 수고한다고 하는 말이 절대 텅 빈 말이 될 수 없는 거라는 점을 너무 잘 알겠는 거예요. 나한테 처음으로 위로를 건넨 거죠. 처음으로. 얼떨결에.

그 이후로 내 일상은 드라마틱하게 변해 갔습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활력이 작지만 분명하게 살집을 키워 가데요. 내가 내 편이 된 거예요. 비로소. 사소하게 투닥거릴 때는 있어도 내가 나를 이제는 저버리지 않겠다, 저버릴 수가 없겠다는 마음이 숲처럼 울창해진 거예요.

나를 위한 작은 습관 하나를 만든다는 게 이런 종류의 나비효과를 일으킬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는데. "오늘도 수고했습니다." 이 아홉 글자가 내 안의 늪을 숲으로 만들어 줬어요. 거기서 철마다 새로운 식물이 자라고 신선한 공기가 뿜어져 나옵니다.

죽이면 또 살아나고 죽이면 또 살아나 달려들던 좀비 같던 나 스스로와 친구처럼, 가족처럼 지내는 일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는 이 일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지만요. 세상에는 예전의 나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테니까. 그들 중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닿을 주파수를 맞추고 무전기를 턱밑에 가져다 대는 마음으로 이 기록을 남깁니다. 그 지난한 전투를 어쩌면, 어쩌면 끝내 줄 지도 모를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로저. 세상에서 제일 끈질기고 성가시던 당신의 앙숙이 세상에서 제일 눈물겹게 당신을 끌어안는 아군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로저.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
Sort Order:  

Congratulations @parkdabin! You have completed the following achievement on the Steem blockchain and have been rewarded with new badge(s) :

You published more than 10 posts. Your next target is to reach 20 posts.

Click here to view your Board
If you no longer want to receive notifications, reply to this comment with the word STOP

To support your work, I also upvoted your post!

Vote for @Steemitboard as a witness and get one more award and increased upv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