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의 영화, 현재의 고풍

in gonggan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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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천은 개항 이후부터 100여 년을 번성하다가 1990년대 도심 재개발에 밀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급속하게 쇠락했다. 서울이 압축적인 개발을 거듭하는 동안 시간이 멈춘 동네가 되어, 버려진 자식 취급 받으며 변방의 도시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란 참 묘하다. 시대의 뒤안길이 되어 버린 인천의 구도심 동인천이 요즈음 새로운 관심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져서 그런지 사람들이 느림의 미학을 강조하며 재개발 손길이 닿지 않은 동인천의 낙후된 골목길을 찾아 몰려오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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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구도심으로 취급받으며 한동안 사람들의 시선에서 비껴나 있던 동인천이 뒤늦게 관심을 끌게 된 건 도시 전체가 근대 역사와 문화는 씨줄로, 서민들의 고단한 삶은 날줄로 엮여 있어서 여행자의 흥미를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동인천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매력을 지닌 곳이다. 전철 1호선 동인천역에서 종착역 인천역까지 구경해야 할 것, 먹어 보야 할 것이 차고 넘친다.

무른 메주 밟듯 동인천 골목골목을 자근자근 밟고 다녀 보자. 인천의 역사와 한국 근대사의 형성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독특한 근대문화유산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양요사건을 시작으로 해서 일제강점기의 수탈과 핍박, 한국전쟁으로 인한 실향민의 설움, 그리고 도시 산업화로 인한 도시 빈민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동인천의 아픈 속살까지도 보게 된 것이다.

근대역사 발자취를 따라 발품을 팔다보면 어느새 동인천의 역사와 문화가 내 안으로 들어와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일본제58은행 인천지점

개항 이후 인천에는 일본인에 의해 여러 개의 은행이 세워졌다. 이 은행들은 우리나라 금융시장을 침탈하고 일본 상인들을 돕기 위해 세워진 것들이다. 지금도 중구청 부근에 당시의 은행 건물들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경제권 강탈에 앞장선 은행 건물들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는 이유는 과거의 아픈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역사교육의 체험장으로 삼기 위함이기도 하다. 일본의 은행 이름 앞에 숫자가 붙은 것은 1872년 실시된 일본의 국립은행 조례에 의해 인가된 허가번호에 따른 것이다.

일본제58은행은 오사카에서 창설되었는데, 은행장이 조선 정부의 화폐제도 개혁을 위한 고문으로 초빙되어 온 인연으로 조선에 진출했다. 1892년에 인천, 1893년에 부산에 지점을 설치하고 1895년에는 서울에 출장소를 세웠다. 1939년 신축된 이 건물은 광복 후 조흥은행 인천 지점,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는 중구 요식업조합이 입주하고 있다. 프렌치 르네상스 양식의 2층 건물로 초기 양식 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외관은 벽돌조 구조물에 석판 마감으로 구성됐다. 2층 발코니 형식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19호로 지정되었다.

 

 

인천아트플랫폼

‘서울에 인사동이 있다면 인천에는 개항장이 있다’.
개항장에 대한 인천 사람들의 자긍심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인천항 배후에 있는 중구청 일대는 ‘개항장 문화지구’로 불린다. 이 인천 문화지구에 아트플랫폼이 있다. 한국근대문학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인천아트플랫폼은 개항장 일대에 있는 100여 년 된 창고와 기업체 사옥 등 건물 13채를 개조해 2009년에 개관했다. 도시의 역사성을 최대한 살려 문화적으로 재할용하자는 시민들의 뜻과 인천시의 의지가 합쳐져 탄생한 지역 유일의 복합문화예술창작공간이다. 지역 활성화의 새로운 모델인 인천아트플랫폼은 전시관, 공연장, 예술교육관, 작가 숙소 등이 있는 공간으로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생활하며 창작 활동을 한다. 한 해에 예술인 40~50명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인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작업을 벌이며,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짧으면 3개월, 길게는 2년 동안 머물며 세 번에 걸쳐 전시회를 연다.

 

 

홍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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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남북을 연결하는 홍예문은 지금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홍예문이란 문의 위쪽을 무지개같이 반원형이 되게 만든 문으로 자유 공원이 있는 중구 송학동 응봉산 중턱에 있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9호인 홍예문은 산마루턱 9m가량을 깎은 뒤에 양쪽 편에 석축을 쌓고 마루턱 정점까지 돌을 채운 아치형 돌문으로, 1905년에 착공하여 1908년에 준공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지개 모양이 독특하고 운치 있지만, 실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거주 영역을 넓히기 위해 당시 인천 노동자의 한과 땀을 빼앗아 세운 것이다.

동인천과 긴 세월을 함께 해온 홍예문은 1960년대만 해도 위 난간에 서면 인천항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 맑은 날에는 팔미도, 대부도, 영흥도, 용유도 등 여러 섬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담쟁이덩굴이 돌벽을 뒤덮고 있어 계절마다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어 오랜 세월 동안 인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지금은 아파트와 공장 너머로 흐릿하게 바다를 볼 수 있다.

 

 

자유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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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나고 자란 사람치고 자유공원에 대해 일말의 감회라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인 김윤식 시인의 말이다. 자유공원은 응봉산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으로 1888년에 만들어졌다. 해발 69m로 야트막한 야산에 불과했던 응봉산이 공원으로 유명해진 것은 개항 이후 이 일대에 외국인들이 조계를 설정하면서부터다.

응봉산 아래 볕 좋은 터에 외교가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인천 유지와 고위층들도 앞다투어 거주하기 시작하며 어느덧 고급주택단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때의 고급 주택들은 오늘날 세월의 더께가 앉아 ‘고풍스럽다’는 모습으로 관광객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다. 이곳은 동공원에서 서공원으로, 다시 각국공원에서 만국공원, 그리고 지금의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기까지 인천 근현대사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현재 자유공원의 상징인 맥아더 장군 동상을 사이에 두고 진보와 보수가 의견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지만, 해마다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산책로에 줄지어 선 아름드리 벚나무는 한창 만개했을 때는 여의도 벚꽃축제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의 시작은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개항과 임오군란으로 말미암아 중국인들이 인천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부터. 처음에는 인천항을 출입하는 선박의 급수와 잡화 판매를 위해 화교 사회가 형성되었고, 점차 상점과 중화요리점 등으로 확대됐다.

한동안 전성기를 누리던 화교 상권은 1937년 중일전쟁에 패한 후 급속히 몰락하였다가 한국전쟁 때 그나마 간신히 유지하던 명맥마저도 거의 끊기고 말았다. 한국전쟁 당시 이 거리를 생생하게 그려낸 소설이 바로 오정희의 성장소설 <중국인 거리>다.

짜장면 값 강제 동결이 시행되고 나서 거의 아사 직전까지 내몰렸던 인천 차이나타운이 오랜 침체기를 벗고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인천시가 2000년에 중구를 관광특구로 지정하면서부터다. 인천이 중국 교류의 중심 도시가 되면서 이 지역의 역사성과 문화성이 재조명되었고, 그래서 새로운 관광 명소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답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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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체결된 한불조약으로 한국교회는 종교의 자유를 얻고,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활동이 공식화되었다.

1889년 7월 1일 빌렘신부가 인천에 파견되어 제물포교회(현 답동성당)를 창설하고 본격적으로 포교 활동을 시작한다. 빌렘신부는 병인박해를 피해 고잔 지역에 정착한 민종황 일가로부터 답동 언덕 일대의 부지를 기증받아 1890년 7월, 성당 건축 정초식을 갖고 건축했다.

지금의 모습은 1933년에 옛 성당건물을 보존하면서 외벽을 벽돌로 쌓아올려 1937년에 완공한 것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띠고 있다. 중앙의 탑상부와 양측 소탑의 상부에 뾰족돔을 얹은 외관이 아름답다.

 

 

내동교회

서양 종교는 인천에 와서 처음 뿌리를 내렸다. 1890년 9월 29일, 영국 해군 종군 신부였던 코프 주교(한국 이름 ‘고요한’)와 랜디스 박사가 인천에 선교사로 부임하면서 한국 최초의 성공회 교회가 탄생했다. 랜디스 박사는 인천에 첫 사설 병원을 개설하고 환자를 돌보다가 8년 만에 과로로 별세했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교회 한 편에는 그의 선행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교회 건물은 1902년에 러시아 영사관으로, 1904년부터 성공회 신학원으로 운영되었다. 한국전쟁 때 일부 훼손되었다가 1956년에 복원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교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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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화강암으로 외벽을 쌓은 중세풍의 석조 건물이 주변 빌라들 속에서 홀로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예배 외 시간에 내동교회를 방문하면 문이 잠겨 있는 경우가 있다. 이 때에는 따로 견학 요청을 하면 되니 그냥 돌아가는 우를 범하지 말길. 상당히 이국적인 외관도 인상적이지만 시간을 그대로 간직한 고풍스러운 내부도 아름답다.

 


글 최희영(<삼치거리 사람들> 저자), 김선미|사진 김연지, 조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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