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철 칼럼]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몫소리’

in vop •  6 years ago 

2018년 8월21일에서 22일로 넘어가는 새벽, 나는 광화문역 지하도에 앉아있다. 8월 21일은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금은 특별한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2012년 8월21일은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이 경찰과 10시간의 사투 끝에 광화문역 지하에 자리를 잡고 ‘낙인의 사슬 장애등급제’ ‘빈곤의 사슬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외치며 농성을 시작했던 날이다.

낙인의 사슬, 빈곤의 사슬

장애등급제는 장애인의 몸에 등급을 매기는 반인권적인 제도이다. 마치 고기에 도장을 찍듯 국가가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등급이라는 낙인을 씌운다. 장애등급제가 끼치는 해악은 심각하다.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소득보장이 절실하고, 혼자 일상을 모두 소화 할 수 없기에 활동보조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장애등급 기준이 맞지 않는다면 필요한 복지제도의 신청 자격조차 보장되지 않는다. 더불어 장애등급제는 장애인을 지역사회가 아닌 수용시설에 가두는 정책을 유지시키는 악조건이기도 하다. 현재 3만여 명이 넘는 장애인들이 자유와 권리를 빼앗긴 채 혹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채 수용시설에 갇혀 있다.

부양의무자 기준은, 국민이 가난에 처했을 때 국가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급여를 권리로서 보장해야 하는, 한국사회의 마지막안전망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선정기준이다. 실제부양여부와 상관없이 가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난한 사람을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대상에서 배제시킨다. 부양의무자기준은 빈곤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선언한 국가의 책임을 국가가 다시 가난한 사람의 가족에게 떠넘기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국가가 얼마나 관심 없고 의지 없는지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1,842일의 투쟁으로

2012년 8월21일 시작한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농성은 2017년 9월5일까지 계속됐다. 1,842일 중 단 하루, 한 순간도 허투루 있지 않았다. 고요할 때마저 격렬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자기준이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촌각을 다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농성기간 농성장에는 열여덟 분이 영정으로 농성장에 모셔졌다. 제도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농성장을 함께 지키며 투쟁했던 동지들도 있었다. 이외에도 장애와 가난을 이유로 한 사망소식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농성장을 거점으로 한 투쟁으로 문재인 대통령, 조기대선 당시 후보에게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탈시설을 공약화 해냈다. 그리고 2017년 8월25일, 박능후 보건복지부장관이 농성장을 방문하여 18명의 영정을 조문하고, 다시 한 번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그리고 장애인의 탈시설을 통한 지역사회의 완전한 통합을 선언하며, 농성중단을 전제로 한, 민관협의체 구성을 약속했다. 농성을 중단하고 1년이 지난 지금, 언론에서는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자기준이 폐지 됐다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2018년 8월21일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이 다시 광화문에 모여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3대 적폐,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자기준, 장애인수용시설 완전폐지를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진행했다. 농성을 중단한 이후 지난 1년 동안 매주 광화문역에서 선전전과 매월 청와대로 행진을 통해 요구를 알리는 한편, 복지부장관이 약속했던 민관협의체에서의 논의에도 참여했다. 결과는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었다. 정부는 협의체와의 논의도 없이 장애등급을 점수로 바꾸는 개정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의 복지제도를 보장하기 위한 예산확보 계획은 없었다. 주거급여에서 부양의무자기준이 10월 폐지될 예정에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생계급여와 의료급여에서의 폐지 계획은 없다.

법과 제도는 변화했지만 그 법과 제도를 이용하며 가장 밀접하게 살아가는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는 어떤 변화도 없다. 누군가는 여전히 등급이 아닌 점수로 이름 바뀐 낙인을 몸에 엎고 생활에 필수 복지제도를 보장받지 못하며 자유와 권리를 빼앗긴 채, 매 순간을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또 누군가는 내가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생계급여를 보장받지 못해 당장의 끼니를 걱정하고, 의료급여를 보장받지 못해 아픈 자신을 부여잡고 버티며 살아내고 있다. 당장 마주할 미래 삶에 대한 계획조차 포기할 것을, 국가가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법과 제도는 그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온전히 보장하기 위한 방향으로 수립되고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관련 법제도를 논의하는 정부와 소위 전문가들은 자신의 편협한 경험과 상상력을 넘어서지 못하면서도 법과 제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마저 터부시하며,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예산 반대편에 세워 저울질하는 기만을 보이고 있다. 2018년 8월21일 투쟁결의대회를 통해 우리는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3대 적폐,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자기준 그리고 장애인수용시설이 완전폐지될 때까지 여전히 여기에 있고 앞으로도 있겠다고, 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농성을 중단할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도 농성장에 방문하며 한 가지 약속을 했었다. 광화문역에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투쟁을 기억할 수 있는 기록물을 설치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투쟁결의대회 전, 우리가 직접 제작한 현판을 역사에 붙였다. 과정에서 서울교통공사 직원들, 보안관들과 다툼이 있었고 현판을 지키기 위해 나는 지금 광화문역 지하도에 앉아있다. 새벽시간 청소노동자들이 물청소를 한다. 거품 섞인 물을 바닥에 뿌리고 기계로 밀고 가니 찌든 때가 벗겨진다.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3대 적폐도 저 찌든 때처럼 하루빨리 없어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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