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의 불초한 서생> 제 1장 요약 (下) -작가의 삶-

in wuxia •  4 years ago 

<평강의 불초한 서생> 제 1장 요약 (下)
-작가의 삶-

1924년 󰡔근대협의영웅전󰡕은 󰡔탐정세계󰡕가 발간 중지됨에 따라 함께 중단되었다. 허나 󰡔강호기협전󰡕은 계속되었고, 󰡔유동신사󰡕를 이은 󰡔옥결금환록(玉玦金環錄)󰡕도 󰡔신원보󰡕에서 이어졌다. 이 와중에 대략 20여편의 단편이 󰡔홍잡지󰡕와 그 후신인 󰡔홍매괴󰡕에서 연재되었다.

1925년에는 오직 8편의 단편만이 나왔지만, 장편소설 󰡔회두시안󰡕이 󰡔신상해(新上海)󰡕에서 새로 연재되었다. 또한 계속 연재중인 󰡔강호기협전󰡕의 후속작으로 󰡔강호소협전(江湖小俠傳)󰡕이 세계서국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1926년에는 연재가 부쩍 줄어들었다. 샹카이란은 딱 4~5편의 단편소설만 썼다. 󰡔회두시안󰡕은 8챕터에서 중단되었고, 1926년 12월에야 15 회 분량이 추가되었다. 1927년 󰡔신상해󰡕의 편집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불초생께서 호남으로 돌아가셔서, 󰡔회두시안󰡕은 1~2회 정도 쉬게 되겠습니다.”
허나 글이 더 나오는 일은 없었으며, 이에 대해 잡지에서 해설한 일도 없다.

샹카이란의 중요 작품인 󰡔강호기협전󰡕은 1926년 7월 86챕터였으며, 2개의 주된 플롯을 질질 끌어 10 챕터 정도 확장한 상태였다. 헌데 나래이터가 돌연 열린 여지가 있긴 하지만, 그 끝을 선언해버렸다.

편집자는 「편집여담(編餘瑣話)」에서, 불초생의 작품은 곧 󰡔근대협의영웅전󰡕과 함께 재연재될 것이라 밝혔었다. 1927년 1월에는 󰡔강호기협전󰡕이 재연재 되었으나, 4번의 연재 만에 다시 중단되어, 챕터 88로 끝났다. 잡지가 세 번 발매되고서야 (대략 1달 반 뒤이다.) 음력설에 편집자가 양해를 구하며 곧 다시 연재될 것이라 해명했다.

작가가 호남성에서 관료직을 얻어 “현재로서는 쓸 시간이 없지만” “우리 독자들에게 약속할 수 는 있다.” “그가 일을 어느 정도 정리하는 대로, 곧장 속편을 우리에게 보내주기로 하였다.”

달포가 지난 후 편집자는 연재 재개를 알렸고, 곧 󰡔강호기협전󰡕은 89챕터부터 재연재되어 1928년 12월 106챕터까지 연재되었다. (󰡔홍매괴󰡕 4기, 34권) 다만 106 챕터 이후에는 돌연 다시 중단되었다.

이상 󰡔강호기협전󰡕에 관한 부분은 본서의 3챕터에서 다루겠지만, 󰡔강호기협전󰡕의 후반부는 샹카이란이 아니라, 󰡔홍매괴󰡕의 편집자 자오탸오쾅(趙苕狂, 1893~1953)에 의해 쓰였다고 보여 진다. 당시 샹카이란은 상하이를 떠나 작가 일을 포기하고 군의 관원 직책을 맡았기 때문이다. 다만 87, 88 회를 보면 다소 간 글을 더 쓸 생각은 있어 보였다. –혹은 편집자의 간청에 응답하려 했던 것 같긴 하다-

샹카이란의 여정은 수많은 정치적 격랑에 걸쳐 있었다. (1926년) 장개석은 군벌들을 치기 위해 북벌을 단행했다. 이때 호남은 광동에서 우한으로 가기 위한 중요 교두보였다. 호남의 장군은 당셩즈(唐生智, 1889~1970)는 1926년 봄 국민혁명군에 가담해 그해 7월 장샤를 점령했다. 샹카이란의 조상들이 지내던 평강 또한 8월 경에는 국민혁명군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1926년 12월, 국민혁명군은 7개 성을 장악했다.

1927년 초 장개석과 다른 국민당 수뇌부와 작전적,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일으켰다. (4.12 쿠데타 및 영한분열) 이때 탕셩즈가 자리 잡은 우한 국민정부는 장개석의 난징국민정부와 대립했다.

당시 국민당의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노동 연합과 농민 조합을 만들고 있었는데, 호남성은 그 중심지였고, 장샤는 마오쩌둥이 1927년 3월 지적한 폭력 혁명의 핵심지였다. (󰡔호남 농민운동 고찰보고(湖南農民運動考察報告)󰡕)

이런 상황에서 1927년 3월, 샹카이란이 상하이를 떠나 호남성으로 간 것이었다. 샹카이란은 탕셩즈의 36군단 5사단 간부의 비서 일을 맡았다. 사단장은 랴오레이(廖磊, 1890~1939)였고, 군단장은 리우싱(劉興, 1887~1963)이었다. 이때 샹카이란의 동기나 목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다.

샹카이란은 36연대를 따라 우한 북쪽의 샤오간(孝感)에 배치되었다. 장개석의 군대는 1927년 3월 난징을 탈취하고 4월에는 상하이를 탈취했으며, 4.12 쿠데타로 대량의 공산주의자를 살해했다. 5월 (장개석의) 난징 군대는 안휘성과 강서성으로 진출했고, 탕셩즈 휘하의 우한 군대는 하남으로 진출했다.

탕셩즈가 이끄는 35군단은 장샤 수비군으로, 지방의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27년 8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난창 봉기와 그 이하의 몇몇 봉기들은 실패로 끝났다.

27년 8월 말, 군벌 손전방(孫傳芳, 1885~1956)이 이끄는 군대가 난징의 국민당(장개석)을 공격할 때, 탕셩즈는 손전방에 호응할 작정으로 안휘성에 36군단을 포함하여 군을 일부 보냈다. 손전방이 패배하자, 탕졍즈도 같이 몰락했다. 탕셩즈 휘하에 있던 패잔병들은 바이총시(白崇禧, 1893~1966)가 이끄는 제 4군에 편입되어, 1928년 5월 베이징을 향한 마지막 공격에 투입되었다.

이후 샹카이란은 36군단을 따라 호북에서 안휘로 갔다가 호남성으로 돌아왔다. 1928년 가을, 이제는 군단장이 된 랴오레이(廖磊)를 따라, 그는 톈진 근처에 있는 탕산(唐山)의 카이핑(開平)에 주둔하게 되었다. 국민당의 톈진 행정에 도움을 준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랴오레이가 베이핑(현 베이징)으로 옮겨 감에 되게 따라, 그를 따라 베이핑에 가기도 했다.

허나 1929년 초 어떤 시점에서, 그는 군대 일을 사직하였다. 이후 장개석과 그의 군벌들은 1929년 3월부터 다시 싸워대기 시작했다.

1929년 3월 말, 상하이 매체에서 샹카이란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기사는 1929년 3월 24일, 󰡔상해화보(上海畫報)󰡕 등에 등장한다. 4월 초 바오톈샤오는 그 소문이 확실치 않음을 알렸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아니라는 증거를 대지도 못했다. 장밍페이는 같은 해 7월, 샹카이란이 톈진에 살아있다고 주장했으며, 8월에는 󰡔북양화보(北洋畫報)󰡕에 샹카이란의 편지와 근래 사진이 실렸다.

허나 일단 불붙은 논쟁은, 작가가 정말 작품을 썼는지 등으로 퍼져나갔다. 1928년 말에 이루어진 󰡔강호기협전󰡕의 후반 연재와, 󰡔랴오닝신보(遼寧新報)󰡕의 󰡔신검협전(新劍俠傳)󰡕이 대상이었다. 1929년 8월 말, 샹카이란은 󰡔강호기협전󰡕의 대필 부분과 미래 계획에 대해 상하이 편집진과 논의한 것으로 보여진다. 세계서국의 셩팡즈는 대리인을 북쪽으로 보냈었다.

1929년 12월 샹카이란은 부친의 병환 때문에 호남으로 돌아왔고, 1930년 4~5월 경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작가로서의 경력을 이어나갔다. 그는 󰡔근대협의영웅전󰡕을 완결 짓고 1932년 3월 세계서국에서 단행본을 출판했지만, 󰡔강호기협전󰡕을 더 이상 쓰지는 않았다. 그 외에 따로 보이는 글은 1930년 󰡔신문보(新聞報)󰡕에 태극권 관련으로 쓴 시리즈물 하나 정도이다.

1932년 어느 시점 샹카이란은 장샤로 돌아와 호남국술훈련소(湖南國術訓鍊所)에서 일했다. 이후 일본이 침략해 오기 전까지 5년 동안, 그는 무술 진흥에 힘썼으며, 몇몇 관련 저작 또한 내었다.

중일전쟁이 터진 후, 1937년 7월 샹카이란 및 관련 무술단체는 애국운동을 진행했다. 몇몇 문헌에서는 일본이 1938년 호남을 치자, 샹카이란이 민병대를 이끌었다고 서술하곤 했다. 1938년 말 그는 옛 상관 랴오레이의 군대에 합류하여, 리황(立煌)의 안휘성을 지키는 참모부에서 일했다. 당시 그는 세 번째 결혼을 했는데, 국술학교의 20살 어린 학생이었다. 랴오레이는 뇌졸중으로 1939년 10월 사망했다.

샹카이란은 리황에 남아, 안휘학원(安徽學院)에서 중국고전문학을 가르쳤다. 1944년에는 용산사 재건의 감독을 지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곧 이어 국공내전이 벌어졌을 때, 샹 카이란은 국민당 편에 있었다. 벙부(蚌埠)에 있는 샤웨이(夏威)의 군단 밑이었다. 허나 1947년 9월 리황의 국민당군은 인민해방군에게 포위당했고, 샹카이란은 구금당했다.

한 장교가 샹카이란을 취조한 후, 근래 설립된 흑룡강성의 쟈무스학교(佳木斯學校)로 갈 것을 제의했으나, 샹카이란은 거부했다. 다만 샹카이란은 풀려났고, 그와 가족은 안전통행증을 받았다.

샹카이란은 벙부에 자리 잡았다가, 난징과 한커우를 거쳐 호남으로 돌아갔다. 1949년 창샤 지방정부는 공산군을 맞아들였다. 샹카이란은 글쓰기를 개시했지만 독자가 많지는 않았다. 󰡔혁명야사(革命野史)󰡕는 1950년 출판되었으나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54년 이래 샹카이란은 지방정부의 문사관(文史館, 자료실)에서 일했다. 당시 샹카이란은 스포츠 및 체육 문화 위원회의 수장직을 수여 받았다. 허롱(賀龍, 1896~1969)이 수여한 것으로, 그는 일찍이 칼 휘두르던 도적으로, 샹카이란 자신의 소설이 묘사하던 공간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였다. 허롱은 샹카이란으로 하여금 중국무술에 대한 책을 쓰도록 독려했다.

샹카이란의 마지막 작품은 󰡔봉황이 태양을 알현하다(丹凤朝凤)󰡕로, 1957년 문예지 󰡔신묘(新苗)󰡕에 연재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봉황은 태양의 생일을 축하하며 수행단으로 까치(喜鹊)를 데려온다. 까치는 반복되면서도 조화롭게 즐거이 짹짹거렸다. 태양은 “온갖 새가 함께 울기를(百鸟齐呜)” 희망한다고 했다. 허나 까치는 까마귀를 비관주의자라, 자고새를 상습법이라 소리친다. 앵무새(白话鸟, 허튼소리 새)는 까치를 다라 울지만, 그들 자신의 소리를 내자하자 침묵에 빠져 버린다.

이야기의 내용은 1956~57년의 백화제방(百花齊放)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보인다. 특히 저자 자신의 글쓰기가 새로운 사회와 이데올로기적 체제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측면이 상당 부분 드러난다.

이야기의 출판자들이 반-우파 운동에서 백화제방 운동이 일어났을 때, 샹카이란을 받쳐주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샹카이란은 “우파 분자”로 낙인 찍혀 있었고, 곧 뇌졸중으로 죽었다. 1957년 12월 27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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