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당신 스스로와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신가요?"라는 물음을 받은 사람들 표정이 어떤 식으로 제각각일지 잠시 생각해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심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수도 있겠고, 어떤 사람들은 미간을 바짝 좁히며 얼굴을 붉힐 수도 있겠고, 어떤 사람들은 그 질문이 딴 세계의 언어처럼 느껴지는 듯 어리둥절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내가 나인데, 내가 나와 관계를 맺는다니요?"라는 반문을 던질 수도 있겠어요.
언젠가 어떤 사람이 나에게 "본인 아침은 챙겨 먹이고 왔어요?"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을 받은 순간, 나는 조금 의아하다는 듯 웃으며 "네?"라는 대답만 했어요. 질문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깜깜해서. 나는 잠깐의 침묵을 지킨 뒤 "네, 먹고 왔어요, 아침."이라고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거렸습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밥을 먹인다는 관념이 생각보다 많이 생소했고, 그 부피 큰 생소함 때문에 스스로에게 약간 미안해지더라구요. 내가 나라는 이유로 나는 내 아침 끼니에 소홀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날 아침 대충 때우고 나왔거든요. 진짜 대충.
그 날 나에게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은 스스로를 손님처럼 생각한다고 하네요.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에게 잘해 주는 경우보다, 정도가 지나치게 스스로를 홀대하는 경우가 많아서, 스스로를 손님처럼 생각하는 것으로 스스로와의 관계에서 최소한의 덕목 정도는 지켜보겠다고 그 사람은 곧은 결심을 했습니다. 그 결심 끝에 나온 구체적인 실행 방안들 중에 하나가 이거였어요. 스스로에게 식사 대접 잘하는 거.
그 사람과 여러 계절 함께하면서, 나는 많은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내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 행동해 왔는지에 관해서요. 나는 나에게서 단 1초도 떠나 있지 않지만, 내가 나에게 하는 행동들은 대부분 무의식중에 일어나더라구요. 내 일상을 한 번 세세하게 돌이켜보고 나서야, 나는 내가 나에게 어떻게 구는 사람인지 조금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거죠. 나는 나에게 괜찮은 밥을 먹여 주는가. 나는 나에게 날씨에 맞는 옷을 입혀 주는가. 나는 나에게 충분한 분량의 수면 시간을 제공하는가.
나는 나를 잘 데리고 사는가.
안 그런 사람 별로 없겠는데, 나도 나랑 되게 많이 싸우면서 살았어요. 그 싸움을 멈추고 싶은데 멈추는 방법을 잘 몰랐고, 사실 그걸 멈추려는 데 제대로 적극적이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는 바깥에서 열 받고 들어오면 현관문 닫자마자 스스로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 자리에서부터 밤새도록 피 터지게 싸우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했던 것 같아요(그런다고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도 아닌데요). 고질적인 패턴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나 스스로와 끊임없이 벌이는 싸움 때문에 내가 계속 세상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가 나 자신에게 괜찮다고, 이만하면 잘했다고 하지 못하니까 남들에게도 괜찮다고, 이만하면 잘했다고 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 관용을 내 안에서 진심으로 베풀어 본 적이 없으니까, 밖에서도 안 되는 거예요. 가짜로 그런 척을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내가 나하고 맺는 관계가 결국 나 아닌 사람들과의 관계와 연결되어 있는 거 같은 거예요. 아니, 나 자신과의 관계가 모든 관계의 뿌리 같은 거예요. 나 자신이 너무 싫어져 버릴 때마다 모든 관계를 정리하고 이리로 저리로 도망쳐 버리는 나를 떠올려 보면,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나랑 사이가 안 좋으니까 남들하고도 사이좋게 못 지내는 거 아닌가. 내 마음이 지옥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내가 평탄한 일상을, 아름다운 시간을 줄 수 있단 거지.
그걸 결정적으로 깨닫고 나서 내가 시작한 게 있습니다. 자기 전마다 나 자신에게 "수고했어." 한 마디 해 주는 거. 처음에는 블로그 일기장에다가 그걸 썼어요. 밤마다. "오늘도 수고했습니다."라고. 스스로에게 그런 말을 처음 해 주는 거다 보니까, 처음에는 마음이 이상하데요. 참 희한한 게, 스스로와의 관계에서도 쑥스러운 게 있고 서먹한 게 있고 어색한 게 있는 거예요. 내가 나라서 나는 나랑 제일 친하고 허물 하나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반 정도는 강제적으로 시작한 "오늘도 수고했습니다." 습관을 만든 지 3개월쯤 된 때인가.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내 인생에서 제일 버티기 힘든 일이 나를 와장창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도무지 진정이 안 되고, 원래 내 일상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는 거예요. 이러다 큰일 나겠다, 이러다 진짜 큰일 나겠다, 하면서 전전긍긍하다가 1주일 보내고. 머리 터진 사람처럼 멍하니 1주일 보내고. 조금 정신 났을 때 일기장 들어가서 일기 몇 줄 쓰고 아무 생각 없이 "오늘도 수고했습니다."라고 쓰는데 갑자기 눈알이 뻐근하니 눈물이 비죽 나오더라구요. 아, 얘는 내가 뭘 어떻게 겪은지 알고 나한테 수고한다고 하는구나, 그런 느낌이 들어서. 내가 며칠 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고스란히 알고 있는 내가 나한테 수고한다고 하는 말이 절대 텅 빈 말이 될 수 없는 거라는 점을 너무 잘 알겠는 거예요. 나한테 처음으로 위로를 건넨 거죠. 처음으로. 얼떨결에.
그 이후로 내 일상은 드라마틱하게 변해 갔습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활력이 작지만 분명하게 살집을 키워 가데요. 내가 내 편이 된 거예요. 비로소. 사소하게 투닥거릴 때는 있어도 내가 나를 이제는 저버리지 않겠다, 저버릴 수가 없겠다는 마음이 숲처럼 울창해진 거예요.
나를 위한 작은 습관 하나를 만든다는 게 이런 종류의 나비효과를 일으킬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는데. "오늘도 수고했습니다." 이 아홉 글자가 내 안의 늪을 숲으로 만들어 줬어요. 거기서 철마다 새로운 식물이 자라고 신선한 공기가 뿜어져 나옵니다.
죽이면 또 살아나고 죽이면 또 살아나 달려들던 좀비 같던 나 스스로와 친구처럼, 가족처럼 지내는 일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는 이 일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지만요. 세상에는 예전의 나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테니까. 그들 중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닿을 주파수를 맞추고 무전기를 턱밑에 가져다 대는 마음으로 이 기록을 남깁니다. 그 지난한 전투를 어쩌면, 어쩌면 끝내 줄 지도 모를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로저. 세상에서 제일 끈질기고 성가시던 당신의 앙숙이 세상에서 제일 눈물겹게 당신을 끌어안는 아군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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