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출근을 했다. 5시간 있으면 반납할 랩탑으로 글을 하나 남겨둔다. 먼저는 그동안 이곳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었던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주고 싶다. 사업을 정리한 것까지 퇴사로 친다면 아마 이번이 다섯 번째 퇴사일 거다. 친구들 중엔 나보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아직까지 한 회사에 다니는 녀석도 있으니 내 이직 경험은 연차에 비해 화려하다면 화려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까지의 기록을 보면 나는 평균 2년이 좀 못 되어서 직장을 바꾸는 셈이 된다. 이런 프로파일에 부담을 느끼지 않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채용하는 쪽에서 본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면에서. 하지만 내 생각에 이런 질문은 우리가 너무 뼛속까지 ‘을’이라서 생긴 것 같다. 재직 기간이 길어야 우수한 직원이라고 생각하는 회사와 계약할 이유는 나에게도 전혀 없다. 오랫동안 버틴 능력에 무턱대고 가치를 매기는 회사라면 안 가 봐도 뻔하지 않을까.
나는 이직지상주의자(?)는 아니다. 조직에서 불만족을 느낄 때 항상 떠나는 게 답은 아니란 걸 나도 알고 있다. 조직에 불만이 있을 때 취할 수 있는 행동에 대해 유명한 조언들이 있는데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메시지는 동일하다. 먼저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는 “Change it, Accept it, Leave it”이라고 말했다. 머리글자를 따서 CAL이라고도 불린다. 조직을 변화시키거나, 그냥 수긍하고 머물러 있거나, 떠나라는 말이다. 위르헌 아펄로(Jurgen Appelo)도 <세상을 바꾸는 방법>에서 비슷한 이야길 했다. 조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살던지(Accept), 거기를 나오던지(Leave), 변화관리를 배우라(Change)고. 또 출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재밌는 표현으로 “Change the organization or change the organization”이란 말도 있다. 조직을 변화시키거나(Change) 아니면 다른 조직으로 옮겨가라(Leave)는 이야긴데, 나는 주변에 말할 때 마지막에 하나를 더 붙여서 “Change the organization or change the organization or change the organ”이라고 농담을 한다. 둘 다 싫으면 니 속을 바꿔라?(Accept)
결국은 조직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변화시키거나, 받아들이거나, 떠나라는 거다. 선후관계가 없을 수도 있지만, 나는 이 중 가장 먼저 취해야 할 행동이 ‘Change’라고 생각한다. 문제를 인식한 즉시 ‘Accept’ 또는 ‘Leave’를 선택하는 건 그저 문제를 외면하거나 회피하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선택은 문제 상황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뿐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
‘Change it’
이번 회사에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몇 가지 개선하면 좋을 부분들을 찾았다. 나는 ‘변화시키기’를 시도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조직이 더 효과적으로 협업을 하는 구조에 대한 것이라던지, 구성원들의 역할/책임 정의가 더 명료해져야 한다는 것이라던지, 내가 하는 일이 회사의 발전과 나의 발전을 동시에 이끌 수 있게 조율돼야 한다던지 하는 것 등이었다. 나는 꾸준히 내가 속한 조직의 책임자, 회사의 인사 책임자, 협업하는 직군의 부서장 등과 이런 이야길 나눴다. 사석을 제외하고 진지하게 이 주제로 만난 게 최근 1년 기준으로 7회 정도다. 또 이런 문제 의식을 공유하고 논의를 제안하는 콘텐츠를 제작해서 팀 세미나를 하기도 하고 직원들이 볼 수 있는 공간에 글을 쓰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가 제시하는 발전된 그림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좋은 심적표상을 제시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내가 일하는 방식을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하고 또한 이러한 방식이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도록 하는 데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동료들의 지지를 얻었고 우수한 업무 평가도 받았지만 결정 권한을 가진 레벨에서는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지만 현실에 맞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말은 결국 ‘현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셈이란 걸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문제를 알지만 해결하길 원치 않는 조직들은 많다. 과정에서 내가 좀 더 탁월한 변화 관리 에이전트로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도 들었지만 어느 순간에는 내가 이 소모전에 들일 에너지가 더이상 없음을 알게 됐다. 나는 면담 후에 항상 기록을 남겼는데, 자료들을 뒤져보면 나는 항상 조직의 변화에 대해 똑같은 이야길 하고 있었다. 또 그때마다 회사도 나에게 미적지근하게 느껴지는 똑같은 대답을 해왔다. 그렇다면 더 이상 애쓸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Accept it’
내 생각엔 ‘이게 어차피 내 회사도 아니며, 동료들도 다 그냥 그렇게 회사를 다니고 있고, 월급 이상을 회사에서 바라는 건 과욕이니 행복은 주말에 찾자’는 생각을 믿으려고 노력하는 게 ‘받아들이기’다. 다시 말하면 이런 생각을 해야 ‘받아들이기’의 삶이 수월해진다. ‘변화시키기’가 한계에 부딪혔다고 생각할 때쯤 나는 ‘받아들이기’로 태세전환을 시도했다. 내가 불만족감을 느끼는 것들만 참기로 하면 따라오는 안정된 급여, 괜찮은 복지, 저녁이 있는 삶, 말하면 아는 회사에 다니는 것에 대한 은근한 자랑 같은 것들은 거래할 수 있는 조건으로 보였다. 문제는 내가 진짜 그렇게 믿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출근하려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복잡한 출근길에, 회의 중에, 주말이 끝나가는 저녁에 일어나는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받아들이기’ 모드를 켜보곤 했다. 개인적인 기질상 이 체제는 굉장히 견디기 어려웠다. 매 끼니 불량식품을 먹으며 사는 기분이었고 내 존재적 가치를 부정하고 맞지 않는 틀 안에 스스로를 욱여넣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만큼 더욱 대체 욕구 충족에 집착하게 됐다. 증언을 해준 분들은 없지만 이 ‘받아들이기’로 보낸 3-4달 동안 나는 사람이기보단 영혼 없는 회사의 한 ‘기능’에 가까운 느낌이었을 거다.
‘Leave it’
그나마 얼마 없는 짐을 차에 싣고 책상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나니 회사 주변 카페 5곳에서 무료 음료를 한 잔씩 마실 수 있는 쿠폰이 모였다. 다 읽고 나가려고 했지만 절반 정도 읽은 책은 아쉽지만 책장으로 돌려놔야 할 것 같다. 나는 2018년 나의 삶을 주도하는 핵심 가치를 ‘Proactive’로 정했고 이 가치를 직업의 영역에서 실행하기 위한 OKR로 이직을 설정했다. ‘Leave it’이다. 여러 기회들을 검토하면서 기본적으로 3가지 사항에 대해 충족할 때만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1. 개인: 개인적인 성장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인지
2. 가족: 하루 3시간 이상을 가족과 보낼 수 있고 경제적인 충족이 이뤄지는지
3. 사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하는지
일단 이 세 가지를 모두 충족시켜줄 회사는 흔치 않았다. 그나마 찾았던 기회들 중 추천을 받아 지원했던 곳은 떨어졌고, 다른 한 곳은 재직 중인 회사와의 복잡한 관계로 이직이 제한됐다. 그리고 6월에 검토했던 세 건의 기회 중에 서로의 필요에 대해 공감이 이뤄졌던 한 회사와 만남을 가졌다. 새로운 기대가 내 마음에 커지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됐다. 나는 바로 그다음 날 현재 회사에 퇴사 계획을 알렸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지난 한 달은 어느 때보다 길었다. 큰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고 내 업무를 받아줄 사람은 지정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감사 인사를 나눠야 할 분들과 주간 계획을 세워서 티타임이나 식사를 했다. 그러나 저러나 오늘이 마지막이다.
이직할 회사가 좋은 곳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러면 나는 ‘그럴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고 답하곤 했다. 사람은 모두 각자의 욕구가 있고 모두를 만족시키는 조직은 어디에도 없을 거다. 다만 그 안에서 함께 변화를 이뤄나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번 경험을 통해 한 번 더 성숙한 단계의 ‘Change it’을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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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한 주를 쉬었다가 새 회사로 출근하기로 했다. 일주일 동안 아내와 데이트 계획을 세웠고 두 개의 온라인 강좌를 수강할 생각이다. 약간 동작이 이상해진 카메라와 미싱도 수리를 받을 거고 24시간 영업하는 햄버거 가게에 가서 새벽부터 책도 읽을 생각이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선 좋아하는 노래를 크게 틀어 놓고 차가운 커피를 마셔야겠다.
자신이 정한 기준과 열정이 다할때 떠나는 용기 ... 정말 부럽습니다.
전 leave it을 하지 못하고 회사에만 오면 2년 뒤부터는 열정이 식어버리네요.
제 능력이 부족한것도 있지만... 요즘 윗분께서 다시금 열정을 불태우게 해주시니 그냥 저냥 다니는 중... 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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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을 다시 지펴줄 수 있는 상사가 계시다면 흔치 않은 직장에 계신 것 같아요. 비 맞은 장작더미같이 눅눅하게 자리에서 모니터만 보고 있어도 면담한 번 요청 않으시는 분들도 계신데.ㅠ 힘내세요! 같이 기뻐해주셔서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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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작을 축하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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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해요. 축하 받을 일임이 분명한 것 같아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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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 가치관이 비슷하신것 같아요. 저도 이번에 퇴사를 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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