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연구를 설립하기
: Martial Arts Studies 제1장 요약&해설
- 기획 소개 & 의도
저자 폴 바우만(Paul Bowman)은 비평적인 관점으로 무술을 연구하기 위해 무술연구(Martial Arts Studies)를 제안했다.
무술 연구가 지금까지 없어왔던 것은 아니다. 역사학, 인류학, 스포츠연구, 심지어는 정치경제학에 이르기까지 무술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연구가 있다. 이런 무술관련연구(Studies of Martial Arts)는 물론 제 각각의 가치를 가진다. 하지만 각 분과학문에 소속된 연구자들은 본래 자기 분과학문에 맞춰 무술을 연구한다. 역사학은 역사학의 시선으로, 스포츠 연구는 스포츠 연구의 시선으로 무술을 보는 것이다. 때문에 무술이라는 대상은 같아도 서로 소통하기가 지극히 어려웠다.
때문에 무술연구를 통합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폴 바우만은 문화연구의 이론틀을 빌려와 다양하고 이질적인 비평들 관점 속에서 무술을 연구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새로운 분과학문을 세우기보다는, 서로 다른 분과학문들이 무술연구라는 영역(field)에서 무술을 함께 논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저자는 이에 더해, 무술 연구가 분과학문 간의 공고한 경계를 흔드는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
- 연구 핵심
무술연구는 이중-초점(double-focus)의 관점으로 무술을 연구해야한다. 무술(Martial Arts)에 초점을 둘 뿐만이 아니라 연구(Studies)라는 문제에도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무술연구는 제도(institution) 개념을 중시할 것이다. 이에 따라 ‘무술’ ‘연구’는 두 가지 지점에 주의를 기울인다.
① “무술은 제도로 볼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② “무술이 이해, 논의, 연구되는 방식 또한 제도적이다. --제도와 연결되어 있거나 제도를 생기게 한다.”
(번역자: 무술이라는 제도를 통해 한 사람이 훈련을 받고 주체로 변화하기 때문인 듯하다. 요컨대 태권도라는 제도를 통해 개인은 태권도 유단자가 된다.)
위와 더불어, 무술 연구는 미디어의 무술 재현에도 큰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자주 과소평가되긴 하지만, 각 개인이 가지는 무술지식은 미디어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일례로, 우리는 이소룡의 절권도를 알 때, 절권도 자체의 지식을 배우는 게 아니라 영화나 TV 같은 미디어를 통해 배운다.
이렇게 무술의 제도적 측면과 미디어의 무술 재현을 이해하기 위해, 무술연구는 탈구조주의, 문화연구, 미디어연구, 그리고 탈식민 연구에서 자원을 끌어오고자 한다.
- 필요성 & 문화연구
사실, 관점에 따라 무술연구의 기획이 무가치해보일 수도 있다.
1960년대 영국에는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의 흐름이 생겨났다. 다양한 이론을 통해 대중문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문화를 연구하고자 한 것이다. 이 흐름은 곧장 여성 연구, 퀴어 연구, 장애연구, TV 연구, 평화 연구, 이민 연구, 심지어 비즈니스 연구 등 수많은 연구를 만들었다. 분명 이 새로운 연구들은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이유에서 점점 쇠락해나갔다. 무술연구도 그런 식이 아니리라고 어찌 이야기하겠는가. 게다가 대학가에는 이미 다양한 무술관련 학위과정이 있지 않은가?
허나 그럼에도 무술연구는 필요하다. 기존의 무술관련 학위과정은 대개 스포츠 연구 등에 치중되어 있어, 자기학과의 연구방법이나 직업이라는 어젠다에 종속되어 있다. 무술은 다양한 비평적 관점에서 연구할 수 있는 장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저자는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를 핵심적으로 동원했다. 이는 문화연구가 가지는 특징 때문이다. 문화연구는 분과학문처럼 연구대상이나 연구방법을 공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화연구자라는 정체성과 어떤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다시 말해 문화연구자들은 마르크스주의, 탈식민, 젠더 등 어떤 이론적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그와 관련된 이론들을 서로 논한다. 그 과정에서 연구 주제는 어떤 것이든 문화의 범주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사실 큰 상관이 없다.
다만, 한 가지, 문화연구자들 또한 문화정치(cultural politics)에 대한 가정은 공유한다. 이 가정에 따르면 모든 문화는 정치성을 띄고 있다.
- 신체 & 탈식민
무술연구는 무술을 지식의 체현(embodiment)으로 보았다.
여기서 몇몇 학자는 무술연구가 신체(body)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무술연구란 분야 자체를 의심스럽게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신체에 대한 서구적인 편견에서 나온 것이다. 자크 데리다가 <그리마톨로지>를 통해 지적했듯, 서구는 신체를 정신에 종속시키는 지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정신을 본질로 보고, 육체를 부가적인 것으로 보는 게 일례이다.- 이렇게 이미 만들어진 서구적 신체 담론은 신체에 관한 다른 문화의 이질적인 접근(예를 들면 동양무술의 신체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여기서 탈식민적 문제가 드러난다.
무술문제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신체를 “하나의 고정되고 통일된, 인식가능한 실재(實在)”로 파악한 뒤 “전략적인 본질주의”를 전략으로 차용했었다.
본질주의란 대상의 본질을 설정하는 것을 일컫는다. “동양은 어떠어떠하다.” 무술에 있어서도 이런 본질주의는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가라테는 일본적이다.” 이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이 오랜 기간 본질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했다.
하지만 탈식민 전략에 있어 저들(식민자)과 다른 우리(피식민자)를 구성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본질주의가 사용된 경우가 있다. 무술연구가 무술을 동양적인 것으로 이해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과하게 본질주의에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 무술연구는 “개념적 문제들을 붙박는” 전략을 제시했다. 요컨대, 무술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든, “무술은 빠르게 바뀌며, 모호하고, 모순되는, 역설적인 대상”임을 명심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무술연구는 서양인들이 아시아에 대해 생각할 때 오리엔탈리즘 이외의 것을 떠오르게 하고자 했다.
- 연구 주제-해석
무술연구에 있어 연구의 주제와 대상의 개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연구 주제(subject)는 “연구 대상에 접근하는 접근 방식” (혹은 학술적 장(academic field))을이고, 연구 대상(object)은 간단하게 “연구되는 것”이다. 때문에, “학술적 주제는 대상을 연구한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중요한 점은, “연구 주제가 다르면 같은 연구 대상도 다르게 이해된다.”는 것이다. 일례로 사회학, 생물학, 철학은 같은 “사랑”을 연구하더라도 다르게 본다. 때문에 연구 주제-혹은 각도-에 따라 연구 대상은 항상 다른 무언가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
학자 스탠리 헨닝(Stanley Henning)의 지적에 따르면 중국무술을 연구함에 있어, 연구자들은 상당히 심각한 오역이나 자의적 해석을 남발했다. 그는 정치적 올바름 같은 문화담론에 휘말리지 않고, 대상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폴 바우만에 따르면 헨닝이 지적한 오역이나 자의적 해석은 어느 정도 입장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어떤 연구자든 자신의 학과나 지적 입장에 맞춰서 텍스트를 해석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그 입장이 오리엔탈리즘일 수도 있고, 정치적 올바름일 수도 있다. 다만 헨닝이 주장했듯 ‘중립적’이거나 절대적으로 ‘정확한’ 해석이란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 해석에 있어 ‘단일한 진실’이란 존재할 수 없고, 의미는 사실보다는 각자의 평가맥락에 더 의거한다.
그 결과 문화연구는 정체성이나 젠더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무술이란 대상을 다루고자 하며, 그 과정에서 무술의 어떠한 단일한 진실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 분과학문의 극복/ 이론의 필요성
폴 바우만은 몇몇 경우 분과학문의 시선에 사로잡혀 무술을 포괄적으로 보지 않으려 할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 일례로 몇몇 사회과학의 입장에서 ‘실증적’ 연구를 주장하는 이들은 ‘해석적’이거나 ‘비판적’인 연구를 무술 연구에서 배제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분과학문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 잘라내는 것으로, 향후 연구에 별 다른 도움이 될 리 없었다.
이렇게 분과학문의 틀에 머물려는 일부 무술관련연구에 맞서, 저자는 두 가지 긍정적이고 중요한 연구를 언급했다.
Farrer and Whalen-Bridge “체화된 지식으로서의 무술(Martial Arts As Embodied Knowledge)” (2011)
Adam Frank “태극권, 그리고 작고 늙은 중국 노인을 찾기: 무술을 통한 정체성 이해(Taijiquan and the Search for the Little Old Chinese Man : Understanding Identity through Martial Arts)”(2006) (이하 “태극권”)
이중 “태극권”은 인류학에 속해있으나, 문화연구의 문화이론을 도입하여 분과학문의 한계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태극권”은 이 노력을 통해 인류학이라는 분과학문 자체를 다양한 이론적 관점을 활용하는 학문으로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첨언으로 “태극권”은 무술을 “정체성을 구성적으로 경험하고 건설하는 매개체”로 보며, “무술을 익힌 사람, 그들의 경기, 그리고 관련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그 정체성이 “트랜스내셔널하게 이동하는지” 파악했다.
이런 작업은 무술연구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하지만, 폴 바우만은 “태극권”과 달리 분과학문을 재구성하기보다는, 이전 분과학문에 기초하여 새로운 구조-무술연구-를 건립하고자 했다.
여기서 이론은 무술연구를 독립적인 분야로 성립시키기 위해 필요하다. 서로 “이 부분이 좀 아쉽다”고 하는 분과학문들을 한 장(field)에서 함께 논의하게 하려면, 어떤 단과학문의 기준으로 무술연구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대신 함께 논의할 ‘이론’을 일종의 국제어로 배치하여, 그 이론을 중심으로 논의하게 해야 한다.
- 이론: 탈구조주의 –해석-
폴 바우만은 무술연구에 탈구조주의(poststructuralism)를 도입하고자 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텍스트의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이 현실을 인지하고 이해하는 일은 일종의 “읽기”이자 “해석”이기에, 이미 사회적으로 주어진 텍스트-맥락-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일례로 성경 같은 텍스트는 같은 문구라도 집단이나 시대에 따라 그 해석이 끊임없이 바뀐다. 그 점에서 아무리 당연해 보이는 “해석”이라도 언젠가는 바뀔 수밖에 없다.
또한 탈구조주의는 하나의 텍스트가 여러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텍스트는 독자에 의해 의미를 생산하는데, 이때 독자는 텍스트에 다양한 맥락을 덧붙인다. 이때 사람마다 각자 맥락이 다르기에, 그 결과인 해석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탈구조주의자들이 “텍스트”에 물질세계를 포함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는 무술의 해석과도 관계된 일이다.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성(textuality)이라는 개념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가 여러 가능성 있는 의미들로 가득 차있으며,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큰 틀의 일부를 이룬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런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텍스트는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에서 재조합되어 생산된다. 그리고 문화의 일부인 무술 또한,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에서 창안되어, 발전하고,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바르트와 데리다가 지적하듯, 여기서 한 텍스트(혹은 무술)을 한 가지 의미로만 해석하는 것은, 어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는 “클래식한 가라테에서 자유로워져라.”라는 이소룡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한다. 기존의 읽기를 거부하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 이론: 탈구조주의 –해체, 제도, 오리엔탈리즘-
탈구조주의자로서 데리다는 해체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철학자들이 논의를 진행함에 있어 미리 어떤 논리구조를 상정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신체보다 정신이 본질적이다.”는 주장을 들 수 있다.) 데리다는 이렇게 담론에 스며들어 있는 논리구조를 해체하고자한다.
물론 해체주의는 언어적이면서 장황하고, 이 때문에 비판받기도 한다. 다만 미셸 푸코가 신체와 제도에 대해 집중한 부분은 무술을 논함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푸코는 “제도가 주체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사회적 제도라고 부르는 것은 한 개인을 주체로 만든다.” 푸코가 든 정신과의 예시를 보자면, 정신과 의사들은 단순히 환자를 치료할 뿐만 아니라 누가 환자인지 아닌지 그 선을 긋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제도는 사람을 환자나 범죄자라는 주체로 규정한다. <임상의학의 탄생>(1973)
또한 푸코는 지식의 설립이 어떻게 제도적이며, 그 제도적인 지식이 어떻게 제도적인 권력이 되는지, 그리고 그 제도적인 지식/권력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과 신체를 움직이는지 논했다. <감시와 처벌>(1977)
푸코는 이렇게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담론의 역사를 캐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담론” 개념과 “권력/지식” 개념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제창한 “오리엔탈리즘” 개념으로 이어진다.
사이드에 따르면, 서양인 들은 “동양인들은 어떠하다”고 규정짓는 오리엔탈리즘 “담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담론”은 서구의 동양학자들과 그를 뒷받침하는 “제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제도에 의해 만들어진 담론은 스스로를 “지식”으로 자부하며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이렇게 제도와 권력의 관습 및 효과를 보는 학풍은 탈구조주의와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널리 수용되었다.
- 이론: 민족지-아비투스 ① 문제제기
무술연구에 있어서 민족지적 연구법 또한 중요하다. 민족지 연구는 종종 탈구조주의를 무조건 배척하기도 했지만, Loic Wacquant 시카고 게토의 복싱을 연구함에 있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habitus) 개념을 끌어와 민족지학적 연구를 진행했다.
(Wacquant. L, Body and Soul : Notebooks of an Apprentice Boxer, 2004)
여기서 아비투스(habitus)는 사회 계급이나 그 하위 분파의 ‘관행’을 재생산하는, 일련의 지속적인 조건들을 지칭한다.
무술에 대해 “의례, 신념 체계, 이데올로기” 등을 다루고자,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을 사용하는 연구는 나날이 늘고 있다. 허나 데리다와 랑시에르는 이미 부르디외적 사회학 방법론을 강하게 공격하였다.
데리다는 Who‘s Afraid of Philosophy?에서 부르디외가 객관성 개념을 너무 신봉한 나머지 연구 대상의 진실을 찾으려고 한다는 비판을 했었다. 데리다에게 있어 학술 연구의 주제 (혹은 연구 시각)은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대상의 객관적인 진실은 파악할 수 없으며, 이는 그저 “위선적인 구조”만을 낳을 뿐이다. 이런 데리다의 공격은 Wacquant의 Body and Soul에도 적용된다. Wacquant는 시카고 게토에서 노동자 및 준 노동자 계층 남성들이, 흑인 권투와 어떻게 결합하는지 그 ‘진실’을 파악하고자 한 면이 있다.
이와 더불어 랑시에르의 비판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랑시에르는 부르디외 사회학이 교조적이라고 비판한다. 부르디외 사회학은 계급 사회의 불평등을 줄이는 데 있어 교육이 제 역할을 하는 데 실패했을 분만 아니라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헌데 여기에는 “불평등의 가정”이 들어있다. 요컨대 “인민은 리더나 교육자가 필요하다”는 식의 가정으로, 프롤레타리안 노동자를 -작가, 학자, 예술가, 연구자에 올리려들지 않고- 인도 받아야만 하는 노동자 위치에 둔다는 것이다. 또한 랑시에르가 보기에, 여기서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도 노동자와 같은 하위계급 ‘대상’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잘못된 환상을 반복한다. 그 결과 부르디외 사회학은 계급관계를 지적으로 재생산하는 효과를 가진다.
여기서 탈-부르디외적 사회학 연구들은 랑시에르의 지적을 받아들여, 특정 계급의 사람들이 제 자리-혹은 ‘아비투스’-를 벗어나는 모습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연구들은 Wacquant의 게토 복서 같은 하위 계층이 제 자리를 벗어나 위로 올라가는 걸 열망한다고 (혹은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 이론: 민족지-아비투스 ② 대답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Wacquant는 Fighting Scholars를 기획하며 그 서문과 결론에 몇 가지 대답 될 만한 부분을 적어두었다. 그는 아비투스 개념을 이미 결정된 무언가로 보지 않는다. 아비투스 같은 사회적 관례는 구체적인 사회적 공간에서 그에 참여하는 행위자가 있어야만 실질적인 효과가 있다.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수행적인 것(performatives)’이다.) 때문에 Wacquant가 쓰는 아비투스 개념은 무술을 익히는 행위자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모습을 살펴보기에 용이하다.
또한 Wacquant는 아비투스 개념을 통해 인류학에 있어 어떤 학술적 방안을 세우고자 한다. 영미 인류학은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강조한다. (Don’t Go Native) 이에 반해 프랑스 인류학은 대상에 대한 급진적인 개입을 허용한다. (Go Native) 그 사이에서 Wacquant는 “무장한 채 다가가기(go native armed)” 전략을 사용하고자 한다. 요컨대 이론적이고 방법론적인 틀로 무장한 채, 대상의 경험을 구체화시키고, 대상의 일원이 되는 것 대신 대상이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는 데 관여하고자 한다.
헌데 이상을 이야기하며 Wacquant는 자신의 방법론이 탈구조주의적 인류학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Wacquant가 보기에 탈구조주의는 대상의 자기참조적이며, 상대주의에 빠져있다. 허나 폴 바우만이 보기에 Wacquant의 비판은 탈구조주의 그 자체보다는 탈구조주의적 인류학 일부에 대한 것일 뿐이다.
특히 데리다적인 입장에서 볼 때 Wacquant의 포스트모던 비판은 다소 문제가 있다. Wacquant가 인류학과 사회학이라는 특정한 입장에서 포스트모던 이론을 비난하기 때문이다. Wacquant는 자신의 글에서 언어를 일종의 도구로, 문학이론을 자기참조적인 구조로 보는 관점을 유지한다. 하지만 데리다적 입장에서 볼 때 언어란 깊이 숙고되어야 할 보충물이며, 그렇기에 아비투스 개념은 대상의 진실을 서술해낼 수 없다.
Wacquant가 연구 대상을 자세히 알기는 하지만, –시카고 게토의 권투 클럽에 오래 다녔기에- 그게 ‘진실’을 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스스로도 권투 클럽에 다닌 것은 그저 지역 공동체에 침투하기 위한 방법 –입구-에 불과하다고 이야기 했었다.
- 이론: 민족지-아비투스 ③ 결론
Wacquant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연구가 게토에 대해 스테레오타입을 드러내는 미디어 , 정치, 학술의 담론들에 도전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통계학 등에 의거한 이 문헌들은 게토의 모습을 자세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랑시에르적인 관점에서 보면 Wacquant의 ‘빈민(the poor)’ 개념화는 이중적이다. 그는 게토의 ‘빈민’에 대한 미디어 등의 기존 견해를 무너트리고자 하면서도, 또한 그 스스로 ‘빈민’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세운다. 이 견해를 세우는 데 있어 ‘빈민들의 아비투스’를 분석하기 때문에, 부르디외의 교조적인 면이 Wacquant에게도 반영되었다고 지적할 수는 있다.
하지만 폴 바우만이 보기에 Wacquant의 저작은 ‘빈민’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체육관과 그 안의 여러 주체(복서, 트레이너 등)에 대한 것이다. 요컨대 체육관이라는 ‘장치(machine)’가 어떻게 복서를 생산해내는지 서술한 것이다. 그 점에서 Wacquant의 서술은 랑시에르의 비판을 빗겨 나간다. 더 나아가 Wacquant는 방법론 면에서도 설문지나 통계에 의존하지 않기에, 랑시에르가 비판했던 부르디외의 방법론과 다르다.
Wacquant의 작업은 정형화된 게토 사람들과 다른 모습을 인류학적이고 사회학적 시선으로 보여준다고 봐야한다. 그에게 있어 아비투스는 본질적으로 고정된 게 아니라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대상의 고정된 정체성을 서술하는 게 아니다. 기존 게토 담론 같은 것을 해체해나가기 위해, 만들어져가는 대상의 신체적인 지식과 그 미시적인 통치성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적인 것은 ‘언어로’ ‘체화된 지식과 기술에’ 개입하고, 생각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어떻게 배짱(guts)에서 지식으로, 그리고 살에 대한 이해에서 텍스트에 대한 지식으로 이어나갈 것인가?” 언어로 신체적 활동을 연구하는 방법-이론-에 대해, 폴 바우만은 다음 챕터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