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권, 북퇴에게 밀리다
11월 21일 비무 첫째 날, 항저우 관중들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미디어 보도에 따르면 이날 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6만 여명에 달했다.
대회 <회간(汇刊)>에 실린 바에 따르면, 첫째 날 비무 신청자는 128명이었다. 대회는 11시에 개막할 예정이었지만, 당시에는 시간관념이 별로 없어서 11시가 되어도 나오지 않는 선수가 많았다. 대회는 비무 시간을 13시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공평함을 위해 대회는 특수한 방식으로 조를 짰다. 먼저 둥근 나무구슬에 비무자의 번호와 성명을 쓰고, 위원들의 감독 하에 나무구슬을 큰 놋쇠 통에 넣은 것이다. <회간(汇刊)>에 실린 사진을 보자면, 놋쇠 통에는 나무구슬보다 조금 더 큰 구멍이 가득 있었다. 나무구슬을 흔들어 나온 대로 비무 순서를 정했다.
13시가 되자 실제 출석자는 109명으로 4개조로 나뉘어졌다. 3개 조에 32명이었고, 네 번째 조는 13명이었다. 조가 다 짜지자 비무할 이들은 조 내에서 제비를 뽑아 상대를 정했다. 비무인원들은 모두 회색의 간편한 복장을 입고, 허리에는 붉은 요대를 감았다.
첫 번째 피리가 울리면 양측은 비무대 안 정해진 링 안에 선다. 두 번째 피리가 울리면 양측은 허리를 굽혀 예를 차린다. 세 번째 피리가 울리면 비무가 비로소 시작된다. 선수들이 비무할 때마다, 모두 2명의 감찰위원들이 홍백기를 들고 비무대 위에서 심판을 맡았다. 필요할 때와 경기를 끝낼 때를 위함이었다.
“진문이장(津门二张)”이라고도 칭해지는 톈진의 무술가 장홍쥔(张鸿骏)은 1980년대부터 국가무술 심판을 맡아왔다. 그가 기자에게 알려주길, 비무 중 심판의 역할은 매우 크기에 반드시 전문가여야 한다. “그래야 언제 멈추라 외칠지 알죠. 그렇지 않으면 인명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감찰위원회 명단에서 드러나듯, 감찰위원들은 비록 심판위원보다는 명성이 크지 않았지만, 모두 무림에서 명성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비무자들이 거리낌 없이 싸울 수 있도록, 국술유예대회 비무규정을 상당히 간단하게 만들었다. 눈 찌르기, 목 조르기, 태양혈 때리기, 낭심치기 외에, 다른 것은 조금도 거리낄 게 없었다. 제1차 국시와 마찬가지로 3판2선승제 방식을 택했는데, 단지 매 판마다 3분 제한이 있었을 뿐이었다.
시작할 때만해도 양측의 점수로 승부를 정하라는 규칙이 있었다. 첫째 날 경기를 해보니 의외로 무승부가 많이 나왔다.
저우웨이량(周伟良)은 기자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점수’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떤 선수는 점수를 많이 얻기 위해 더듬고 빠질 수 있었다. 그런 경기는 볼만하지 않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첫째 날 비무를 본 뒤 <상해보(上海报)>의 한 기자는 크게 실망했다. 그는 경기 장면을 두고 상상 중의 무림고수의 대결만큼 멋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개 뒤엉켜서 서로 마구 때렸다. 일반인이 서로 때리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더 우스운 것은 상대가 따귀를 때리면 자신도 따귀를 때리는 것으로, 입에 피범벅이 되어 때리는 소리가 끝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장 의료인원들은 오직 따귀 맞은 사람만 치료하기도 바빴다.
규칙이 불분명하다며 경기장에서 패배를 인정하길 거부하고 비무대에서 버티는 사람도 있어서, 잠시 온 곳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런 광경은 아마 모든 관객이 예상치 못한 바였다. <국술여유대회일간(国术游艺大会日刊)> 편집 판펑치(潘凤起)가 쓴 바에 따르면, 초기 어떻게 싸우는 장면을 보도해야할지 토론 할 때는 무협소설마냥 생생하게 주먹과 발차기가 오가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서 보고 난 뒤에는, 현실이 상상에서 상당히 거리가 멈을 발견했다. 대개 어떻게 된 일인지 잘 보이지 않은 채 경기가 끝나버리곤 했다. 결국 그들은 이긴 자와 진 자의 명단을 쓸 뿐이었다.
그렇다면 실제의 싸움장면은 정말로 관객의 기억처럼 보기 안 좋았을까? 무술가인 장홍쥔(张鸿骏)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싸우는 것은 정말 보기 안 좋습니다. 무술을 연습하여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모든 투로를 없애는 것이지요. 제가 그쪽이 무슨 권을 낼지 생각지 않고, 그쪽이 오면 제가 그냥 있는 거죠. 가장 좋은 기술은 본능적 반응이고, 가장 좋은 건 한 방에 적을 제압하는 것입니다. 한 방에 적을 제압하는 건 당연히 별로 볼 게 없죠.”
1980년대 절강성 무술가 링야오화(凌耀华)는 선배 스승이 남긴 필사본 노트를 바탕으로 <천고일회 —1929년 국술대경기(千古一会——1929年国术大竞技)>를 정리하여, 잡지 <무혼(武魂)>에 발표했다.
첫째 날 격투장면이 어째서 관객성이 없었는지 링야오화가 제시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날 비무는 두세 판의 북권 맞대결 외에, 모두 남북의 대결이었다. “남북격투의 차이가 너무 커서, 남권 수련자는 전부 북측에 패배했다. 남북권은 대결하면 대개 한 번에 승부가 나기에, 빠르면서도 깔끔하게 치러진다.”
이러한 해석에는 확실히 역사적 근거가 있다. 제 1차 국시와 절강성 국술여유대회 두 차례의 경합을 통해 남방무술계는 남북방 권술의 격차를 보았고, 때문에 일찍이 한 차례 큰 규모로 “북권남전(北拳南传, 북쪽의 권법을 남쪽에 전하다)” 활동이 있었다. 영화 <일대종사(一代宗师)>는 이 “북권남전(北拳南传)”을 배경으로 한다.
서호봉은 기자에게 말하길, 소위 “북권”이 가리키는 것은 북방에서 발원한 권종(拳种)이고, 당시 흥행한 북권은 주로 형의권, 팔괘장, 팔극권 등이었다. “남권”은 주로 남방에서 발원한 “홍권(洪拳)” 등이다. “영춘(咏春)”은 전형적인 남권이다.
저우웨이량이 기자에게 말하길, 비록 명나라 시기 사료에 “영춘인은 기격에 능하다”고 적혀있긴 하지만, 영춘(咏春)은 당시만 해도 매우 유명한 권종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폭발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모두 엽문이 가르친 한 문도, 이소룡 덕이다.
서호봉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남북권의 격차는 권종 본래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시세의 문제였다.
“청말에 주요 전쟁은 모두 북방에서 일어났다. 의화단이 노룡두 기차역을 습격한 그때, 형의권 종사 리춘이(李存义) 또한 끼여 있었다. 팔국 연합군이 베이징에 진격했을 때, 팔괘문은 대도로 외국인들 찍어 내렸다. 이에 비해 남방은 실전 기회가 많지 않았다. 어떤 권종이 직접 전쟁과 관계를 가지는지, 그리고 어떤 권종이 1~2 세대 간에 걸쳐 있는지에 따라 실전능력은 빠르게 올라갈 수 있다.”
늙은 권사, 젊은 학생에게 밀려
첫째 날 관객성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 심판위원회는 규칙을 재정비하여 타격으로 승부를 보기로 했다. 그런데 며칠 뒤 경기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났다. 유명한 노권사가 국술관 출신의 후배에게 꽃잎 떨어지듯 밀려난 것이다.
그 중에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중앙국술관 교습반 학생 자오얜하이(曹宴海)와 상하이 융안(永安)에 있는 셴스(先施) 공사 총표두 류가오셩(刘高升)의 경기였다.
<중앙국술관사(中央国术馆史)>에 따르면 류가오셩은 체격이 크고, 금종조와 철포삼을 익혀 그 아래 3000제자가 있었다. 별호는 “동두철비진강남(铜头铁臂镇江南)”(놋쇠머리 철 팔뚝 강남을 압도하도다)이였고, 저명한 상하이의 “삼유(三刘)” (류바촨(刘百川), 류샤오볜(刘小辫), 류가오셩(刘高升)) 중 한 명이었다. 대회전까지만 해도 류가오셩은 우승이 점쳐지는 선수 중 하나였다.
경기 전 그는 수십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상하이에서 시안현(西安县)까지 걸어가며, “이무회우(以武会友)”(무로써 친우를 모음)이라는 큰 깃발을 들고 경기를 이겨가며 위세를 떨쳤었다. 남경에 돌아온 이후에는 중앙국술관에서 시범을 보이며 굵은 대나무 장대를 손으로 두 동강 내곤 했다. 항저우 경기로 오며 그는 승리를 자신했었다. 상하이 기차역에서 출발할 때, 제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폭죽을 터트렸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득의만만하여 두 빈 상자를 상금 포장용으로 들고 갔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많은 선수가 류가오셩을 상대하길 꺼려하여 기권했다고도 한다.
시합 둘째 날, 첫 번째 경기는 자오얜하이와 류가오셩의 대결이었다. 자오얜하이는 무술대사 “곽연자(郭燕子)”(곽 제비) 궈장셩(郭长生)의 제자였다. <중앙국술관사>에 따르면 경기 전 궈장셩은 제자더러 시의적절한 대책을 알려주었다. “류가오셩은 경공(硬功)이 있지만, 그 기운이 필히 뻣뻣하고 둔하니 결코 너처럼 빠르지 않다. 빠름(快)으로 승부를 보라.”
경기가 시작되자 자오얜하이는 “격보구자(激步钩子, 발로 갈고리를 걸다)”를 사용하여 가오셩승을 땅바닥에 쓰러트리려 했지만, 그가 류가오셩의 타리를 차자 오히려 자신의 다리가 저려왔다. 두 번째 라운드에서 류가오셩은 자오의 오른 다리를 잡고 땅바닥에 거꾸러트리려 했지만, 자오는 오른다리로 류의 오른쪽 종아리를 바깥쪽으로 떼어나고는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자오에 의해 류가오셩은 바닥에 내던져졌다. 경기장이 자오옌하이에게 갈채를 보낼 때, 류가오셩은 크게 외쳤다. “말도 안 돼!”
리징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류가오셩에게 물었다. “어째서 말도 안 되오?” 류가오셩은 대답했다. “이건 넘어진 것이지, 쓰러트린 게 아니오.”
몇 분 쉬고 난뒤, 세 번째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자오옌하이는 류가오셩은 감싼 채 몇 바퀴 돌더니, 한 번 몸을 틀고 류가오셩을 두 장 밖으로 내동댕이 쳤다. 자오얜하이가 물었다. “류 노사, 이번은 어떻습니까?”
3판2선승제인지라, 류가오셩은 패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둘의 경기에 대해서는 글마다 그 내용이 다소 다르지만, 대략적인 줄거리는 비슷하다.
그런데 어떤 글에 따르면 당시 <당대일보(当代日报)>와 <대공보(大公报)>는 <자오얜하이가 류가오셩을 때린 철문, 안에는 아무 것도 없어>라는 제목으로 경기에 대해 보도했다고 한다. 허나 기자가 도서관에서 본 바로는 1929년의 <당대일보>는 존재하지 않았다. 반대로 항저우 지역에는 1949년 6월 창간된 <당대일보>만이 있었다. 게다가 절강성 국술유예대회 기간의 <대공보>에는 그런 글이 개제된 적이 없었다. 이 경기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어쩌면 영원히 수수깨끼로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회간(汇刊)>에 따르면 자오얜하이가 류가오셩을 이긴 것은 확실하다. 노사부가 어째서 후배를 이기지 못하였는지, 장홍쥔의 해설은 이렇다. “노사부의 경공(硬功)이 강할 수는 있어도 실전경험이 부족했습니다. 돌이나 벽돌을 쪼갠다고해서 때리는 것도 잘하는 건 아니죠.”
장홍쥔의 사부는 자오다오신(赵道新)은 당시 국술유예대회에 참가했었다. 자오다오신은 일찍이 장홍쥔에게 말하기를, 한 명성 있는 권사가 한참 후배에게 맞아 졌었다고 했다. 둘째 날 그들은 연달아 그 권사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권사는 “하(嘿)”하는 소리를 내며 책상을 쳤다. 책상 귀퉁이가 한 번에 부러졌다. “사람을 때리는 건 물건을 부수는 게 아냐. 자네가 여자 동지를 때린다 쳐도, 그녀가 거기 서서 자네 때리는 걸 기다리겠나?”
<천고일회(千古一会)>에는 우스운 경기장면 하나가 적혀있다. 경기 3일차, 강서성의 노승이 두 명의 제자와 함께 참관을 왔다. “둘째 제자는 몸이 근질거려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 했다. 노승은 둘째 제자가 대단찮음을 알았기에, 곧 스스로 몸을 앞으로 내밀어 한 번 다퉈보기를 요구했다.” 과연 노승과 선수 후펑샨(胡凤山)과 손속을 겨루었고, 후펑샨이 바로 노승의 머리를 쳤다. 노승은 두개골이 함몰되어 피를 흘리며 구급차에 실려 나갔다.
그러나 이렇게 괄괄한 장면은 당시 신문이나 <회간>에 나오지 않는다. <회간>에 따르면 대회에는 출가인 단 한 명만이 참가를 했다. 그러나 그 출가인은 실력이 그렇게 출중하지 않아 2회전에서 탈락했다.
우승자 셋은 모두 하북성 사람
26, 27일 이틀간 대회는 최종 결전을 진행했다. 연달은 비무 끝에 26명의 선수가 마지막 결전에 들었다. 결전에 앞서 대회 조직에서는 항저우 주요도로에 <오늘 오전 10시 결승전 확정>이란 공고를 붙여두었다. 결승전은 그날 6만여 관중을 모았다.
12시 이후 비무 인원들은 “국술(国术)” 두 글자 붉게 세져진 하얀 반팔 셔츠를 입고 경기장에 나왔다. 치우징얜(邱景炎)과 가오쇼우우(高守武)의 기권 탓에, 결승전 진출자는 12쌍으로 나눠졌다.
일설에 따르면 대회진행 동안 몰래 담합이 진행되었다는 의혹도 있다. 그에 따르면 누군가가 우승 유력자로 이야기되던 자오얜하이에게 우승을 장뎬핑(章殿卿) 쪽으로 양보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장뎬핑(章殿卿)은 리징린의 옛 부하이자, 당시 마침 리징린의 딸과 연애 중이었다. 그래서 “리징린 노사의 체면을 살려주길 바란다.”고 했다는 것이다.
<회간>에는 당연히 이런 야사를 담을 수 없는 법. 하지만 이날 기록된 대결장변을 보자면, 자오옌하이는 확실히 이전의 용맹함이 없었다. 그는 장뎬핑과 마주치자 두 번이나 스스로 물러났으며, 한 번 부딪치고는 쓰러졌다.
기자가 확인하길, 경기인원 명단에는 확실히 국술기관이나 정부에서 온 이가 많았다. 게다가 장뎬핑은 리징린이 사사로이 보증하여 추천했던 이라, 두 사람의 관계는 분명 일반적이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장뎬핑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그렇게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항간에서 전하기를, 중앙국술관 출신 선수들이 상위권을 독점하기 위해, 비무 중에도 동문끼리 서로 고의로 져준 정황도 있었다. <천고일회>에 따르면 리징린은 후펑샨(胡凤山)을 만나 용맹을 떨쳤는데, 마청지(马承智), 가오줘린(高作霖), 리칭총(李庆从) 등이 그에게 다쳤다. 왕즈칭(王子庆), 주궈루(朱国禄), 장뎬핑(章殿卿) 등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리징린이 일찍이 후펑샨에게 말하길, “펑샨, 내일은 네가 1등한 셈 치거라. 때릴 필요 없다. 상위 여섯명이면 족하다.”
후펑샨이 말했다. “안 때리는 게 어찌 가능하겠습니다. 1등한 셈 치는 건 망신스럽죠. 1등은 5000원인데, 저는 서호변에 노사를 위해 양옥을 짓고 그로 하여금 노후를 보내게 해야 합니다.”
지나친 자신감 때문인지, 다음날 후펑샨은 주루궈와 왕즈칭에게 패배하여 5위에 그쳤다. 그 글에서 해석하기로, 비록 후펑샨 또한 중앙국술관 교수반의 학생이었지만, “사승관계가 얽혀있어 계파가 달라 천양지차에 상호보수적이었다.” 무림에서는 각 계파 및 인물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당시 외부인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변하니, 지금 사람으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한 가지 설로서, 우선 말하는대로 한 번 들어둘 법하다.
무대 아래서 얼마나 답합을 했던지 간에, 결승전은 여전히 매우 훌륭했다. <회간>에 쓰인 바에 따르면, 장뎬핑과 주궈루는 모두 체구가 우람하여 서로 힘이 필적하니, 서로 맞붙자마자 실로 용호상박이라 할만했다. 이후 장뎬핑은 한 쪽 다리를 주궈루에게 감기니, 장뎬핑이 땅에 떨어질 뻔 했지만 이내 한 다리로 수분을 버티다 겨우 넘어졌다.
장뎬핑과 왕즈칭의 경기에서는 왕즈칭 쪽이 얼굴에 상처를 입었고, 장뎬핑은 다리에 상처를 입혔다. 두 사람이 마주치면 상처가 더해질까 싶어, 장뎬핑은 왕즈칭에게 인사하고는 그에게 1등을 넘겼다.
왕즈칭, 주루궈, 장뎬핑은 절강성 국술여유대회에서 상위 3명에 들었다. 1등은 장즈칭으로 5000원의 상을, 2등은 주루궈로 상금 1500원을, 3등은 장뎬핑으로 상금 1000원을 탔다. 셋은 인품이 좋고 절개가 있어, 경기장에서 바로 결전에 오른 26명의 선수에게 나누어주었다. 며칠 후 <대공보(大公报)>는 “상위 세 명의 우승자 모두 하북성 사람”이라고 대회의 결과를 보도했다.
최후의 전성기
절강성 국술유예대회가 훌륭하게 막을 내렸다. 해당 대회를 통해 국술을 널리 퍼트리고 민중이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해당 대회는 강남 인사들로 하여금 북권(北拳)의 위력을 알게 해주었다. 이후 손록당(孙禄堂) 등 무술명가가 강남으로 와 무술관을 세우고 제자를 가르치니, 전체 남중국무술의 발전이 전개되었다.
영화 <일대종사(一代宗师)>에서 이야기되는 “오호하강남(五虎下江南, 다섯 호랑이가 강남으로 내려오다)” 또한 이번 무림대회와 불가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절강성 국술유예대회에서 몇 명의 중앙국술관 출신 선수들이 상위권을 휩쓸어 중앙국술관의 명성이 크게 높아졌다. 이에 힘입어 중앙국술관에서는 적지 않은 보통민중 및 학생 훈련반이 개설되었다.
1930년대는 중앙국술관의 교관과 지도원들이 기관과 학교를 나눠 적지 않은 무술교습소를 세웠다. 1932년 8월 장지쟝의 노력으로, 중앙국술관은 여자 교수반을 추가로 개설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거하면, 항전직전까지 중앙국술관의 각 무술학교(훈련반)에서 배양한 학생은 약 3~400명이었다.
1936년 6월 장지쟝은 9명의 엄선된 선수를 데리고 “중화민국체육대표단”이라는 시험팀이라는 이름으로 독일 함부르크에 가 제 11회 올림픽에 참가했다. 당시 유럽인은 일본유도는 알았으나 중국무술은 몰랐다. 하얀색 비단 훈련복을 입은 중국 국술대 대원들이 강유상제(刚柔相济)의 태극권 시범을 보이자, 전 경기장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후, 진스셩(金石生)의 소림권, 류위화(刘玉华)와 코우윈싱(寇运兴)의 단도(单刀) 대련 시범, 푸슈윈(傅淑云), 류위화의 권법 대련시범, 정화이셴(郑怀贤)의 비차 곡예(飞叉) …… 독일관중은 눈이 휘둥그레져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당 올림픽에서 중국체육 대표단은 수상을 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결승전에 들지도 못했다. 다만 탁월한 중국무술 시범은 다행히 중국체육계가 체면을 차릴 수 있도록 했다. 올림픽이 끝나고 중화국술대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 여러 도시를 돌며 순회공연을 했다.
그해 중국무술은 세계에서 전대미문의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무술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항일전쟁이 터져 그 발걸음을 흐트러트렸다. 중앙국술관이 사천으로 옮겨가면서 그 가르치고 배움이 쇠퇴하였다. 수많은 국술관 학생들은 전선으로 달려나갔고 피를 흘리며 싸웠다. 중국무술 마지막 전성기는 거기서 멈추었다. 그때의 사람 황홀케 하던 무림인사들은 사람의 마음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