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트북스 전자책 폴리애나 1] 25장. 기다리는 놀이

in pollyanna •  7 years ago 

25장. 기다리는 놀이 


존 펜들턴이 해링턴 저택을 방문한 다음 날, 폴리는 전문의의 왕진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폴리애나, 얘야.” 폴리가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워런 선생님 외에 또 다른 분이 오셔서 널 진찰하실 거야. 그분이 네가 더 빨리 낫는 데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 주실지도 모르지.”


폴리애나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났다.


“칠턴 선생님이군요! 이모, 칠턴 선생님이 오시게 되면 너무 좋을 거예요. 항상 바라고 있었는데 이모가 안 된다고 하실까 봐 걱정했거든요. 그날 베란다에서 이모를 본 일 때문에요.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죠. 그런데 이모도 그분이 오시길 바라신다니 너무 기뻐요!” 


폴리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이내 새빨개졌다가 다시 창백해졌다. 하지만 다시 입을 열었을 때에는 밝고 명랑하게 말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오, 아니다. 얘야! 내가 말한 건 칠턴 선생이 아니야. 새로운 의사란다. 뉴욕에서 아주 유명한 선생님인데 너와 같은 부상에 대해 아주 많이 알고 계신단다.” 


폴리애나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분은 칠턴 선생님의 반만큼도 모를 거예요.” 


“아냐. 틀림없이 많이 아실 거다.” 


“하지만 펜들턴 아저씨의 부러진 다리를 고친 건 칠턴 선생님이셨어요. 크게 상관이 없다면 전 칠턴 선생님을 불렀으면 좋겠어요. 정말이에요!” 


폴리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어렸다. 그녀는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예전의 엄격하고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난 상관이 있다, 폴리애나. 그것에 아주 많이. 널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다 하겠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로 칠턴 선생님은 부르고 싶지 않구나. 그리고 그는 네 부상에 대해 그 뉴욕의 선생님만큼 잘 알지 못해. 그분이 내일 오실 거야.” 


폴리애나는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모, 이모가 만약 칠턴 선생님을 사랑한다면….” 


“뭐라고, 폴리애나?” 폴리의 목소리가 매우 날카로워졌다. 뺨도 새빨개졌다. 


“그러니까, 만약 이모가 다른 사람이 아닌 칠턴 선생님만 사랑한다면 얘기는 아주 달라졌을 것 같아요. 좋은 쪽으로요. 전 칠턴 선생님이 정말 좋거든요.” 


그때 간호사가 방으로 들어오자 폴리는 안도하며 벌떡 일어섰다. 


“미안하구나, 폴리애나.” 폴리가 약간 딱딱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판단을 해야 해. 게다가 이미 약속이 잡혀 있단다. 의사 선생님이 내일 뉴욕에서 오실 거야.”


하지만 다음 날 의사 선생님은 오지 못했다. 전문의 자신이 갑자기 병이 나는 바람에 부득이 왕진을 연기한다는 전보가 도착한 것이다. 이 때문에 폴리애나는 칠턴 선생님을 불러 달라고 다시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모, 그러면 훨씬 더 쉽잖아요.”


하지만 예전처럼 폴리는 머리를 저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그것 외에 폴리애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해 주겠다고 더욱 걱정스럽게 약속했다.


하루하루 기다림의 날들이 지나가고, 정말 폴리는 조카를 기쁘게 하기 위해 모든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믿기지가 않아요. 할아버지도 날 믿게 하지는 못할걸요.” 어느 날 아침 낸시가 톰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마님이 하루 종일 잠시도 아가씨 곁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들고 있어요.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플러피든 버피든 위층에는 얼씬도 못했는데, 지금은 아가씨가 좋아한다며 침대 위에서 마구 뒹굴어도 내버려 두고 있어요!”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에는 그 작고 달랑거리는 유리를 다른 창으로 옮기고 있어요. 아가씨 말로는 햇빛이 무지개를 춤추게 한대요. 아가씨에게 보내는 꽃다발 말고도, 콥 씨네 온실에 세 번이나 티머시를 보내 싱싱한 꽃을 가져오게 했어요. 거기다 또 어느 날인가는 간호사가 침대 앞에 앉아 있는 마님의 머리를 손질해 주고 있었는데, 아가씨가 침대에서 행복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었어요. 마님이 아가씨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매일 그렇게 머리를 빗으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톰 할아버지가 쿡쿡 웃었다. 


“글쎄다. 마님은 이마 위의 머리가 곱슬거려도 그렇게 보기 싫지 않아.” 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럼요, 마님은 이제 보통 사람 같아요. 사실 거의….” 


“잘 생각해 보거라, 낸시!” 톰 할아버지가 천천히 웃으며 끼어들었다. “한때는 마님이 아름다운 분이셨다고 말했을 때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겠지.” 


낸시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물론 마님은 아름답지 않아요. 하지만 리본이나 아가씨가 목에 걸어준 레이스 장식을 하신 걸 보면 전혀 딴 사람 같긴 해요.” 


“내가 그랬잖아.” 톰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늙은 게 아니라고 말이야.” 


낸시가 웃어 보였다.


“그래요. 마님이 늙은이 흉내를 잘 내지 않게 된 건 맞아요. 폴리애나 아가씨가 오기 전과는 사뭇 다르죠. 할아버지, 마님이 좋아했던 분이 대체 누구예요? 전 아직 모르겠어요.”


“그래?” 톰 할아버지가 얼굴에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말해줄 수는 없지.” 


“톰 할아버지, 제발요.” 낸시가 졸라 댔다. “이 동네에서 물어볼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래요.” 


“그렇지도 않을걸. 하지만 한 명만은 절대 대답해 주지 않을 거야.” 톰 할아버지가 히죽 웃다가 갑자기 눈빛이 어두워지며 물었다. “그래서 오늘 아가씨는 좀 어떠시냐?” 


낸시가 고개를 흔들었다. 얼굴도 금세 진지해졌다. 


“그냥 똑같아요, 할아버지. 제가 보기엔 별다른 차도가 없어요. 그냥 누워서 잠을 자거나 애써 웃으며 기쁨을 찾아보려 하고 있죠. 해가 진다거나 달이 뜬다거나 뭐 그런 일들로 말이에요. 그런 모습을 지켜보자면 정말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요.” 


“나도 안다. 그 ‘놀이’ 말이지. 마음씨가 너무 고운 아가씨야!” 톰 할아버지가 약간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할아버지도 놀이에 대해 들으셨군요?” 


“아, 그래. 오래 전에 아가씨가 얘기해 주었지.” 톰 할아버지는 머뭇거리다가 입가를 조금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어느 날인가 내가 허리가 너무 굽었다고 불평을 했더니 글쎄 그 조그만 아가씨가 뭐라고 했는지 아니?” 


“글쎄요. 아가씨도 거기선 기쁨을 찾기가 어려웠을 텐데요!” 


“그랬지. 풀을 뽑을 때 허리를 많이 굽히지 않아도 되니 기뻐하라는 거야. 이미 어느 정도는 굽어 있으니 말이야.” 


낸시가 슬프게 웃었다. 


“전혀 놀랍지도 않네요. 아가씨라면 뭐라도 찾아냈을 거예요. 아가씨를 처음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우린 계속 그 놀이를 해 왔어요. 저 말고는 아가씨가 함께 놀이를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물론 마님과도 해보려 했지만요.” 


“설마, 마님이!”


낸시가 킥킥 웃었다. 


“저도 정말 상상이 안 갔어요.” 


톰 할아버지가 허리를 폈다.


“난 그저 마님에게는 조금 놀라운 일이었을 거라 생각했단다.”


“음, 맞아요. 예전엔 그랬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마님이 혼자 그 놀이를 한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아가씨는 왜 마님께 그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에게는 모두 말했는데 말이다. 아가씨가 다친 후로는 여기저기서 그 놀이 얘기를 하고 있거든.” 톰 할아버지가 말했다.


“맞아요. 마님께는 말하지 않았죠. 이건 아빠가 가르쳐 준 놀이라 아빠에 대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데, 이모는 아빠 얘기를 싫어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마님에게는 얘기하지 못했나 봐요.” 


“아, 알겠군, 알겠어.” 톰 할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들은 그 목사를 싫어했으니까. 제니 아가씨를 데리고 가 버렸다고 말이야. 그 당시에 마님은 어렸지만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거지. 제니 아가씨를 무척 따랐거든. 참 딱한 일이야.” 


“맞아요. 세상 일이 늘 그렇죠.” 낸시가 한숨을 쉬며 부엌으로 돌아갔다. 


기다림의 나날을 보낸다는 것은 모두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간호사는 쾌활한 척하려 했지만 눈은 늘 수심에 가득 차 있었다. 의사는 다분히 불안해하고 초조해했다. 폴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얼굴 위에서 곱게 물결치는 머리카락도, 목에 달린 레이스 장식도 점점 야위고 창백해져 가는 그녀의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폴리애나는 개를 어루만져 주거나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거나 꽃을 감상하거나 자신 앞으로 온 과일과 젤리를 먹었다. 그리고 병상으로 날아드는 수많은 위로의 말에 셀 수도 없이 밝은 대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점점 창백해지고 야위어 갔다. 재빠르게 움직이는 작고 야윈 손과 팔만이 한때는 활발하게 걸어 다녔지만, 지금은 비참하게 가만히 이불 속에 놓여 있는 그녀의 불쌍한 발과 다리를 강조할 뿐이었다. 


폴리애나는 학교에 다시 가거나 스노우 아주머니나 펜들턴 아저씨를 만나러 가거나 칠턴 선생님과 함께 마차를 타고 간다면 얼마나 기쁠지 낸시에게 이야기했다. 이런 기쁨이 모두 현재의 일이 아니라 미래의 일임을 그녀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낸시는 혼자 있을 때면 그 생각을 하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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