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의 전위예술

in kr •  6 years ago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판문점의 한국인 6 정주영의 전위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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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느 회사를 방문했는데, 그 회사 노동조합이 로비에서 무슨 농성을 하고 있었고 스피커를 통해 우렁찬 ‘민중가요’가 흘러나왔어. 어? 이거 아는 노래인데… 어깨를 움씰거리며 노래를 따라가던 아빠는 얼마 안 가 노래의 제목을 기억해냈단다. ‘그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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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대통령 선거 무렵에 나온 노래였어. 당시 78세의 나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노래의 주인공이었단다. ‘돈으로 대통령을 사겠다는 장사꾼’을 비꼬는 노래였는데 그 가사 가운데 이런 게 있었어. “아파트 까짓 거 반값, 공산당 까짓 거 허용, 국민을 속이는 기막힌 거짓말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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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에 나와서 그는 그야말로 좌충우돌했다. 경부고속도로를 2층으로 지어서 교통난을 해결하겠다는 등 황당한 공약을 연속부절로 내놓았어.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단다. 경부고속도로든 소양강댐이든 아산만 간척 사업이든 조선소 건립이든 그가 성취했던 일은 대부분 “미친 거 아니냐?” 하는 힐난이 따르는 것이었거든. 역시 노래 속에서 ‘기막힌 거짓말’로 폄하된 ‘아파트 반값’과 ‘공산당 허용’도 그의 머릿속에는 살아 움직이고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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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공산당 허용’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1992년 6월9일 정주영 회장(당시는 야당인 통일국민당 대표)은 “헌법에 사상과 결사의 자유가 보장돼 있으므로 공산당도 허용돼야” 하며, 나아가 “국가보안법도 폐지돼야 한다”라고 밝혀. 당시 군인 출신 대통령 휘하의 여당은 ‘국체(國體)에 도전하는 행위’라고 펄펄 뛰었지만, 이 대기업 회장님 겸 신생 야당 대표는 거침이 없었어. 이 ‘돌출’은 아마 그가 지닌 특이한 이력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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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강원도 통천 사람이야. 금강산을 안고 있는 고을 통천은 오늘날 휴전선 이북에 있어. 즉 실향민이지.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소 판 돈을 훔쳐 대처로 나오면서 타향살이를 시작했고 온갖 일을 겪으며 대기업가로 성장했어. 1989년 1월 그는 북한 당국의 초청을 받아 북한을 방문한다고 공식 발표했어. ‘금강산 공동 개발’ 등 경제협력을 추진하기 위해서였지. 금강산. 바로 한국인들 누구나 꿈에 그리는 명산이자 정주영 회장의 고향 통천이 품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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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은 집 떠난 지 44년 만에 고향 땅을 밟는단다. 아버지는 살아 계실 리 없었으나 집안 사람들은 그곳에 남아 있었고 아버지가 주무시던 방도 그대로 있었다고 해. 그곳에 누운 정주영 회장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 하기야 잠이 올 틈이 있었겠니. 그런데 그 머릿속에 특별히 빛나게 떠오르는 한 소녀의 얼굴이 있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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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정주영 회장이 ‘흙수저’이던 시절 금수저 물고 태어나 자랐던 소녀. “통천에서도 제일가는 부잣집 딸이었다. 경성(지금의 서울)에서 발행하는 <동아일보>를 유일하게 구독하는 집이었다(<시사저널>, ‘사나이 정주영을 울린 세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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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동아일보> 연재소설 <흙>을 읽으며 열광했던 소년 농사꾼 정주영은 농사일을 끝내고는 그 집에 달려가서 신문을 받아오는 게 낙이었대. 이 신문 입수 과정에서 달덩이처럼 밝고 싱그러운 미소의 그녀가 소년 정주영의 마음을 홀라당 빼앗아버린 거지. “경성에서 변호사가 돼서 저 소녀 앞에 나타나리라.” 정주영은 다짐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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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웬만큼 돈을 벌어 고향을 찾은 정주영은 그만 하늘이 무너져버리고 말아. 첫사랑은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둘이나 낳아 기르고 있었던 거지. 피천득의 수필 <인연>의 마지막 줄을 좀 바꿔 되뇌고 있었는지도. “두 번째는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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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첫사랑과의 인연은 끝났어. 남북은 분단되고, 정주영의 고향은 북한의 행정구역이 됐지. 그 후 수십 년 정주영은 종횡무진으로 살며 대기업의 회장이 되었고, 얘기했듯 대통령 선거까지 출마하는 일대 스펙터클을 연출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 출마는 그 인생에서 기록적인 ‘폭망’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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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폭망에 좌절할 그릇이 아니었어. 그렇게 망신과 타격을 당하면 볼품없이 쭈그러드는 게 보통 사람이고, 보통내기가 아니라 해도 최소한 입을 다물고 ‘은거’하기 마련이지만, 정주영 회장은 새로운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어. 1989년 오랜만에 찾았다가 다시 막혀버린 고향, 바로 북한 땅을 향해서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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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북 사업 와중에도 정주영의 ‘그릇’은 여지없이 발휘돼. 그는 자신의 대변자라 할 수 있는 이익치 현대증권 사장에게 입이 닳도록 얘기했어. “김정일 위원장에게 그때 그녀를 꼭 찾아달라고 하게.” 안타깝게도 정주영 회장의 추억 속의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뒤였다고 해. 검버섯 피어난 노인 정주영은 난처해하는 북한 측 인사에게 1시간 동안이나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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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 정경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다. 상상해봐. 북한 관리에게 얼굴 바싹 들이밀고 “어떻게 죽었숨미까? 많이 앓다 죽었숨미까? 무슨 병이었숨미까? 잘 살았숨미까? 굶지는 않았숨미까?” 애달파하는 한 나이 든 남자의 모습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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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또 몇 년이 흘러서 1998년 6월, 정주영 회장은 생애 최대의 이벤트 하나를 기획한다.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할 때, 폐유조선을 가라앉혀 바닷물을 막는다는 아이디어를 내서 성공시켰던 정주영 회장은 그 결과 생겨났던 거대한 땅에 농장을 만들고 소들을 길러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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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출장 중에도 매일 새벽 전화를 걸어 챙겼고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진 날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그에게 소들은 매우 특별했단다. 그의 이런 집착은 홀연히 떠나와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된 고향 땅에 그 이유가 있었다. “서산농장은 그 옛날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돌밭을 일궈 한 뼘 한 뼘 농토를 만들어가며 고생하셨던 내 아버님 인생에 꼭 바치고 싶었던, 이 아들의 때늦은 선물”이었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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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북한 강원도 통천 고향 친척들에게 선물 보따리를 부려놓은 그는 이별하면서 숙모에게 와이셔츠 한 벌을 주고 왔다고 해. “깨끗하게 빨아서 저기 걸어둬요. 다음에 와서 입게.” 아마 그 와이셔츠는 혹여나 옛 첫사랑을 찾게 되면 그 앞에서 입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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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을 잃어버린 여든네 살의 노인은 숙모에게 맡겨놓은 와이셔츠가 있는 고향을 찾아서, 아버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온 탕자가 빚을 갚는 마음으로 공들이고 또 공들여 키운 소떼들을 몰고 북으로 향한다. 바로 판문점을 향해서. 수십 년 분단의 상징이자 유일하게 양쪽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던 판문점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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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의 꿈을 안고 아버지 소를 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제 그때 그 소 한 마리가 500마리가 되어 지난 빚을 갚으러 꿈에도 그리던 산천을 찾아갑니다. 이번 방북이 단지 한 개인의 고향 방문을 넘어 남북이 같이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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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관을 보면서 아빠는 눈물을 흘렸고 프랑스 철학자 기 소르망은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의 주요 무대 중 하나는 판문점이었고, 정주영은 그 무대의 영원한 주역으로 남게 된단다. 우리가 분단을 편안하게 회고하게 될 때 반드시 올려다볼 큰 배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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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지금 생각해보니 최고의 전위예술이었네요.
소떼 방북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네요.

네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한국의 현대사가 그대로 녹아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