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국가 싱가포르 이야기 2 싱가포르의 다양한 중국인 공동체

in singapore •  7 years ago  (edited)

싱가포르에는 중국인, 말레이인, 인도인 등이 함께 모여 살고 있다. 래플스 경은 처음 싱가포르를 발견하고 난 뒤, 섬을 본인 입맛에 맞게 구획하였다고 한다. 각각의 다양한 인종들을 중국계 거주지, 인도인 거주지, 말레이인 거주지, 영국 동인도 회사 직원들 및 관련 서양인들 거주지로 분산시키는 도시계획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사실 지금의 차이나타운은 그 당시에 중국인들에게 배정된 지역은 아니었다. 실제로 래플스가 배정한 지역은 현 차이나타운 뒤편, 맛있는 한국식 중국집 '동방홍'이 자리한 지금의 Telok Ayer st 였다. 지금도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일면 ‘원조’ 차이나타운이라고나 할까? 지금의 차이나타운은 20세기에 들어 대륙으로부터 오는 중국인 이주자들의 수가 급증하면서 좁은 뗄록 아이에르 스트리트로는 감당할 수가 없는지라 확장한 지역이다. 이 ‘원조’ 차이나타운 뗄록 아이에르 스트리트의 주류는 호키엔 Hokkien이라고 불리는 중국인들이었다. 중요하다. 이 ‘호키엔’ 이라는 단어.

  • 호키엔 Hokkien


호키엔식 새우탕면

싱가포르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중국계 싱가포르 인들은 그 출신 지역에 따라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복건(福建 Hokkien), 광동(廣東 Cantonese), 광동 조주(潮州 TeoChew), 해남(海南 Hainanese), 객가(客家 Hakka), 요렇게. 그리고 이러한 분류는 동남아시아 각 지에 퍼져있는 화교 인구를 분류할 때에도 유효하게 적용되는 기준이다. 크게 보면, 인도차이나 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내륙지방에는 주로 광동 혹은 조주 지역 출신 화교들이 주류이고,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 브루나이 등 해상지역의 경우에는 복건, 특히 복건 남부 지역 출신의 화교들이 꽉 잡고 있었다. 1800년대 초 혹은 래플스 경이 싱가포르를 발견하기 그 이전부터. 이들 복건 남부 지역 출신 화교들을 통틀어 호키엔 Hokkien이라고 지칭한다. 싱가포르의 경우 호키엔 그룹이 명백히 주류였고, 지금도 주류다. 객가는 퍼져있는 성향이 강하고, 해남은 그 세勢가 다른 출신들에 비해 그리 강하지는 않다. 대신 해남인들의 강점은 그 음식문화에 있다.

이렇게 나뉜 지역들 간의 차이를 마치 우리의 경상도, 전라도간 차이 정도로 이해하면 안 된다. 일단 사용하는 언어가 서로 달랐다. Hokkien 들이 쓰는 민남어, 광동 출신들이 쓰는 광동어, 객가어, 조주어 등등의 방언들은 말만 방언이지 그냥 다른 언어였다. 무려 20세기 중후반 무렵 지금의 중국 표준어, 보통화가 싱가포르에 도입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글로 소통하였고, 심지어 같은 중국인임에도 중간에 통역을 두고 대화하는 경우도 비일비재 했다. 음식문화 역시 상당부분 다른지라 지금도 호커센터Hawker Centre나 푸드코트에 가보면 각 지역별 코너가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복건식 새우탕면, 조주식 Kway Teow 하는 식으로.

로컬 교회에 가보면 예배를 세 번씩 드리는 경우를 많이 보는데, 아침에는 영어로, 낮에는 중국 표준어, 오후에는 Hokkien (이 단어는 그 그룹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그룹이 쓰는 언어를 지칭하기도 한다.) 혹은 광동어로 예배를 드린다. 여전히 각 지역 방언이 많이 쓰이고 있다는 뜻. 그래서 정규 교육을 받은 중국계 싱가포르 인들은 공식적으로는 영어사용, 친구들과는 중국 표준어(보통화) 혹은 방언사용, 집에서 부모님, 조부모들과 방언사용 등 총 세 가지의 언어는 기본으로 하는 사기캐들이다. 물론 세 개의 언어를 한 번에 익히는 만큼 성장과정에서 한 가지 언어만 줄곧 익히는 보통의 국가들에 비해 해당 구성원의 어휘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꾸준히 있어 왔다는 점, 그리고 중국어는 할 줄 알아도 정작 한자는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라는 점 등은 지금도 싱가포르 사회에서 꾸준히 지적되어 오고 있다. 게다가 요즘은 그 특유의 지역 색들이 영 제너레이션을 중심으로 점점 옅어지고 있는 추세라, 여러 뜻있는 학자 및 민간인들이 그 지역 정체성의 유지를 위해 힘쓰고 있다고 한다.

  • 타이거 밤 Tiger Balm

이렇게 다양한 지역 색을 띠고 19세기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로 건너 온 중국인들 대부분은 일용직 노동자들이었지만, 그 외 몇몇 시세에 밝은 이들은 이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시작해 거부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돈 많은 화교 이미지의 시초라고 할 수 있을 것. 어떤 사업 아이템이 가장 유망했을까? 주로 육체노동을 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직업적 특성상 가장 필요했던 두 가지 물품, 많은 중국 상인들에게 대박을 안겨주었던 그 물품, 그것은 바로 현실을 잊게 해주는 ‘아편’과 현실의 아픔을 낫게 해주는 ‘의약품’이었다. 19세기 싱가포르의 중국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아편 중독자들이었다. 아편을 피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싱가포르 아편 유통과 중독 만연 현상은 영국 식민 정부의 악랄함과 중국계 상인들의 야비함이 결합된 결과이기도 하다.

한편 의약품의 경우, 아무리 해외에 좋은 약품이 천지에 널려 있다고 해도 해외여행 갈 때 굳이 후시딘을 챙겨야 마음편한 우리처럼, 중국계 이주 노동자들에게도 역시 소위 ‘고膏’ 라고 분류되는 오랜 전통의 중의약품이야말로 가장 믿을만한 약품이었다. ‘고’ 라는 것은 각 종 통증에 바르는 연고를 말하는 것.

그 중 미얀마 출신의 화교 상인 형제인 Aw Boon Haw와 Aw Boon Par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객가(Hakka) 출신의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내려져 온 ‘고膏’ 만드는 기술을 더욱 완벽히 발전시켜 대량생산 하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 (그 제조 과정과 재료는 지금도 시크릿!) 1920년대 미얀마에서 이 ‘고’를 판매하여 대박을 친, 발음도 어려운 Aw 형제는 신 성장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싱가포르에 분점을 설치하는데, 요게 또 대박 난다. 동남아시아 뿐 아니라 홍콩 및 중국 내륙까지 유명해져 가히 상업 제국이라 불릴 만큼의 대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화교 출신 리치의 탄생이었다. 이 부러운 상인 형제의 이름을 객가 방언이 아닌 한자로 표기하면 바로 胡文虎, 胡文豹 형제이다. (즉 胡씨 형제) 요즘으로 치면 R&D에 투자하여 제품의 상용화에 성공한 이 ‘고’의 상표명은 장남인 호문호의 마지막 글자, 즉 虎를 따서 ‘타이거 밤 Tiger Balm’ 이라고 지었다. 지금까지도 싱가포르 기념품으로 가장 사랑받는 파스 및 ‘고’ 전문 브랜드.

  • 사佘씨 가문 Seah Clan


오차드 로드 다카시마야 쇼핑센터

싱가포르의 중국계 커뮤니티에서 복건 출신의 호키엔이 주류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지역 출신의 중국계 싱가포르 인들 중에 리치 피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앞서 말씀드린 호씨 형제 역시 객가, 즉 하카Hakka 출신으로 부를 축적한 인물들인 것이다.

시티홀City Hall, 선텍시티Suntec City, 비치 로드Beach Road 주변을 여행하다 보면 가끔 Seah st, Liang Seah st 따위의 이름을 가진 거리를 지나 다닐 수도 있다. 혹은 탄종파가Tanjong Pagar를 다니다가 Pek Seah st 라는 이름의 거리를 봤을 수도 있고. 이 지명들은 다 싱가포르의 유명한 부자 Seah 가문의 성과 이름들을 가지고 명명한 것이다. Seah 가문은 싱가포르 중국계 5대 출신 지역 중에 광동성 북단에 위치한 Teochew 지역, 우리말로 하면 조주 지역 출신이다. 요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싱가포르 Seah 가문의 개창자라고 할 만한 이는 Seah Eu Chin 이라는 인물이 있다. 우리말로 하면 사유진. 있을 有에 나아갈 進. 1805년생인데, 불과 열여덟 살이 되는 1823년에 싱가포르로 건너 가 갖은 고생을 거쳐 손꼽히는 거부가 된다.

그가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던 중요한 사업 아이템은 Gambier 라는 식물이었다고 한다. 말레이시아, 싱가폴, 인도네시아 등지에만 나는 식물로서 가죽의 광택 및 손질, 소위 무두질을 하는 데에 필수적으로 쓰이는 재료이자 약재로 쓰이기도 하던 잇 아이템이었는데, 사유진은 이 갬비어 라는 식물을 재배하는 대농장(학창시절 들어봤을 플랜테이션Plantation 농장)을 운영하면서 돈을 모았다고 한다. 그의 대농장이 얼마나 넓었냐면 지금의 리버 밸리 로드River Valley Rd에서 시작, 부킷 티마 로드Bukit Timah Rd를 거쳐 톰슨 로드Tomson Rd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실감이 안 나신다면, 클락키Clark Quay, 솜머셋Somerset, 오차드Orchard, 뉴튼Newton, 노비나Novena 등등 여행객들에게는 친숙한 싱가포르 중심가 지명들이 다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면 감이 잡힐 것. 그렇게 쌓은 자본을 바탕으로 무역업에 뛰어들어 돈을 더욱 더 벌게 되는데, 그의 금수저 아들들, Seah Liang Seah와 Seah Pek Seah 역시 무역업에 뛰어들어 한 손 보탰다고 한다. 이 삼부자의 이름들이 다 지명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재산을 축적하여 싱가포르의 유력 가문으로 도약한 Seah 가문은 돈 좀 있는 집안은 누구나 다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고 하는, 자선재단을 설립하게 된다. 의안공사 義安公司 라는 이름의 이 재단은 가문의 뿌리인 조주, 즉 TeoChew 지역의 옛 이름인 의안에서 그 명칭을 따 온 것이다. 자선 재단인 만큼, 동향 출신의 엘리트들을 양성하고, 장학금, 생활비 보조 등을 해주기도 하면서 그 지역문화를 잃지 말자는 취지에서 설립되었다. 1845년 설립. 이 의안공사의 조주TeoChew식 발음이 바로 니안 콩쓰NgeeAn Kongsi이다. 싱가포르 내에 이 ‘니안(혹은 의안)NgeeAn’ 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그 무엇이든 간에 이 재단 소유라고 봐도 무방할 것. 초중고대학, 중의학 센터, 문화 센터 등은 물론이고, 오차드 로드의 명물, 만리장성을 본 따 디자인하였다는 NgeeAn City(흔히 다카시마야 빌딩으로 알려진) 역시 이 재단, 즉 Seah 가문의 소유다. 니안 재단의 경영 사업 본부 사무실이 이 니안 시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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