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말라고 하는 제주도에 염치 불구 다녀왔습니다. 도지사의 간곡한 부탁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보다 한라산의 강한 유혹을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 마스크와 손소독제 잘 챙겨 이곳저곳 기웃거리 않고, 오로지 백록담만 올랐다가 곧장 돌아오지 뭐”란 생각으로 반기지 않는 제주도로 향했습니다.
오지말란 곳으로 가려는 청개구리들은 소생 말고도 넘쳐 났습니다. 4월 초파일 김포공항 제주 게이트엔 나들이 인파로 북새통이더군요. 왠지 모를 찝찝함에 ㅠ
제주공항 5번출입문으로 나와 600번 버스에 탑승, 1시간 남짓 달려 서귀포 월드컵경기장 앞에 내렸죠. 서귀포에서 돌싱 생활을 즐기는(?) 선배집에 2박을 신세 지기로 한 겁니다.
뭐 애초부터 민폐 끼치려 든 건 아니고요. 사월초파일부터 어린이날로 이어지는 황금연휴에 임박해 한라산 산행을 결심하게 되어 급히 산들머리와 가까운 게스트하우스를 노크했지만 하나같이 만실이었습니다. 하여 선배한테 예약 좀 알아봐달라고 전화했다가 “무슨 게하야, 내 집에 빈방 많아. 무조건 이리로 와!”라는 명령(?)에 냉큼 달려온 거지요.
오랜만에 선배 만나 어둑해질 무렵 법환포구로 나가 향토음식인 흑돼지 두루치기 시켜 회포를 풀었죠. 내일 산행을 위해 아쉽지만 각 일병으로 자리를 털었습니다. 선배 역시 리조트 업무를 보는 터라 내일은 연휴맞아 찾아 온 손님 응대로 늦은 밤까지 바쁠 것 같다기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오월 첫날, 선배 집을 나와 걸어서 5분거리에 있는 서귀포버스터미널로 들어섰습니다. 06시, 성판악 가는 281번 버스에 올랐습니다. 버스는 서귀포 도심을 벗어나 한라산 기슭을 구비돌아 40여 분만에 성판악휴게소에 닿았습니다. 성판악 휴게소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고 노변 주차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지요. 산길이 몸살을 앓을 것 같습니다. 가뜩이나 코로나 사태로 흉흉한데 이러한 대열에 동참하고 있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게소에서 김밥 두줄을 챙겼습니다. SNS상에 올라온 성판악휴게소 김밥 평이 영 좋지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마저도 10여분 줄을 서 기다린 끝에 손에 넣을 수 있었지요.
성판악 주차장에서부터 정상인 백록담까지 거리는 9.6km입니다. 산길을 따라 졸참나무와 때죽나무, 그리고 구상나무가 빼곡하게 도열해 객을 반깁니다.
연록의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숲향이 더없이 싱그럽습니다. 성판악 코스는 해발 1,600m에 이를 때까지 조망이 없는 숲속길이라 매우 지루해 인내를 요하지요. 어느 산객이 지루함없이 성판악코스를 걷는 방법을 SNS에 남겨놓았는데 나름 수긍이 가 따라해보기로 했습니다.
초입서부터 해발고도가 100m씩 높아지는 지점에 해발 표시석이 세워져 있는데 그걸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사진에 담는 것입니다. 이거 해보니 정말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이쯤되어 표시석이 나올만한데 안보이면 애가 탑니다. 이게 뭐라고 ㅎ
아무튼 해발 800~1900m까지 빠짐없이 담다보니 정상이 코앞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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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000m표시석을 지나자 樹木은 삼나무로 바뀝니다. 울울창창 곧게 치뻗은 삼나무군락길을 걷노라니 무릉도원이 여긴가 싶습니다.
산길 주변 숲은 온통 산죽으로 뒤덮혔습니다. 강한 번식력을 가진 산죽은 생태계를 교란시켜 숲을 망가뜨리는 주범이라지요.
숲길 저만치에 햄버거를 닮은 쉼터가 눈에 들어옵니다. 무인 쉼터인 속밭 대피소입니다. 잠시 배낭 내려 이마의 땀을 훔치고 목젖도 적시고 영역 표시(?)도 했습니다. 4년 전 이 길을 걸을때는 화장실이 간이식이라 역한 스멜의 기억이~ 지금은 화장실을 새로 지어 깔끔해졌더군요.
지금껏 완만하던 길은 속밭 쉼터를 벗어나면서 조금씩 오름길로 이어지자, 산객들의 조잘거림은 쑥 들어가고 대신 거친 숨을 연신 토해 냅니다.
사라오름 갈림길에 이르러 잠시 망설였습니다. 샛길로 빠져 왕복 40분만 발품팔면 만날 수 있는 사라오름인데... 사라오름은 해발 1,324m로 제주도 내 386개의 오름 중 가장 높습니다. 하지만 몇해 전 걸음한 적이 있기에 이번엔 그냥 패스~
산꾼들의 웅성거림이 가깝게 들려옵니다. 시야가 트이자, 파란 하늘아래 시커먼 돌돔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산중에서 웬 돌돔이냐구요? 여기서 돌돔이란 돌을 쌓아 지은 반구형 지붕을 말합니다. 진달래밭 대피소의 명물, 돌돔형 화장실입니다.
하절기엔 오후 1시 이전에 이곳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해야 정상으로 향할 수 있지요. 1시 이후 안전산행을 위해 정상 방향은 통제합니다.
여기서 정상 백록담까지 남은 거리는 2.3km, 마의 '레드 구간'입니다. 성판악에서 한라산 정상까지 난이도를 3개 등급으로 표시해 탐방로 안내판에 색깔별로 표시해 놓았습니다.
성판악에서 속밭대피소까지 4.1km는 쉬운 C등급(옐로우), 속밭대피소에서 진달래밭대피소까지 3.2km는 보통인 B등급(그린), 진달래밭대피소에서 백록담까지 2.3km는 어려운 A등급(레드)이지요.
나홀로 산행하며 나름 터득한 것은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입니다. 여럿이 산에 오르며 조잘대는 수다보다 홀로 걸으며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길 즐기는 편이지요. 대피소 한 켠 벤치에 걸터앉아 지난 시간을 반추해 봅니다. 산길에 들머리가 있으면 반드시 날머리가 있듯이 직장생활에 들어선지 36년, 어느새 나설 때가 된 거지요. 그래서인가, 요즘들어 부쩍 머릿속이 심란하고 복잡합니다. 홀로 한라산을 찾은 것도 복잡한 머릿속을 심플하게 비워 초기화하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각설하고,
진달래밭대피소를 벗어나 해발 1,600m 지점에 이르자, 사방이 탁 트이면서 고사목 군락이 드넓게 펼쳐집니다. 만고풍상을 꿋꿋이 견뎌내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앙상한 고사목들이죠.
저멀리 한라산 정상부 산허리를 감싸 돌아오르는 산객들의 모습이 가물가물 시야에 잡힙니다. 가쁜 숨을 토해내며 끝없이 이어진 목계단을 오릅니다. 입안은 팍팍해 단내가 가득합니다. 모자챙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은 연신 신발코를 적십니다.
해발 1,900m 지점, 목계단에 멈춰선 산객들로 정상까지 긴 줄이 이어졌습니다. 정상 표시석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으려고 대기하는 줄인데, 보아하니 족히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탐방객 관리 요원이 핸드마이크로 거리두기 협조 요청하느라 진땀을 빼는 모습도 보입니다. 소생은 곧장 정상에 접근, 표시석을 등뒤에 두고 셀카모드로 인증샷을 날렸지요. 07시에 성판악휴게소를 출발해 11시 00분 정상에 닿았습니다.
한라산 정상(1,950m)에서 바라본 하늘은 맑고 파랬습니다. 천변만화의 백록담인데 제주할망신께서 이날은 극상의 조망을 허락하셨습니다. 둘레 3km의 타원형 분화구는 옛날 옛적 요정과 흰사슴이 만나던 호수라 하여 '백록담'이라 부른다지요. 물이 말라버린 백록담 바닥엔 요정의 눈썹을 닮은 눈얼음이 희끗하게 남아 있네요.
사회적 거리두기에 익숙해진 산객들이 여기 저기 거리를 두고 앉아 이야기 꽃을 피웁니다. 이따금 큰 목소리로 길게 통화하는 이들이 있어 정취를 깨기도 하는데, 산에서만큼은 세상과의 소통을 잠시 내려놓는 게 어떨까요. 두 팔 벌려 가슴을 크게 열었습니다. 산소포집량을 극대화? 하기 위함이죠. 하산하기 싫어 40여분을 밍기적거리다 다시 배낭을 둘러 멨습니다.
정상의 달콤함에 젖어 하산을 주저하면 낭패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이 그러하듯 말이죠.
하산 코스는 관음사 방면을 택했습니다. 백록담에서 관음사탐방지원센터까지 거리는 8.7km입니다. 성판악 코스는 몇번 걸음했으나 관음사 코스는 초행이라 기대와 설레임을 갖고 목계단을 내려섰지요. 백록담을 솟구쳐 올린 산세가 웅장하고 장엄했습니다. 시선을 뗄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자꾸만 발목을 잡습니다. 목계단에 주저앉아 한라의 비경을 스케치북에 담는 벽안의 청년이 마냥 부럽기도 했습니다. 화구 들고 산야를 찾던 소생의 청년 시절이 오버랩되어서 말이죠. ㅎ
등뒤로는 거뭇한 정상부의 급사면이, 전면에는 아이들이 도레미송을 부르며 뛰어나올 것 같은 너른 구릉이, 가까이엔 매력 '뿜뿜'인 구상나무 고사목들이 객을 유혹합니다. 시선을 옮길 때마다 무시로 변하는 한라산을 보았습니다. 지루할 틈 없이 걷다보니 해발 1,560m 지점, 용진각대피소 터에 닿았습니다.
2007년 태풍 나리의 물폭탄으로 통째 사라진 대피소 빈터에 걸터앉아 땀을 훔칩니다. 주변은 웃자란 산죽이 지천입니다. 골바람에 흔들려 사각거리는 산죽 위로 까마귀가 날아와 날개를 접습니다. 산죽 이파리 밑은 여태 눈이 남아 있네요. 잠시 멍 때리며 파란 하늘을 우러러 보는데 생뚱맞게도 눈물이 찔끔 납니다. 이 느낌 뭘까요?
용진각 대피소를 뒤로하고 현수교를 건너 삼각봉 대피소를 통과합니다. 마주보이는 산봉우리가 삼각 모양이라 삼각봉대피소이죠. 백록담 정상까지 가려면 성판악코스의 진달래밭대피소나 이곳 삼각봉대피소를 반드시 13시 이전에 통과해야만 합니다. 동절기엔 12시까지이구요.
탐라계곡을 지나 날머리, 관음사탐방지원센터를 빠져나온 시간은 16:00분, 성판악을 07:00분에 출발했으니 꼬박 9시간이 소요되었군요. 정상에서 밍기적거린 시간과 중간 중간 쉰 시간(80분)을 빼니 총 7시간 40분 정도 걸은 셈입니다.
탐방센터에 들러 한라산등정인증서를 교부받은 다음, 475번 버스를 타고 산천단 입구에 내려 서귀포버스터미널로 가는 281번 버스로 환승해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천변만화의 한라산은 무시로 배낭을 꾸리게 하는 '끌림' 강한 산이라 언제 또 발동이 걸릴지 모릅니다. 다음 번엔 겨울 한라산을 도모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