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 <나의 아저씨>를 보고

in hive-196917 •  5 years ago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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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의 문화 콘텐츠는, 특히 드라마들의 경우는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느냐 없느냐’로 확연히 구분된다. 기본적으로 ‘본방사수’ 체질이 아니고 굳이 드라마를 다운받아 볼만한 열정도 부족한지라 남들이 아무리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드라마라도 ‘그런가 보다’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런데 넷플릭스의 축복이 내리사 클릭만 하면 착착 정주행이 가능하니 웅장한 뒷북일망정 넷플릭스판 드라마들을 섭렵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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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저씨>는 그 중 극강의 콘텐츠였다. 방송하기도 전에 ‘롤리타 콤플렉스’까지 들먹이며 험한 평들을 쏟아져서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껏 외면했던 콘텐츠였는데 (이래서 안본 사람이 꽤 되더라) 회사 직원들이 ‘인생작’이라고 엄지를 곧추세우는 바람에 한 번 들여다볼까 클릭을 했는데 그예 숨돌릴 틈도 없는 정주행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아내가 정신 나갔네 나갔어 혀를 찰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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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톨스토이의 동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떠올렸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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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속에서 어린 아이들에게서 어머니의 생명을 거두는 잔인한 임무를 맡은 천사 미하일은 그를 주저하다가 날개를 잃고 인간세상으로 떨어진다. 하느님이 미하일에게 세 가지 질문의 답을 얻을 때까지 사람들과 함께 있으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둘째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셋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미하일은 인간 세상에서 그 답을 얻을 때마다 한 번씩 웃었고 세 번 환하게 웃었을 때 날개를 되찾고 하늘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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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은 땅에 떨어졌을 때 그냥 알몸뚱이였다. 그 앞을 지나는 제화공 세미욘의 도움을 받으며 그 일을 도우며 함께 지내게 되지만 사실 천사로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막막하고 암울해 보이는, 하지만 ‘부장님’이자 ‘아저씨’의 휴대폰에 도청기를 심어두고 그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만나가는 아이유 이지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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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 속에서 아이유는 이를 드러내고 웃은 적이 거의 없다. 미소를 보이는 자체가 사건이었던 톨스토이 동화 속의 미하일처럼. 냉소나 비웃음은 수시로 흘리지만 기분이 좋아서, 흐뭇해서, 따뜻한 마음으로 입술을 벌리는 장면은 좀체 보이지 않았다. 아이유가 드라마를 찍으면서 우울증에 걸릴 뻔 했다더니 그 토로가 이해가 갔다. 보는 내가 우울증 구경을 할 지경인데 오죽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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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 이지안은 그 짧고 드문 웃음을 통해서, <나의 아저씨>는 그 끈적하고 구성진 스토리 속에서 나에게 세 가지의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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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아저씨 박동훈은 파견직 이지안을 뽑은 이유로 특기란에 써 놓은 ‘달리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내력이 세 보였다나. 그런데 특기라니 100미터 몇 초에 뛰었냐고 묻자 이지안은 기억이 없다고 한다. 그게 무슨 특기냐고 툴툴거리자 이지안은 이렇게 말한다.
“달릴 때는 내가 없어져요. 근데... 그게 진짜 나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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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사람들은 항상 ‘달린다’ 술 마시면서 ‘달리고’ 오늘도 “힘껏 뜁시다 파이팅” 하고 달리고 “오빠 달려” 해서 달린다. 그 달리기 속에서 우리는 종종 우리 안의 것들을 잃어버린다. 숨이 턱에 달리게 한 이유는 분명히 있지만 달리면서 이유를 잃어버리고 그저 달리고 있을 뿐인 우리를 발견한다. 그런데 그 정처 없고 개념 없는 모습이 오히려 반갑다.

주인공들이 살아가는 후계라는 가상의 동네 사람들, 그리고 주인공 ‘아저씨’의 형제들은 죄다 어딘가 하나가 망가진 사람들이다. 은행 부행장 하다가 모텔 수건 가는 중년, 대기업 다니다가 잘려서 딸 결혼 축의금 훔치는 아버지에 한때 천재 소리 듣던 영화 감독이었지만 지금은 툭하면 벌컥하는 백수 동생. 번듯해 보이는 주인공 아저씨 부장님조차 “엄청 괜찮은” 사람임에 분명하지만 자신의 어릴 적 바운더리인 후계와 ‘징글징글한 3형제’를 벗어나지 못해서 아내의 불만을 사고 결국 오쟁이 진 남편이 된다. 하다못해 후계를 벗어나 주인공들의 회사 직원들로 등장하는 이들도 다 밉상 하나씩은 작렬한다. 저마다의 상처와 콤플렉스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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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도 그렇다. 어려서 부모 잃고 어머니 빚 때문에 사채업자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할머니를 폭행하는 사채업자를 칼로 찔러 죽인 이지안, 정당방위로 무죄를 받긴 했지만 옛 친구인 사채업자의 아들로부터 또 징글징글한 폭력을 당하며 빚독촉을 받으며 살아가는 아이유만큼의 무게는 아니더라도 아픔이 있고 욕망이 이글거리고 콤플렉스가 번들거린다.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그리고 헛기침으로, 거드름으로 또는 돈푼이나 권력 쪼가리로, 그리고 바쁜 일상이라는 핑계에 묻고 살아갈 뿐. 그저 ‘달리면서’ 잊을 뿐. 그리고 달리면서 ‘없어진’ , 즉 희미해지고 윤곽조차 없어져 버린 나를 다시 발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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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릴 때는 내가 없어져요. 근데... 그게 진짜 나 같아요.” 이 대사를 친 잠시 뒤 아이유 이지안은 살풋 미소를 짓는다. 극중 내가 처음 본 미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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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드라마의 결말이 먼저 나와야겠다. 폭풍같은 사건들이 대충 마무리되고 이지안은 새 인생을 찾고 아저씨 역시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그러다가 둘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고 화사한 웃음과 함께 정겨운 악수를 나눈다. 이지안의 이름은 이를 지(至)에 편안할 안(安) 그녀의 인생 목표와도 같은 이름이었다. 엇갈려 걸어가는 얼굴들 위로 텔레파시 같은 나레이션이 깔린다. “편안함에 이르렀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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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다. 거기까지 이른 것은 다행이지만 인간에게 편안함이란, 행복이란, 심지어 사랑이란 마침내 ‘이르러 기뻐하는’ 도달점이 아니라 끝없이 ‘달리는’ 과정을 얘기할 뿐이라고. 드라마 속 지안은 네 대답하며 미소를 머금지만 나에게는 그 미소가 이룬 이의 족함보다는 무언가를 향해 ‘달릴’ 힘이 생긴 이의 자신감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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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있게 웃었지만 아내 미국으로 보내고 홀아비 생활을 하며 무너져 내리기도 하는 아저씨나 끝내 사랑으로 이어지지 못한 여배우와의 사랑에 애달파하는 전직 영화감독이자 청소업체 부사장(?)이나 수십년 닳고 닳은 사랑의 마음을 “윤상원은 우리의 추억이다.”는 애처로운 목청돋움으로 정리하는 ‘정희네’ 사장이나..... 편안함을 누릴지언정 편안함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편안함에 이르지는 못한다. 이지안이 아저씨 박동훈에게 쏘아부였던 말처럼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꾸역꾸역”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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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에서 완성이 어디 있으며 종착은 삶이 아니라 죽음일 뿐이다. 하지만 무기징역 가운데에서도 즐거움은 있고 편안함은 끼어드는 법이니, 그를 누릴 뿐이다. 편안함에 도달했다며 웃는 이지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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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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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 역시 일종의 판타지다. ”후계 후계 비우게“ 하며 허구헌날 술 먹고, 저렇게 친형제 동기들처럼 학연 혈연 지연 얽혀살고 그 안의 사람이라면 곁을 떠나기 싫어하고 상처입은 영혼 이지안이 ”다시 태어나면 이 동네에서 태어나고 싶어요.“라고 토로하는 후계동, 투닥거리기는 하지만 모난 사람 없고 다들 못난 것 같지만 다른 사람 일에 자기 일처럼 나서는 인간들이 떼로 등장하는 후계는 분명 판타지였다. 하지만 판타지와 이데아는 때로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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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드라마에서 ‘징글징글한 3형제’ 중의 맏형에 감정이 많이 이입됐다. 맏형이 장동건쯤이었으면 더 완벽하게 이입됐겠지만 배우 박호산으로도 넉넉히 이입이 가능했다. 찌질하고 무능한, 회사에서 잘린 뒤엔 뭐 할 것도 없고 아내에게는 구박의 샌드백이고, 잘하는 일이라고는 술 마시는 일 밖에 없고, 막내동생하고 투닥거리기나 하는. 그래서 어머니에게 늘상 ‘썅놈의 새끼’ 욕이나 듣는 한심하면서 고단한 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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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3형제가 라이방 쓰고 빨간 렌트카 몰고 어디론가 떠나는 로망을 위해 돈을 몰래 (그런데 사람들은 다 안다) 모은다. 그런데 이지안의 할머니의 썰렁한 빈소를 보고서 그는 그 돈을 후계 조기 축구회 사람들의 이름을 죄다 적어 놓은 화환 배달에 써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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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고 허다한 명장면을 놔두고 나는 그 장면에서 눈물이 났다. 솔직히 아저씨 박동훈만큼 반듯하고 괜찮은 사람일 자신은 없지만 저 사람 정도의 선의는 베풀어 보고 싶고, 또 그럴 수 있겠다는, 한 번 정말 저 정도는 해 보고 싶다는, 별로 내 안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선의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장례식 후 맏형은 이지안에게, 이지안은 맏형에게 서로 인사한다. “기똥찬 하루”를 보냈다고. 그 말에도 또 한 번 뭉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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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안에게 죽음을 당한 사채업자의 아들. 무던히도 이지안을 괴롭히던 그는 원래 아버지를 막아서다가 두들겨 맞기도 했던 이지안의 옛 친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녹음 파일 중 이지안이 자신을 두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원래 착한 아이였다”라는 담담한 목소리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리고 이지안을 위한 결정적 증거를 제공하고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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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많다.” 입버릇처럼 해 온 말이다. “그래야 세상이 돌아간다.”고. 판타지라고 눙쳐 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런 좋은 사람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을 보여 주고 내 속에 잠자던 선의를 깨워 준 것으로 이 드라마에 감사한다. 누군가에게 “나랑 친한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감격스러워하는 이지안. 그런데 여기서 ‘그런’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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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꿔 온 것은 대개 선한 부류가 아니었다. 욕망과 증오, 사악함과 집착도 세상을 바꿨다. 그 이전과 그 이후를 갈라 놓았다. 하지만 세상을 밝게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의 선의 뿐이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하는 건 어렵겠지만 미워하는 마음을 조금 줄이고 약간 더 아끼지 않고 사랑을 주고 선의를 베푼다면 백만 송이 꽃은 몰라도 못ㄷ핀 꽃 한 송이 정도는 피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지구를 아름다운 별나라로 만드는 수 한 땀 정도는 놓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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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동 아저씨들의 왁자지껄 속에서 이지안이 살짝 웃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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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도 인생작이었습니다.
이 작품으로 아이유 팬이 되었습니다.

연기 그렇게 잘하는지 정말 몰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