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소림무술과 현대항일투쟁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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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소림무술과 현대항일투쟁(南少林武术与现代抗日斗争)

궈쉐송(郭学松)

이전 세기 30년대에 있어 일본제국주의 침략전쟁은 중국인민에게 극히 큰 상처를 주었다. 인간성을 멸절시키는 그 폭력에 중국인민은 격렬하게 저항했고, 특히 “국술(国术)”을 수련하는 이들은 무술을 그 기초 삼아 각종 무기를 들고 적과 목숨을 걸고 싸웠다. 항일전쟁시기 국수무술은 민족정신의 정수로 민족 자존심과 자신감을 증강시키는 데 있어 나름의 기능과 작용을 했다.[1]

수많은 애국권사들은 학생에게 무예를 전수했을 뿐만 아니라, 군대에 들어가 무술을 가르쳤다. 그들은 걸출한 애국무술인재들을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각지에 무술관을 설립하여 학생을 가르쳤으며(예를 들어 불산(佛山)의 홍생무관(鸿胜武馆)이 있다), 적극적으로 보가위국의 항일전쟁에 참여했다. [ 2]

순식간에 전국각계에서 무술을 익히고 항일을 행하고자 하는 기풍이 구름처럼 밀려왔고, 공격성이 비교적 강한 남소림무술을 통해 주저 없이 항일의 중임을 맡고자 하였다. 남소림무술은 곧 남파소림무술로, 복건성의 독특한 지역문화와 불교선종문화가 모여 형성된, 남파무술의 스타일이 특징인 소림무술이다.

그 범주는 직접적인 원류인 소림사의 권종(拳种), 외부에서 유입된 남소림사와 남소림문화가 서로 융합되어 만들어진 권종, 그리고 남소림사 이외의 지역(예를 들어 광동, 대만, 동남아 등)으로 전해진 권종을 포함한다.

복건 및 광동 지역에서 남소림무술은 호걸의사들에게 중요한 저항무기로 인식되었고, 역대 남소림 인사나 조직(예를 들어 명대 항왜 영웅 척계광, 유대유, 반청복명의 천지회, 신해혁명의 치우진(秋瑾), 황싱과 황화강 열사 등)이 전하는 상무애국정신은 멈춤 없이 남소림 애국지사들이 항일투쟁을 해낼 수 있게 격려하고 잇다.

이와 더불어 항일투쟁 또한 남소림무술의 광범위한 전파에 있어 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무술은 항일을 위해 점차적으로 실천의 토양을 제공했으며, 남소림무술의 이론체계를 대략적으로 갖추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점차 복건성을 중심으로 광동, 절강, 강서, 대만 등 주변지역으로 뻗어나가는 남소림무술 문화체계를 형성토록 했다.

  1. 민간항일에 있어서의 남소림무술

중국무술은 전사가 반드시 연습해야하는 기본 격투술로, 한 개 부대의 작전 능력을 향상시켜주는 중요한 것이다. 특히 근접전, 시가전, 그리고 육탄전 중에 그 가치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비록 현대 항일전쟁은 총기가 성행하는 시대에 일어났지만, 무술은 군민의 기본 체력과 박투 능력의 향상을 위해서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무술을 익힌 이는 담대하며,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는 정신이 있는데, 이는 전투의 승리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손중산(孙中山, 쑨원) 선생이 무술에 대하여 말한 것은 무술이 전쟁에 있어 어떤 가치를 체현하는지 실로 잘 설명해주고 있다. “총기가 중국에 들어온 후 우리나라 사람들은 체육의 격투술을 포기하면서, 사회개인이 점차로 약해졌다; 마지막 5분의 결전에는, 항상 바로 앞에서 5척의 작은 병사들이 서로 맞붙곤 하는데, 이때 어찌할 줄을 모른다. 이는 지금의 유럽전쟁(제1차 세계대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니, 소위 격투술은 총포 및 비행기와 동등한 작용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3]

남소림 무술은 비교적 그 격투성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항일투쟁에 있어 어떤 식으로 작용했는지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1-1. 복건의 민간 항일에 있어 남소림무술

복건성은 예로부터 무술이 크게 유행하여 무술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고대에는 무술을 익힌 뒤 사회와 인민을 위해 큰 공헌을 한 이가 적지 않았다. 현대 항일투쟁 시기에는 민간무술인들이 무술을 가르쳐 반격하게 하니, 침략자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복건의 광복을 당겨왔다.

그중 무술을 전수 받은 황싱셴(黄性贤) 사부는 그 중에서도 걸물이다. 황싱셴 사부가 무술을 익힌 과정과 항일시기 업적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위해, 연구팀원들은 조사한 대량의 데이터에 기초하여 2010년 5월 자녀 황슈차오(黄书超) 선생에게 가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황싱셴(黄性贤, 1910~1992), 자는 심현(心玄)이며, 다른 이름은 민무(敏武)이고, 호는 호헌(号轩)으로, 복건시 푸안구(晋安区) 구샨전(鼓山镇)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술을 유난히 좋아하여, 선배 샤종샹(谢宗祥) 권사에게 “백학권(白鹤拳)”을 배우고, 후배 숭복사(崇福寺)의 천스딩(陈世鼎) 권사에게 “나한권(罗汉拳)”을 배웠으며, 권법을 익혀 나날이 탁월해졌다.

오래지 않아 사람들의 소개를 통해, 홀홀단신으로 상해로 가 스승을 구하고 친구를 방문하였으며, 판지아농(潘家弄)에 무관을 세우고 문도를 받았다. 이때 스스로 연이 닿아 “소림권”을 배웠다.

1934년 12월 고향으로 돌아가 무술 “현급 시험(县考)”과 “성급 시험(省考)”에 참가하여 각각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하니 명성이 크게 드높아졌다. 이에 따라 “선전기(善传奇)” 민극(闽剧) 극단에 무술 사범으로 초빙되었으며, 또한 “백룡암 복건 국술사(白龙庵福州国术社)”의 총교련을 맡게 되었다.[ 4]

황슈차오 선생의 말에 따르면, 그 부친이 익힌 무술은 대다수가 남소림 무술을 그 대종으로 하고 있다. <남소림연구>의 제 3장 “남소림무술고”의 연구결과도 이를 다소 증명해준다.

황싱셴은 항일투쟁에서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졌으니, 그 본신의 무술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1941년 4월 푸저우(福州)가 함락되면서, 황싱셴은 민후현(闽侯县)의 현장 돤즈졘(段志坚)에 의해 “북고대 항일특임 대대장(北鼓台抗日特务大队长)”을 맡아 부대를 조직하고 난위(南屿) 일대에서 유격항일활동을 했다. 이후 조우웨이(州尾)에서 일본의 식량선을 습격하고 마오토우산(猫头山)에서 일본군의 진지를 습격하였다. 두 차례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일본군의 화기 수십개를 노획했다. 오래지 않아 또 단신으로 후위촌(后屿村)에 들어가 일본군 전신병 상사반장 아베 후미오(亞部文雄)를 생포하였다.

1943년 푸저우(福州)가 광복된 후 남문두 공자묘(南门兜孔子庙)(현재 푸저우 소년궁(福州少年宫))을 “푸저우 청년 국술 연구사(福州青年国术研究社)”로 새로이 건립하였다. 리셴우(李森武)가 사장을 역힘하고, 황싱셴이 총교련을 담당하였다.

본래 있던 7개 지사 외에 또 량치(琅岐), 호우위(后屿), 타이쟝(台江) 등에 지사를 설립하여 극히 성행하였다. 1944년 9월 일본이 제2차로 푸저우를 함락하자, 황싱셴은 다시 난샹유격대(南港游击队)로 갔다. 10월 쟝시우칭(江秀清)과 흐전(何震)이 함께 군을 이끌어 푸저우 타이쟝(台江)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소부대를 습격하였다. 허나 베이링(北岭)의 “국군”이 호응하지 않아 철수 할 수 밖에 없었다.

황싱셴은 마음이 달갑지 않았던지라, 다음날 고기잡이로 변장하여 왕쟝(王庄)에 들어가 주먹으로 일본군 초병 하나를 때려죽이고는 중기관총 한 정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난위(南屿)로 돌아가 유격전쟁을 지속하였다.[ 5]

1944년 “푸저우 청년 국술 연구사”가 민후의 난통(南通) 판춰(潘厝)의 사당으로 옮기자, 사원들은 적극적으로 항일유격에 참가하여 밤낮으로 권술을 익히고 대도를 훈련하여 투지를 불태웠다.

그 동안 유격대는 적의 수송선을 습격하고, 일본군 3명을 사살하였다. 6] 황슈차오의 설명에 의하면, 황싱셴의 항일의거에 대해서는 당시 <세계일보(世界日报)>, <말레시아 시화일보(马来西亚诗华日报)>, <푸저우일보(福州晚报)>, <민남일보(闽南日报)> 등 간행물에서 모두 보도하여서 그 여파가 컸다고 한다. 특히 그가 훈련시킨 민남(闽南)의 항일도대는 상하이 항일전선에서 적극적으로 보가위국의 투쟁에 참여했다.

1-2. 광동 민간항일에서의 남소림무술。

광동성은 혁명의 선구자 손중산 선생의 고향으로, 그곳 사람들은 혁명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아, “국가의 흥망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国家兴亡, 匹夫有责)”는 말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당하자, 일부 광동민중은 홍승관(鸿胜馆)에서 책임자 쳰웨이팡(钱维方)과 혁명당원 우친(吴勤)의 지도 아래 항일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몸을 던져, 일본침략행위에 큰 반격을 가했다.

문헌고증에 따르면, 이 두 항일지도자는 무술 수련자로, 그들은 무술을 이용해 항일 투쟁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무술을 전해주는 것을 일종의 유대로 삼아 항일무술인재를 모으고 양성했다.

쳰웨이팡(钱维方)은 광동 삼수현(三水县) 황당향(黄塘乡) 사람으로, 청나라 말기 불산(佛山)에서 태어난 미장이 출신이다. 그는 천셩(陈盛)의 대제자로, 우친(吴勤)은 쳰웨이팡의 제자이다.[ 7]

쳔성은 불산 홍승관(鸿胜馆)의 창시가 장옌(张炎)의 전인으로, 장옌은 채리불(蔡李佛)의 시조 천샹(陈享)의 마지막 제자이다.[ 2] 천샹(1814~1875)은 광동 신회애(新会崖) 서경매향(西京梅乡) 사람으로, 채리불권의 비조이다.

천샹의 사배는 불파(佛派) 홍문(洪门) 사람이다. 천샹은 채리불을 차이푸(蔡福), 리요우샨(李友山), 천위엔후(陈远护) 세 대사에게서 배운 후, “한데 모아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投合化之, 自成一家)” 그가 창시한 권술은 일명 “채리불(蔡李佛)”이라 하여, 세 은사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 사부들은 저명한 불파 남권의 계승자이다. 차이푸가 전한 채권(蔡拳)은 복건성 남소림사 차이보다(蔡伯达), 차이지우이(蔡九仪)가 창시한 것이다.

차이푸의 별호는 청초화상(青草和尚)으로, 청나라 조정에 미움을 받아 절이 다 타버려 “난두화상(烂头和尚)”(호적상 이름)이 되었다. 광동성 나부산(罗浮)에 은거한 후 홍문(洪门) 사람이 되었다.

천샹이 처음 무관을 설립할 때에 “홍성(洪圣)”이라 하였다고도 하는데, 이는 차이푸에 의해 이름 붙여진 것이다. 신회(新会) 칠보(七堡) 사람 이요우샨이 전한 것은 “이권(李拳)”으로, 이는 복건성 남소림사의 승려이자 홍문의 중요인물 리서카이(李色开)가 창시한 것이다.

천샹의 당형제, 불문 천위엔후(陈远护)가 전한 것은 “홍불권(洪佛拳)”으로, 자오칭(肇庆) 경운사(庆云寺) 독장(独杖)선사에게서 내려온 것이다. 홍문권은 “홍문불가권(洪门佛家拳)”의 약칭이다.

이 세 종류의 기본 권법은 모두 복건성 남소림사와 관련이 있으며, 그 절의 스님들에 의해 전해졌다. 이 남권은 무술문파일 뿐만 아니라 광동 및 복건 연해에서 유행한 강호 파벌이기도 하다.[ 8]

남소림파와 홍문은 일맥상통하여 서로 이으니, 천성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천향이 창시한 채리불권은 그 원류가 남소림 무술유파에 속한 것이다. 때문에 천웨이팡과 우친의 사제 모두 남소림무술 수련자거나 전승자라 볼 수 있다.

1937년 첸웨이팡과 우친은 홍콩에서 불산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홍승체육회(옛 홍승관)의 사업을 주관하여 회원들을 이끌고 항전의 물결에 뛰어들었다.

첫째, 그들은 홍승관 안에 대도 훈련반을 개설하였으며, 몇몇 학교에 사람을 보내 남소림무예를 가르쳤다.

둘째, 방호단을 설립하여 홍승관 안에 일련의 명의를 두어 응급치료법을 가르치게 했다. 1938년 순더(顺德)와 난하이(南海) 접경 지역에서 “인민항일의용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사력을 다해 싸웠다.

국민당 광동성 성급 당서기 천샤오천(湛小岑)과 광저우 시장 청양푸(曾养甫)가 들은 바에 따르면, 우친의 인솔부대는 광성 항일유격 제2 임시부대(支队) (약칭 성유2지대 省游二支队)로 편성되었다. 우친은 임시부대의 사령원을 맡아 난하이(南海), 판위(番禺), 순더(顺德) 일대에서 활약하며 일본을 공격했다. 또한 끊임없이 부대를 키워 일본을 격퇴하는 해방전쟁에 있어 한 힘이 되었다.[ 7]

1940년 우친은 당의 영도 아래 부대를 중요한 항일군대로 개편하였고, 여러 차례의 선투에 있어 전공을 세웠다. 또한 대량진(大良镇) 수비, 시하이(西海) 섬멸전, 남촌 칠성강(七星冈) 탈취 전투의 세 차례에 있어, 판위시 교량의 리량지(李朗鸡) 괴뢰군을 공격한 것과 진쥐쥐(金橘嘴) 격전 등을 필두로 일본군과 괴뢰군의 전의를 꺾었다.

남소림의 상무애국정신은 이 항일용사들의 몸을 통해 뚜렷하게 나타났다. 용사들은 수많은 애국동포를 격려하고, 헌신적으로 자신을 희생하여 국가보위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만 같아 보이는, 무수히 많고도 작은 항일의 힘들이야말로, 일본군의 침략을 지연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항일군대를 위해 유리한 시기를 쟁취하여 항전에 필수불가결한 유기적 부분이 되었다. 오늘날까지 이런 민간의 남소림 지사들의 빛나는 항일사적은 관련 매체에 의해 지속적으로 전파되고 있으니, 실로 좋은 애국주의 교육교재라 할 수 있다.

번역자: 곧 하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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