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 부터 인문학 강의를 듣는 것을 좋아했는데, 특히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와 TVN에서 방영했던 '어쩌다 어른'이나 '책 읽어드립니다' 같은 프로를 즐겨봤다. 그리고 최근에 유튜브 체널'사피엔스'가 새로 개설되며 예전에 방영했던 강연들을 업로드 해주고 있다.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는 업로드된 영상 중 '강신주' 철학가의 강연이다.
나는 현재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항상 느끼는 것은 종교와 철학, 인문학 등 모든 진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개 죽음과도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프로이트의 방어기제나 종교의 등장, 철학의 의문들 모두 깊게 들어가면 죽음에 대한 불안을 다루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강연을 들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 철학가는 우리에게 죽음을 질문한다.
당신이 오늘 죽는다면, 오늘 뭘 할 것인가?
아주 유명한 CEO이자 개발자 스티븐 잡스는 생전에 항상 일어나면 자기 자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 동영상을 볼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죽음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고, 그렇기에 이 질문이 생소하고 암울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와동시에 꽤 파격적이었다.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잊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이 질문을 친구들에게도 꽤나 많이 물어보고 다녔었다. 왜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사람과 내가 어떤 차이점이 있었을지 궁금했다. 친구들은 거의 1.사랑하는사람과 시간을 보내거나 2.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하거나 3.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하겠다, 고 말했다. (그 외에 싫어하는 사람에게 복수하겠다는 답도 꽤 많았으나 이것은 이성을 갖춘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음으로 제외시켰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다 물어보고 난 후엔 사랑하는 우리 엄마에게 가 생각했던 것들을 털어놓았다. '엄마, 나는 내가 오늘 죽는 다면 온갖 디저트들을 다 먹어보고 싶어! 나한테 못된 말 했던 사람들한테 전화해서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래서 당신의 말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낱낱이 밝힌 다음 친구들을 한 번씩 안아주고 좋아했던 사람한테 날 찬거 후회하게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젠장! 하고 웃으면서 다시 이야기 해보고 싶어! ' 그러자 우리 엄마는 심리학을 정통한 사람답게 매우 부드럽고,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고 싶은 건 그게 끝이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
이제 하고싶은 걸 알았으니까 해보면 되겠네.
하고 너무 쉽게 말했다.
그때는 그 말을 듣고 싫다면서 방으로 도망을 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맞는 이야기지 싶다. 현대 사회로 부터 인간이 보호받으며 수명이 두 배 이상 늘었으나, 우리의 삶에선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죽음은 나이를 가리지 않으니 말이다. 스티븐 잡스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내가 오늘 죽는다면?'을 되뇌였고, 하루 하루 살아가며 후회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것이다. 우리는 매일을 후회로 점철된 채 살아간다. 그때 그 말 해볼걸, 그 놈 멱살 한 번 잡아볼걸, 조금 참아볼걸... 등등. 하지만 내가 오늘 당장 죽는다면? 일주일 후에 이 세상에 내 육신이 차갑게 식어 영혼 마져 사라진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싸우거나, 스스로를 학대하듯 몰아붙이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아니'다.
강신주 철학가는 죽음의 앞에서 인간은 착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 부모가, 친구가, 혹은 사랑하는 반려동물들이 죽고, 내 곁을 떠날때 우리는 착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들보다 오래 살기 때문에 그 순간 '나는 영원히 살아 갈 것'이라는 착각 말이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오늘 죽었는데, 내가 내일 죽을 것을 안다면 그 사람의 죽음이 그토록 슬퍼할까? 우리는 모두 죽는다. 우리가 한 철 벛꽃에 열광해 한강으로 몰려가는 것도, 가을이면 전어를 먹으러 떠나고, 겨울이면 사진기를 들고 여행을 떠나는 것도 이것들이 모두 '올해의 벛꽃' 이고, '올해의 전어'이고, '올해의, 21살의 나와 내 부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간과하고 있으나 우리는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한다.
그는 무상(無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른들이 어린아이를 사랑스러워 하고 애처로워 하는 것도 그들이 앞으로 살아가며 겪을 고통을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이 철없고 말갛게 웃는 시절이 곧 '사라질 것'이기에.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존재다. 육체는 늙었어도 우리의 이성만큼은 계속해서 성장한다. 그렇기에 많은 고통을 느끼고, 느끼고, 느낀다. 공생하지 못하기에 공감을 배우고,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이들의 고통과 기쁨을 공감하고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 고통을 많이 이해할 수록 성인이 된다고 한다.
'성인' ; 예수그리스도와 석가모니와 같은 이들은 모든 인간의 죽음에서 고통을 느끼고, 슬퍼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에게는 3가지 종류의 죽음이 있다고 말 했다.
1인칭의 죽음: 나의 죽음
2인칭의 죽음: 너의 죽음
3인칭의 죽음: 그들의 죽음
그리고 우리는 오직 '너'의 죽음에서만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인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성인의 삶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전쟁으로 죽어가는 이들이 모두 내 부모와 같이 소중할 것이고,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내 자식같을 것이고,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는 이들이 내 친구와 같을 것이다. 성인의 삶은 항상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매일을 잃는 삶. 그것이 행복할까?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안식, 편안하게 쉬는 것이라고 부른다. 성인들에게 있어 삶은 고통이고 죽음은 쉼이다. 그러니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목표가 죽음은 아니다. 그저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 죽음에 사로잡혀 안달복달하지 말고 그냥 두라는 것이다. 우리의 죽음은 예견된 것이다.
-올해 4월 25일에 찍은 벛꽃
나는 이 강연을 듣고 한참 멍하니 하늘을 봤다. 인간은 유한한 것들을 사랑한다. 한 철 피고 지는 꽃을 사랑하고, 새들의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매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설레한다. 그것은 그것들이 덧없이 사라져 버릴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나 자신을 사랑하지는 못하는 걸까?
나의 젊음도, 나의 늙음도, 나의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나의 모든것들은 유한하며 1초만 지나도 그 과거는 낡아버려 현재의 내가 아니다. 나만이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것이다. 나만이 내 세상의 유한한 삶이며, 그 자체인데 우리는 왜 항상 우리에게 혹독하게 굴며 타인에게 바라는 것 보다 많은 것을 요구할까?
나는 요즘 나 자신에게 상냥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명상을 하며 YES를 중얼거린다. 수용하는 것이다. '인정받고 싶어 하지 않아도 돼'가 아니라 '인정받고 싶어해도 돼'로, 내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여 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이미 충분히 혹독하다. 그러니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나 자신에게 만큼은 수용적인 말을 해주는 것이다.
세상은 가치판단이다. 사탕 하나에도 기쁘다면 기쁜것이고 그것이 포도맛이 아니라 짜증이 난다면 짜증이 나는 것이다. 타인에게 무례하지 않되, 내가 내 삶을 행복하게 꾸려나가는 것이야 말로 죽음이 같이 가져올 후회를 조금이나마 덜어내는 것이 아닐까.
코로나로 인해 몸도 마음도 서서히 식어가는 계절입니다. 오늘 하루도 잘 견딘 내게 잠자리에 들기 전 수고했단 따뜻한 말 한마디 건내보는건 어떨까요?
[글씨를 강조하거나 예쁘게 꾸미는 법] (https://steemit.com/hive-195521/@luciferjin/6rv2gq#)
항상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삶이 그저 즐거우면 좋을텐데, 나 혹은 타인 때문에 힘든 일이 더 많죠.
그래도 살아 있음에 감사한 일이 더 많은 게 사람 살이 같습니다.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들어도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하루하루 살아가야 할것 같네요^^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