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Ryuichi Sakamoto: Coda, 2017)
이미 2017년에 일본에서 개봉했던 다큐 영화 <코다>가 드디어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봉했다.
류이치 사카모토 팬이었던 그는 개봉 전부터 영화 포스터를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해놓고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오늘, 류이치 사카모토를 만났다.
우리를 제외하고 10명 정도가 영화를 관람했는데 모두 혼자 온 여자들이었다. 큰 극장 안에서 다들 적당한 간격을 두고 자리를 잡아 영화에 몰입했다. 공기가 느껴졌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류이치 사카모토, 세상의 중심에 서다
다큐를 보고 가장 놀란 건 그의 음악적 열정만이 아니었다. 그는 음악만큼이나 세상사에 관심이 많았다. 환경문제부터 일본 사회에 가장 심각한 화두인 원전 사고 이후 핵문제까지. 그는반핵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시위 현장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음악을 듣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들이 사는 ‘세상’에도 눈을 떼지 않았다.
Ryuichi Sakamoto: Coda, 2017
단순히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 피아니스트를 넘어 음악으로 세상을 위로하고 치유하며 사회적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내보이는 사람. 바로 류이치 사카모토였다. 아픈 몸으로도 원전 오염 지역을 방문하고, 대지진 쓰나미에 살아남은 피아노를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면서 재난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위로하고 싶다는 그의 간절함이 전해졌다.
대피소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연주한다. 어두운 조명 아래, 그가 누른 건반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낸다. 이를 지켜보는 슬픈 표정의 관객들 한명 한명이 브라운관에 비춰진다. 영화 첫 타이틀이 뜨기도 전에, 눈물이 나올 뻔 했다.
우리는 수많은 소리에 둘러싸여 있어요
그는 1980년대부터 수십여 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카데미를 휩쓸었던 명화 <마지막 황제>부터 최근 개봉작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 <남한산성>까지 쉬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일해 왔다. 그는 암 선고를 받고 치료를 위해 쉬는 중에도 그가 존경하는 감독의 영화 음악이라면 기꺼이 작업에 임했다.
최근작 <레버넌트>에서 주인공이 거대한 설원 위를 걷는 장면이 영화에서 짧게 스치고 지나가는데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그 거대한 설원, 그리고 그 설원을 압도하는 웅장한 사운드는 상상이상이었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The Revenant, 2015)
어떻게 이런 사운드를 만들 수 있지?
이번 영화에서는 그가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하나하나 보여준다. 숲이 우거진 산 속에서 나뭇가지로 이것저것을 두들겨 소리를 채취하거나, 물속으로 마이크를 집어넣고 소리를 낚기도 한다. 바람이 스치고, 빗방울이 떨어지고, 새가 지저귀는 모든 자연 현상은 그의 음악 속으로 그대로 편입된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메인이고 그의 음악은 그것에 살짝 덧입혀진다. 하늘에서 비가 거세게 내리자, 원하는 소리를 얻기 위해 양동이를 뒤집어쓰고 빗속으로 온몸을 내던지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원하던 사운드를 얻어내면 그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다.
그에게 음악이란
심각하던 표정이 원하던 사운드를 만나면 금세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바뀐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직업이 아니라, 취미로 두라고 흔히들 말한다. 하지만 그가 웃을 때 나는 생각했다. 저렇게 웃을 수 있다면,
평생 저 일을 해도 좋지 않을까.
Ryuichi Sakamoto: Coda, 2017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사운드를 놓치지 않고 잡아내서 아름다운 장면에 스며들게 하는 재주. 그는 탁월했다. 20대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는 그는 <마지막 황제>에서 배우로 활약하기도 한다. 하얀 백발에 수수한 웃음을 가진 현재의 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와 카리스마 있는 표정, 20대의 그는 이랬다. 배우를 겸하면서 영화 속 음악 작업도 병행했다. 그리고 그는 아카데미와 그래미에서 동양인 최초로 음악상을 수상했다.
'하루에 8시간 밖에 못해요'
아픈 몸을 이끌고 음악 작업에 몰두하면서 그가 했던 말이다.
‘이제는 하루에 8시간 밖에 못해요.’
하루에 8시간? 나이는 편견이지만 사실 그의 나이 66세에 8시간 ‘밖에’라는 말을 쓴다는 게 놀라웠다. 그럼 대체 건강할 땐 몇 시간씩 했다는 걸까.
감독이 마음에 들어 한 번 더 작업하자고 제안했을 때 그는 일주일 만에 마흔 다섯 곡을 써갔다고 한다. 잠을 잘 수나 있었을까. 예순 여섯의 나이에, 8시간을 사운드에만 몰입하고도 더 작업할 수 없음을 아쉬워한 그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오갔다.
‘나는 내 일에 얼마나 열정적인가.’
물의 정원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우리는 자연이 보고 싶었다. 운길산역으로 향했다. 그곳에 가면 자연을 만난다. 강이 흐르고, 산이 겹겹이 병풍을 이루고, 풀이 가득하고, 나무와 꽃이 새와 곤충들에 둘러싸여 있는 곳. 작년에 오고 처음이다. 빨간 양귀비꽃이 군을 이루어 피었다. 한참 드론을 날리던 중년 아저씨와 카메라 장비를 갖춰 연신 사진을 찍는 중년 아주머니들이 눈에 들어온다.
<물의 정원 in 운길산역>
‘취미가 있는 건 참 좋다, 그치.’ 그가 말한다.
한적한 벤치에 앉았다. 강물이 잔잔하게 흐르고, 커다란 나무가 수면 위로 가지를 내렸다. 이국적인 정취다. 풍경을 보면서 류이치 사카모토가 숲에서 자연을 채취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도 소리를 담아본다. 옆에 앉아있던 그는 축가로 만들었다는 한 가수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연의 소리와 함께 담긴다. 물소리도,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도, 멀리서 지나가는 기차소리도, 모두 귓가에 생생하게 전해진다. 문득 포스터에 적힌 문구가 떠오른다.
‘세상은 소리로 가득 차있어요.’
지금까지 이런 아름다운 소리를 놓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 때 쯤, 중년 여인 셋이서 우리 앞을 지나며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고 깔깔깔 웃는다. ‘옛날사람!’이라고 외치며 서로를 가리킨다. 나도 아는 노래를 너도 알아서인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반가움 때문인지 그들은 한참을 걸으며 웃었다.
꽃 피는 계절에, 자연과 하나 되어
행복한 사람들 소리가 하나씩 귀에 담긴다.
류이치 사카모토처럼 창조해낼 순 없어도,
‘우리, 놓치고 살지는 말자.’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참고기사>
전시 중인 건 알고 있었는데, 영화도 나온 줄 몰랐네요. 리뷰를 보니 영화를 보고싶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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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치 사카모토 음악 좋아하시면 정말 울림이 있는 영화가 될거에요. 보고나서도 한참 여운이 남았답니다^^ 이제 영화봤으니 전시도 가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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