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명동과 명나라와 임진왜란과 대명단

in hive-196917 •  4 years ago  (edited)

굳이 지금 찾아서 비교하기는 귀찮지만, 대구에서 가장 큰 동네는 내 멋대로 남구의 대명동이라고 믿고 있다. 예전에 대명1동부터 대명11동까지 나뉘었던 대명동이 지금은 9개동으로 통폐합 되었지만 여전히 대명11동은 남아있으므로 여전히 그리 믿고 있다.

아마 꽤 오래전부터 대명동은 대구에서 중요도가 높은 주거지역이었나보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이야기의 끝에서 윤복이가 사람들의 후원으로 얻게 된 집도 대명동이라고 했다.

대명동을 돌아다니다보면 지명유래에서 '명나라에서...'로 시작되는 부분을 종종 보게 된다. 궁금해서 찾아보면 기승전 두사충 이야기로 끝난다. 이여송의 1급 참모로 조선에 온 두사충은 병법과 풍수지리에 능했다고 한다. 풍수가 과학이던 시기였으니 풍수를 알아야 전술도 잘 쓰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우고 명나라로 돌아간 두사충은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조선에 오게 된다. 나라의 부름으로 이웃나라를 도우러 가는 기분이 즐거웠을지 아닐지 잘 모르겠다.


이번에는 진린의 부하장수가 되어, 아들도 데리고 온다. 전쟁이 끝나고 다들 명나라로 돌아갈 때,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등장을 예감했는지 그는 '소중화 문명국' 조선에 눌러앉아 살기로 결심힌다. 두사충은 조선에 귀화하면서 대구 중심의 땅을 받는다. 나름 첨단학문이던 풍수를 잘 알았기에 충무공 이순신의 묫자리도 봐줬고 고위층과의 교류도 두터웠다고 한다.

두사충은 대구 중심부의 여기저기를 몇 번 이사 후, 완전히 정착한 동네의 이름을 '대명'이라고 짓고는 뒷산에 '대명단'이라는 제단을 설치하여 매년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제사를 지내다가 자기가 미리 정해놓은 묫자리에 몸을 뉘이게 된다. 이제 대명단은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본인의 묫자리인 '모명재(慕明齋)'는 대구 수성구에 있으니 과연 풍수의 전문가 답다.


찾다보니 대명동, 대명단이라는 이름이 대구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경북 성주군 용암면에도 대명동마을이 있고 대명단이 있었다. 귀국하지 않은 명나라 장수를 읽어보니 조선에 파병왔다가 귀화한 명나라 사람인 시문용과 서학이라는 두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성주군 용암면은 지금 자차 운전으로 가도 모명재나 대구 남구 대명동에서는 60분 이상 운전해야 하는 거리다. 시문용(施文用)은 전쟁 중 몸을 다쳐 명나라까지 갈 수 없었고, 동료인 서학(徐鶴)은 의리상 시문용과 함께 남게 되었다. 디지털 난독증이 오려는지 아무리 읽어봐도 그들이 왜 여기에 정착했는지 명확한 이유는 없다.

시문용이 권력을 이용하여 무리한 토목공사를 하다가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죄로 추궁당하다가 겨우 사형을 면하고 성주군으로 숨어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인조 시기에 청나라의 간섭이 심해졌을 때, '조선에 살고 있는 명나라 장수들을 모두 잡아서 송환하라'는 요구를 피해 시문용이 성주군으로 숨어 들어가 정착했다는 내용도 있고, 당쟁과 사화에 얽혀 처형당할 위기에 갔다가 '재조지은' 타이틀로 목숨을 건져 시골로 추방되었다는 내용도 있다. 서학은 이름이 자주 나오지 않는걸로 보아 시문용의 곁가지로 조용히 살면서 그와 함께 다녔던 것 같다.

어쨌든, 그들은 성주군에 자리잡아 대명단(大明壇)에서 매년 향을 피우고 고향을 그리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성주 어딘가에 모명재(慕明齋)라는 이름의 무덤에 누웠겠지. 후손들은 명나라와는 관계없는 삶을 살면서도 선조들을 기리며 풍천재(風泉齋)라는 재실을 만들어 향을 피우고 살았을 것이다. 문득 내 지인과 친척들을 통틀어 성주의 절강 서씨(浙江 徐氏)와 절강 시씨(浙江 施氏)가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날씨 좋은 봄날에 어디 갈 곳 없나 찾아보다가 풍천재와 대명단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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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명나라가 까마득한 과거인만큼, 풍천재와 대명단도 스산했다. 차로 풍천재를 찾아가는 길은 애매하고 외진 길이었고, 풍천재에서 대명단으로 걸어올라가는 길은 지워진 등산로였다. 구멍뚫린 채 너덜거리는 풍천재의 문창호지와 휴대폰 나침반으로 방향을 수시로 확인해도 눈에 띄지 않는 대명단은 관리가 된 듯, 되지 않은 듯 애매한 느낌이었다. 그만큼 나도 재미있는 듯, 지겨운 듯 애매한 느낌의 나들이를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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