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이성이 더 이상 중심이 되지 않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경험과 체험이 없이 그리고 가슴을 울리고 뜨겁게 만드는 무언가가 없이는 개개인에게 와닿지 않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종교는 그 중 기독교는 더욱 그렇다.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 종교로 공인되고 5세기에 국교가 된 이후 기득권과 사회 기강을 지키기위한 율법과, 교리들로 범벅이 되었을 때 대다수의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민중들과 계급사회에서 노예의 신분이었던 이들, 여성이나 어린이들 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기독교가 말하는 성령의 은혜가 결코 자기 이야기가 될 수 없었다.
은혜는 '사건'이다. 그러나 은혜가 사건이 되려면 '자기화' 가 전제되어야 한다. 즉 은혜라는 것은 체험이 없이는 절대 임하지 않는다. '자기의 경험' '자신만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오늘날 전 세계로 부흥한 성령운동의 시초인 애주사 스트리트 부흥 운동 역시 교리나 율법, 혹은 사회나 종교가 요구하는 경건성에서 해방 되고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자유의 기쁨을 마음 껏 누렸을 때 실로 성령의 임재가 그곳에 있던 인종 차별의 피해자인 흑인들과, 하인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체험되어 졌다.
당시 애주사 길거리 성령운동 교인들은 형식에 맞춰진 딱딱하고, 논리 정연하고, 신학적으로 전문화 된 기도가 아닌 마음(영)으로 부터 나오는 기도를 했다. 즉 방언은 감격에 겨워 인간의 언어로 조차 표현하기 어려운 나머지 무아적 표현을 하는 것이었고 또 성령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꿈을 꾸고 환상을 보았으며 병든자들을 치유했고 격렬한 몸놀림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 원초적인 영적 체험은 시대가 요구하는 경견성에 충족하는 사람들만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성령은혜'를 실제로 대다수의 가난하거나 평범하거나 차별받고 억압받았던 사람들에게 그들의 체험이자 은혜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성령운동 교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는 믿음, 고달프고 억울한 현재의 삶을 완전히 뒤집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왕국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종말론적인 그들의 원초적 희망은 방언을하고 환상을 보는 성령운동 교인들의 체험을 통해 벌써 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어 진 것으로 여겨졌다.
성령의 체험이 자기 이야기가 되지 않는 다면 그것이 대체 무슨 소용일까? 로마에 의해 권력을 얻게 된 기독교는 여성과 노예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경건을 명분으로 절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가치나 덕목이라도 그것이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이바지 한다면, 나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는 영의 울림이라면 그것은 과연 진짜 아름다운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이탈리아의 성령운동의 주역인 여성들이 마녀라는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아니 어쩌면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그러한 별명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아버지성이 아닌 하나님의 어머니성을 찾아내어 그들의 신앙을 지킨 것,
브라질의 노동당원인 베데니타에게 성령이 브라질 민중들의 실존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어갈 근거를 허락한 것,
일본의 식민과 한 민족이 갈라지는 아픈 전쟁을 경험한 한국이 근대화를 맞이하며 국가나 기업이 국민들에게 행하는 폭력이 합법이었을때, 아시아 특유의 무속적 영성과 합쳐진 기독교와 민중신학이 성장을 이룬 것,
토속적 종교의 전통으로 자연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던 아프리카 사람들이 제국 국가들의 무분별한 개발 앞에 저항하며 자신들의 토속 영성과 기독교를 합쳐 또 다른 성령운동을 만든 것,
이것들이 바로 그들만의 배경과 그 시대에서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난과 바로 앞에 맞닥드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령임재라는 자신들의 체험을 경험한 위대한 사건들이다.
우리는 이처럼 위대한 자기체험을 했던, 성령의 은혜를 받았던 역사들을 읽고 스스로에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종교는 어떠한가? 기독교는 어떠한가? 어떤 시대적 아픔과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고 또 '누구'의 언어로 신앙과 신학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안타깝게도 시대를 이끌어왔던 기독교 사례 중 대다수는 역사적으로 늘 적(혐오할 대상)을 만들어오면서 또 경건이라는 것을 민중들에게만 강조하면서 수 많은 희생을 지켜만 보며 자신들의 가치를 지켜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