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재규입니다.
어제 '살인의 추억'의 진범인 이춘재의 법정 증언이 화제였습니다. 제가 태어날 즈음에 벌어진 일이라 이춘재의 연쇄살인 사건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합니다. 2003년 개봉한 '살인의 추억' 영화를 통해 이 사건을 처음 알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제게도 저 나름의 '살인의 추억'이 있습니다. 2006~7년에 벌어진 강호순 연쇄살인 사건입니다.
당시 저는 경기도 남부의 한 경찰서에서 의경으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경기 남부에 여성들이 연쇄적으로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저와 동료 의경들은 수색작업에 대대적으로 동원됐습니다.
강호순의 살인은 2006년 9월부터 2007년 1월까지 6차례 일어났는데, 저는 2007년 봄 정도부터 수색작업에 나섰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와 부대원들은 당시 상당히 긴장한 상태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수원에서 조폭간의 칼부림 사건이 있었고, 그때도 의경들이 수색작업에 동원됐습니다.
의경은 보통 시위 진압과 관련된 경비과, 순찰업무와 관련된 생활안전과와 함께 일합니다. 하지만 조폭 수색작업에서 처음으로 저희는 형사과 형사로부터 임무지시를 받게 됩니다.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형사 한 분이 기억납니다. 다리 한쪽을 약간 절고 계셨는데, 조폭과 몸싸움을 하다가 다치셨다고 합니다. 진짜인지 아니면 의경 대원들에게 긴장감을 주기 위해 농담한 것인지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형사과 형사들은 우리에게 용의자들의 사진과 신원사항 등이 적힌 종이를 나눠줬습니다. 기록된 내용은 생각보다 자세했습니다. 생년월일, 출생지, 가족관계, 소유차량의 사진과 차량 번호는 물론이고 이 사람들이 어떤 경위로 조폭이 되었는지도 자세히 적혀 있었습니다. 특히 하위 조직원들은 의경들과 비슷한 나이였습니다. 형사들은 조폭 조직의 하위 조직원의 구체적인 신상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위에 언급했던 40대 형사는 우리들에게 안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만에 하나 용의자들을 발견하더라도 검거할 생각은 하지 말고 그냥 무전으로 알리기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용의자들은 진짜로 사시미칼을 갖고 다니는 놈들이라서 총기를 휴대하지 못하는 의경들이 섣불리 덤비면 크게 다칠 수 있다며 자신의 다리를 가리켰습니다.
저희는 수원 곳곳의 교통 요지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수색을 했지만 결국 용의자를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경찰들이 이미 다른 용의자들을 붙잡아서 재판에 넘겼다고 합니다.
다시 강호순 사건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수원 조폭 사건이 어느정도 마무리 된 이후, 우리는 다시 형사과에 불려갔습니다. 이번 사건은 조폭 칼부림이 아니라 연쇄살인이라는 것입니다. 조폭 사건 때는 약간 농담기 있게 말씀하시던 형사분들도 이번에는 웃음기를 싹 빼고 브리핑을 했습니다. 이번 사건 용의자는(당시에는 강호순이라는 구체적인 인물이 특정되지 않았음) 조폭과 달리 마음먹고 사람을 죽인 살인자이기 때문에 의경들이 직접 검거 작전에 투입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용의자의 신상으로 추정되는 몇 가지는 브리핑 때 들었던 거 같습니다. 당시만 해도 강호순에 대한 단서가 별로 없어서인지 구체적인 정보를 들었던 것은 아니었고, 아마 눈앞에서 강호순이 지나갔어도 몰랐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형사 분들은 만에 하나라도 용의자를 알아보더라도 못본 척 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돌발행동을 벌일 지 모르는 놈이니 무전기만 조용히 누르고 상대에게 '내가 널 알아봤다'는 낌새도 절대 주면 안된다고 진지한 톤으로 말했습니다.
의경들이 투입된 '수색' 작전은 실종자 수색 작전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강호순 사건은 '살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노래방 도우미 3명, 회사원 1명, 대학생 1명이 실종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실종자들의 가족이 수원, 화성 일대에서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형사들은 어느정도 연쇄살인사건으로 보고 있었던 듯 합니다.
형사들의 브리핑은 이어졌습니다. 실종자들은 총 5명으로, 거주지는 어디고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은 어딘지, 실종자들의 핸드폰이 마지막으로 꺼진 곳은 어딘지 등등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핸드폰이 꺼진 곳 일대의 산지를 주로 수색했습니다. 대놓고 시체를 찾으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던 것 같으나, 풀이 덮여 있는 곳이나 농수로 같은 곳도 두번씩 체크하라는 지시도 있었습니다. 물론 저희는 시체를 찾으라는 이야기로 이해했습니다.
실종자들의 핸드폰이 마지막으로 잡힌 곳은 보통 교외의 산지였는데, 개농장, 사슴농장 같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농장 안은 법적 분쟁이 우려되기에 수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초반에는 의욕적으로 농장 근처까지 샅샅이 뒤지고 농장 안도 최대한 살펴봤던 기억이 납니다.
수색 초반에는 나름의 성과(?)도 있었습니다. 수색하면서 혹시나 수사에 도움이 될수도 있는 물건을 발견하면 전부 증거품 수집용 비닐봉투에 별도로 넣으라고 했습니다. 실종자들의 신원을 알고 있었기에, 실종자 나이대의 여성들이 쓸만한 물건이나 옷가지를 발견하면 비닐봉투에 잔뜩 넣었던 기억도 납니다. 한번은 다른 소대에서 사람의 팔 혹은 다리뼈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개다리뼈였는데 실제로 사람뼈를 본 적이 없는 의경들이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수색은 점점 형식적으로 변해갑니다. 날도 점점 더워져 가던 참이었습니다. 농장 주변을 수색할 때 농장주들이 경찰관에게 항의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이 때문인지 수색지역에 농장이 있으면 지휘관들이 '저쪽은 대충만 훑어보고 지나가자'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너무 날씨가 더운 날에는 그냥 일렬로 쭉 늘어서서 걸어가면서 눈대중으로 살펴본 것으로 '수색'을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수색을 마치고 의경버스에 들어와 에어컨을 쐬는 것이 나름의 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인근 민가에서 '에어컨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112 신고를 해서 가장 약하게 틀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성과 없는 수색, 더운 날씨, 민원으로 인해서 에어컨을 틀지 못하는 상황 등이 겹쳐져 점점 수색은 형식적으로 변해갔던 것 같습니다.
어느새 여름을 지나 가을에 접어들었습니다. 강호순도 2007년 1월 이후 추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이미 언론에 떠들석하게 연쇄 실종사건 보도가 나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매일 나가던 수색도 일주일에 3회, 2회로 줄어들더니 언젠가부터는 아예 수색이 일정에서 빠지게 됐습니다.
저희는 다시 평소처럼 시위진압을 나가고 시내 순찰을 나가는 생활로 돌아왔습니다. 딱 이맘때였을겁니다. 슬슬 날씨가 추워지던 11월, 저는 후임 대원과 함께 수원역 일대를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담당지역이 수원역 건너편이었는데 이곳은 그때나 지금이나 '성매매 집결지'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순찰이라는 명목도 있고 호기심도 있고 해서 후임과 함께 그쪽을 지나가보기로 했습니다.
성매매집결지의 입구에 도착하자 어떤 아저씨가 저희 쪽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는 '이것 좀 꼭 봐주세요'라며 전단지를 한 장씩 줬습니다. 전단지에는 연쇄 실종사건의 당사자인 ㄱ씨의 사진이 붙어 있었습니다. ㄱ씨의 평소 모습, 긴머리였을 때 단발이었을 때 등 다양한 사진이 붙어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경찰 분들 제발 저희 딸 꼭 좀 찾아주세요. 부탁합니다'라며 연신 저희에게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실종자들은 수원역 인근에서 실종되지 않았습니다. 휴대폰 GDP 추적 결과도 교외 지역으로 나왔지 시내로 나온 적은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저씨께는 '저희가 열심히 수색을 하고 있다. 전단지 뿌리는걸 저희가 도와드릴 순 없지만 수원역 앞에서 하시면 훨씬 사람이 많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아저씨의 대답이 참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딸이 실종된 이후 생업도 제쳐두고 수원, 화성, 군포 등지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곳에 매일같이 나가서 전단지를 뿌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전단지를 뿌려도 딸을 봤다는 제보전화 한 통이 없고, 경찰에서도 점점 수색인력을 줄인다는 소식에 그는 절망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거의 마지막 시도로 그는 이 성매매 집결지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딸이 이곳에 잡혀와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서라도 딸을 발견할 수 있다면 자신은 그 가게 포주에게 절이라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실종자 아버지는 이런 절절한 마음으로 성매매 집결지를 찾았는데 호기심이란 이유로 성매매 집결지를 '순찰'하겠다고 한 자신이 매우 부끄러워졌습니다.
아저씨는 저희에게 인사를 마치고 집결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가게 앞에 서 있는 젊은 여성이나 가게 앞을 어슬렁거리는 덩치 좋은 남성 가리지 않고 그는 전단지를 돌렸습니다. 처음에는 진짜 살인범을 만날 수도 있다는 긴장감에 수색을 시작했으나, 날이 더워지면서 이핑계 저핑계로 수색은 형식적으로 변질됐습니다. 급기야는 그마저도 하지 않고 저와 다른 부대원들은 '시위진압'과 '순찰'이라는 일상생활 속에서 반정도 실종 사건을 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잊지 않았습니다. 의경들에겐 '이미 지나간 사건'에 불과했지만 가족들에게는 실종자의 생사를 확인할 때까지 지나갈 수 없는 인생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복무를 마친 뒤 수원과 군포에서 또다시 실종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 이어 용의자 강호순이 잡혔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후 언론기사 등을 보니 실종자들의 시체가 훼손된 채 암매장된 사실도 밝혀진 모양입니다. 그때 전단지를 돌리시던 그 아저씨는 강호순이 체포된 이후 지난 10년간 어떤 삶을 살아 오셨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그나마 진범이 잡히고 딸의 생사가 확인되어서 다행일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딸을 그리워하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계실지,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영역이 아닌가 싶습니다.
몇달 전 한국일보 경찰팀이 33년만의 진범이란 책을 펴냈습니다.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자세히 다룬 기록물입니다. 언젠간 강호순 사건에 관해서도 이런 기록물이 나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