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로군 항일대도대와 남소림무술
피눈물로 쓰인 항전사에 있어, 본국 국술의 가치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중화무술의 효용을 드러낸 사적은, 당연히 항일대도대에 관한 것이다. 걔 중에서는 특히 19로군 항일대도대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들의 칼날은 적으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하게 하였으니, 그에 대해 웅장한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여기서 항일대도대에서 훈련을 하는 무술인들 중 일부는 남소림 무술과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하면 먼 “친연관계”를 가지고 있다.
2-1. 복건 남소림무술가와 19로군 항일대도대
복건성은 남소림 무술의 고향으로, 근대시기 남소림 무술인재가 여럿 배출되었다. 이 중 19로군항일대도대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이는 당시 남소림 오조권(五祖拳)의 전수자인 루옌치우(卢言秋)이다.
루옌치우(1875~1945)는 취안저우(泉州)의 유명한 무술가로, 무술과 의술에 정통했다. 사료에 따르면 선생은 대략 14세 때 저명한 권사 좡단(庄胆)을 스승으로 삼아 여러 해 무술을 수련했다. 불행이도 스승이 일찍 죽자, 다시 오조권의 명사 “방마하(邦马河)” 차이위밍 문하에 들어가 그 문하생 좡잔(庄詹)에게 무술을 배우고, 스승의 훈도를 받들어, 오조권을 전수 받았다.[ 9]
당시 제자 루옌치우는 마닐라에 광한, 광무, 광휘라는 국술관을 세웠다. 루옌치우 선생은 오조권사 차이위밍 일파로서 소림 오조권을 제대로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조문연구(五祖门研究)>의 기록에 의하면, 취안저우에 주둔했던 제9사단에서 루옌치우의 명성을 듣고 총교련 겸 군의로 초빙하여 19로군의 권술교련과 대도대의 고문 및 군의를 맡겼다고 한다.[ 9]
루옌치우는 19로군의 권술교련을 맡았다. 19로군 항일대도대도 19로군의 일부이니, 남소림무술의 전인 루옌치우가 19로군 군사들에게 전수한 남소림오조권이 자연히 19로군 항일대도대의 중요한 훈련 무술임을 알 수 있다.
남소림 오조권은 19로군 항일대도대가 칼의 위력을 발휘해 적을 공격케하는 “예리한 무기(利器)”가 되었고, 19로군 항일대도대의 중요한 기술이 되었다. 그 외에 루옌치우는 군사들에게 남소림 오조권을 전수했을 뿐만 아니라, 고명한 의술로 19로군 항일대도대 전선에서 든든한 후방지원을 제공했다.
2-2. 광동 남소림 무술가와 19로군 항일대도대
광동은 예로부터 수많은 무술인재가 있던 곳으로, 근현대가 되어서는 더더욱 청출어람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술이란 기술과 그 정신을 국가를 지키는 데 사용했다는 점이다.
근대항일투쟁에 있어 19로군 항일대도대의 도법은 광동의 무예가 황샤오샤(黄啸侠) 사부가 창시한 것이다.
첫째, 항일의 기운이 막 흥성하고 국가가 위기에 처한 그때, 황 사부는 의분에 차서 일찍이 직접 펜을 들어 <항일대도법(抗日大刀法)>을 썼다. 광저우 항일대도대를 조직하였으며, 국민체육회의 명의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를 위해 무술을 배우도록 장려하였다.[ 11]
둘째, “9.18 사변” 직후, 황샤오샤는 항일구국의 웅지를 품고 자신의 뛰어난 무예와 쑨위펑(孙玉峰) 권사에게서 얻은 나한문 대도법의 기술을 통해, “항일대도법”을 창안하고 적극적으로 광동성 국술협회와 같이 대도법(大刀法) 훈련반을 창설하였다. 황샤오샤는 직접 훈련위원회 위원을 맡아, 직접 대도법을 전수하였다.
해당 도법은 일본군과의 근접전과 야전 중에 큰 효과를 발휘했다. 상하이 전투에서 19로군은 30일 동안 분투하였고, 대도대는 용기백배하여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때 사용한 것이 바로 황샤오샤 사부가 만든 “항일대도법”이다.[ 12] 연구에 따르면 황샤오샤와 남소림 무술 역시 서로 불가분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황샤오샤(1900~1981). 따로 쥐톈(钜添)이라고도 부른다. 광동 판위구 스치진(石其镇)의 롄탕촌(莲塘村) 사람으로 저명한 무술가이다.
<광동무술사(广东武术史)>에 따르면, 천샹(陈享)은 제자가 많아, 그야말로 문하생이 천하에 가득하다 할만했다. 그 중 기격 방면이 탁월하여, 장옌, 롱즈차이, 천셩, 황샤오샤 등이 있었다.[ 11]
<황샤오샤 사부를 애도하며(哀悼黄啸侠老师)>의 한 글에 따르면; 황샤오샤는 어릴 적부터 무술 익히기를 좋아하여, 그가 모신 선생만 족히 십수 명은 되었다. 그 중 유명한 이로는 채리불의 리언(李恩), 천관보(陈官伯), 정무체육회의 자오롄화(赵连和), 천티에셩(陈铁笙) 등, 그리고 나한권의 쑨위펑이 있다.[ 13]
이 두 건의 자료에서 알 수 있듯 황샤오샤는 채리불권의 전인이다. 상술한 진일보한 연구에 따르면 채리불권은 남소림 무술 유파이기에, 황샤오샤 사부가 익힌 무술 중에도 남소림 무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황샤오샤 사부 탄생 100주년 기념집(黄啸侠师傅诞生100周年纪念专辑)>과 <판위현 인물지(番禺县人物志)> 두 서적에 따르면, 황샤오샤는 나한문의 전인 쑨위펑의 처소에서 나한문의 무술과 그 도법을 배웠으며, 자신이 배웠던 무술을 기초로 19로군 항일대도대가 쓸 “항일대도법”을 창안하였다.
이상 서술한 자료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2009년 10월 6일 프로젝트 팀은 황샤오샤 무술의 전인 겸 황샤오샤 권회의 책임자와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은 귀중한 자료를 얻어낼 수 있었다.
첫째, 황샤오샤 사부는 채리불권의 제3대 전인에게 채리불 권법을 7~8년 배웠으며, 이후 북방권사 쑨위펑을 따라 나한문 무술과 도법을 수년 배웠다.
둘째, 황샤오샤 사부가 만든 “항일대도법”은 그가 공부한 채리불권의 기초에 나한문 도법의 실용적인 기술을 합쳐 창안한 것이다. 해당 도법은 19로군 항일대도대에 의해 상하이항전 당시 사용되어, 도법의 위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중국무술사략(中国武术史略)>에 의하면 쑨위펑(孙玉峰)은 하북성 경현(景县) 사람으로, 원통선사(元通禅师)로부터 북파 소림의 나한권을 배웠다.[ 14]
이 점은 쑨위펑이 배운 나한문 무술이 북파 소림 나한문 무술에서 나왔음을 이야기하며, 그렇기에 황샤오샤 사부가 쑨위펑으로부터 나한문 도법을 배운, 북파소림(북소림, 현재의 하남 숭산 소림)문하 임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남소림 나한문과 북소림 나한문은 무슨 관계인가?
<남소림 나한문 해설(南少林罗汉门阐秘)>의 한 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남소림 나한문은 숭산 소림사의 철주스님(铁珠僧人)이 복건성으로 도망할 때에, 소림 나한문을 복건 등지에 전한 것이다. 옛날에는 주로 불가제자에게 전파하였고, 후대 스님들의 개선 빛 발전을 거치고, 또한 남방 사람의 생활습관을 특징으로 하여, 남방의 고유한 권파 중 하나로 변화된 것이다.[ 15] 이는 또한 남소림 나한문과 북소림 나한문의 관계가 극히 밀접함을 설명해주고 있다.
게다가 <남소림연구(南少林研究)>의 제 4장 “남, 북소림무술비교”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복건 소림 나한권은 혜명법사(惠明法师)가 한 계통의 원류에서 숭산 소림사 혜명법사의 모남파 소림 기법에 닿았다.
청나라 초기에 일찍이 복건 구톈(古田)으로 남하하여 3년을 정진하니, 후에 북상하여 무예로 친우를 사귀며 백가의 기예를 모았다. 이로 나한권을 보강하며 여러 승려에게 가르쳤으니, 이 사실은 당시 남소림 무술의 탁월한 기예가 이미 무술계에 널리 인정받고 있었음을 설명해준다. 남, 북 소림사 무술 간의 상호교류작용이 더욱 강화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남북소림나한권 무술이 모두 소림파 무술에 속함을 알려주며, 서로 섞여 극히 깊은 연원관계가 있음을 말해준다. 이에 근거하여 19로군 항일대도법과 남소림 무술 간의 관계가 밀접함을 알 수 있으며, 남소림 무술이 승화된 어떤 정수임을 알 수 있다.
종합적으로 분석해볼 때, 무술가 황샤오샤는 남소림 무술을 익힌 것을 바탕으로 ‘항일대도법’을 창안하였으며, 이를 사용하여 19로군 항일대도대를 훈련시켰다. 이로 인해 19로군 항일대도대는 상하이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헌을 세웠으며, 동시에 국민의 항전정신을 드높였다.
군에서 무술을 가르치고 항전을 실천하는 데 쓴 것은, 남소림무술이 널리 퍼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남소림무술의 기격이 가지는 가치를 검증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남소림 상무애국정신을 이어받았다.
- 항일투쟁에서의 남소림무술정신
정신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영원할 수 있다. 중국의 인족정신은 유구하면서도 풍부하기 그지없으니, 천백 년 동안 중화민족은 수차례 외부 민족의 침입을 받았음에도 화하문명은 끊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민족정신에 더 크게 공헌하였다. 무술은 중화민족 문화의 대표로, 민족정신의 운반체이다. 역사적인 시기에 따라 들어있는 내용과 그 표현 형식이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1]
근대 명인은 민족정신의 핵심(즉 상무정신)을 깊이 파들어 내려갔다. 량치차오(梁启超)는 <상무론(论尚武)>에서 상무정신의 깊은 뜻을 깊이 파들어 갔다. 이 글은 고금의 여러 나라(게르만, 스파르타, 독일, 러시아, 일본 등의 국가)의 강성한 핵심적인 힘을 나열하며, 상무정신이 민족생존의 중요한 요소임을 적극적으로 긍정하였다.
그가 이르기를: “이 여러 나라의 문화가 가진 얕고 깊음은 같지 않고, 그 민족의 많고 적음도 다르며, 그 국토의 넓고 좁음 또한 일치하지 않는다. 중원을 내달리고 지구에 우뚝 설 자 중 이 상무정신을 믿지 않는 자는 없다.”[ 16]
그 외에 쑨원과 같이, 청년 마오쩌둥 또한 적극적으로 상무정신을 주장하였다. 그는 외국의 여러 강성한 국가와 비교분석하였는데, 예컨대 “현대의 문명한 여러 국가 중 독일이 가장 강성하며 그 칼끝의 바람이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일본 또한 무사도가 있어, 근래 우리나라의 후세대들은 유술을 익히니 그 강성함이 실로 볼만하다.”[17]
상무정신의 가치를 일부 볼 수 있으며, 남소림 무술 정신은 곧 민족정신의 정화이자 그 중요한 일부이다. 남소림 선종과 남소림 무술은 서로 영향을 주어 서로 침투하니, 끊임없이 축적되어 남소림무술정신을 형성하였다. 남소림 무술 정신의 핵심은 애국, 상무, 중덕(重德)의 정신이며, 우리 중화민족의 귀중한 정신자산이다.
남소림 선조들이 가진 상무애국정신은 항일전쟁 시기에 있어 선명하게 드러났다. 민간항일무술가인 황싱셴, 우친 등 인물이 항일전쟁 중 보여준 영웅적인 행위는 물론이고, 19로군 항일대도대의 상하이 전투 또한 의심할 바 없이 남소림정신의 승화이자 표현이다.
- 결어
항일전쟁의 승리는 근현대중국인민이 100여년 만에 처음으로 외세의 침략에 대해 얻어낸 승리로, 전국인민의 민족 자존심과 자신감을 크게 드높였다. 시세는 영웅을 만드니, 영웅은 역사를 써내려 간다. 실로 일부 항일인물 및 단체의 영웅적인 행적이 전체적인 항전승리를 당겨왔다고 할 수 있다.
항일투쟁에 있어 여러 남소림무술가와 단체가 나타났고, 그들은 기격성이 강한 남소림무술로 적에게 맞서 투쟁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과 피로서 빛나는 역사를 써내려가니, 중화의 우수한 민족정신을 드높이고 또 드높였다.
지금은 조화사회를 건설하고 민족전통문화를 드높이며, 조화의 문화를 이끌고 문화사업 및 산업을 발전시키고, 민족의 응집력과 창조력을 늘리는 큰 배경 아래 있는 때이다.
국민들은 마땅히 역사를 거울로 삼아, 편안한 상황에서도 위험할 때를 생각하여, 선배 혁명가와 무술가들의 우수한 정신을 깊이 탐구하고, 이를 더욱 더 잘 전승하며 발전시켜야한다.
주변정세와 모순이 비교적 복잡해지는 이 때에, 국민들은 마땅히 “이성적인 애국(理性爱国)”이란 호소 아래, 적극적으로 이러한 상무애국사상을 학습해야하고, 민족응집력을 강화하며 신체를 튼튼히 하고, 국가의 장기적인 안정을 위해 미력하게나마 힘을 보태야한다.
참고문헌
[ 1] 후팡밍(侯方明), 천칭(陈青), <항일전쟁 중 무술이 응집한 인민정신의 사회적 의미(抗日战争中武术凝聚民族精神的社会意义)>[ J] .북경체육대학학보, 2006, 3 ( 11) :20 .
[ 2] 정자오셩(曾昭胜), <광동무술사(广东武术史)>[ M] .광저우: 광동인민출판사, 1989 :120 -121, 61, 179 -180 .
[ 3] 천티에셩(陈铁生), <정무본기(精武本纪)> [ M] .상하이: 정무체육회, 1919 :1 -2 .
[ 4] 천지(陈吉), <복건시교구지(福州市郊区志)>, 복건, 복건교육출판사, 1999 :830 –831 .
[ 5] 황루룬(黄如论), <복건황씨세보총서(福建黄氏世谱丛书)> [ M] .홍콩:중화국제출판사, 2005 :156 –157
[ 6] 린보팡(林伯方), <복건시지(福州市志)> 제7권 체육[ M], 베이징, 방지출판사(方志出版社)
[ 7] 황지엔헝(黄鉴衡), <월해무림춘추(粤海武林春秋)>, 광저우, 광동기술출판사, 1982 :61, 81 .
[ 8] 천샹(陈享), <채리불 기격학(蔡李佛技击学)>[ M] .광저우: 광동인민출판사, 1995 :5-7 .
[ 9] (필리핀) 황니엔방(黄念榜), <삼대의 횃불이 오조로 전해지다(三代薪火传五祖)>[ A] .재인용: 조우쿤민(周焜民).<오조문연구(五祖门研究)>[ M] .베이징: 자금성출판사, 1998 :113 .
[ 10] 조우쿤민(周焜民), <오조권보(五祖拳谱)> [ M] .홍콩: 천행건출판사(天行健出版社), 2009 :5
[ 11] 궈시핑(郭刁萍), <내가 봤던 황샤오샤 사부(我所认识的黄啸侠师傅)>[ J] .무림(武林), 1981, ( 2) :14 .
[ 12] 샤양(夏杨) 등, <그는 판위에서 왔고, 도법은 일본왜구를 놀래켰다네(他从番禺来 刀法震日寇)>, [ N] .양성만보(羊城晚报), 2006-3 –14.
[ 13] 천창몐(陈昌棉), <황샤오샤 노사를 애도하며(哀悼黄啸侠老师)>[ J], 무림(武林), 1981, ( 2) :13
[ 14] ( 日) 마츠다 류치(松田隆智), <중국무술사략(中国武术史略)>[ M], 쓰촨, 사천과학기술출판사, 1984 :74 .
[ 15] 치메이주안(祁美娟), <남소림나한문천비(南少林罗汉门阐秘)>[ J], 박격(搏击), 2007, ( 11) :1 –2 .
[ 16] 량치차오, <신민설·상무론(新民说·论尚武)>[ M], 션양, 요녕인민출판사, 1994: 148
[ 17] 마오쩌둥, <체육의 연구(体育之研究)>[ M], 베이징, 인민체육출판사,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