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극복의 리더십 : 카밀루스 (1)

in kr •  6 years ago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위기 극복의 리더십 : 카밀루스 (1)


망할 수 없는 사업인 물장사가 망해버린 진로그룹은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려움을 보여준 대표적 경우였다.

창업보다도 어려운 일이 수성이라고 한다. 카밀루스(출생연도 미상~BC 365년)는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하고서 이 어렵다는 수성에 성공함과 아울러 사실상의 창업과 마찬가지인 재건까지 훌륭하게 이뤄낸 인물이었다. 로마인들이 그에게 ‘제2의 창건자’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을 붙여준 이유다.

카밀루스의 이력은 대단히 화려했다. 그는 독재관(딕타토르) 자리에 다섯 번 올랐고, 개선행진을 네 차례씩이나 거행했다. 이외에도 여러 높고 낮은 벼슬을 역임하면서 탁월한 업적들을 수없이 남겼다. 카밀루스와 인연이 없는 자리는 딱 한 개뿐이었다. 문제는 하필이면 그 자리가 로마의 대표적 관직인 집정관이었다는 점이었다.

집정관을 해보지 못했으니 그는 무관의 제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소속팀이 우승컵을 거머쥐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면서도 정작 본인이 MVP는 차지하지 못한 셈이었다. 그가 조국을 위해 빛나고 위대한 헌신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집정관에 오르지 못한 원인은 로마의 정치적 환경에 있었다. 원로원과 사사건건 의견대립을 보여 온 평민들은 귀족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카밀루스의 집정관 취임을 한사코 반대했다. 그들은 카밀루스가 집정관과 동등한 지위와 권한을 가졌지만 정원이 6명인 까닭에 권력이 덜 집중되기 마련인 군사 호민관에 선출되는 것만을 용인하려 했다.

카밀루스가 쌓은 업적과 명성이 최고조에 다다른 시점은 그가 군사 호민관으로 맹활약할 무렵이었다. 따라서 결심만 한다면 카밀루스는 호민관 선거에 출마가 가능했다. 그렇지만 그는 백성들의 뜻에 반해 출마를 강행하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주어진 자리에서 조국에 봉사하는 데 만족했다. 이러한 겸손한 태도 덕분에 카밀루스는 동포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사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권위와 통솔력을 꾸준히 강화해나갈 수 있었다.

그가 태어난 푸리우스 집안은 전통의 명문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출세는 스스로의 노력과 성취에 힘입어 바가 컸다. 카밀루스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독재관 포스투미우스 투베르투스를 보좌해 인근 부족들과의 전쟁터에 종군하면서부터였다. 기병으로 출전한 그는 적군이 쏜 화살이 허벅지에 박힌 상태에서도 가장 용맹한 적병을 쓰러뜨림으로써 로마군이 대승을 거두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전장에서 보여준 용기와 무훈을 인정받아 당시 매우 명예로운 직위로 손꼽히던 감찰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감찰관으로 일하면서 두 가지 대표적 업적을 남겼다.

첫째는 독신으로 지내는 남성들과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여인들 간의 결혼을 주선한 일이었다. 독신 남성의 대부분은 자유로운 삶을 즐기고 싶어 하는 젊은 총각이었을 터이므로 그들은 연상의 미망인과의 결혼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카밀루스는 남자 측에 벌금을 물리면서까지 혼사를 밀어붙임으로써 로마 사회의 안정에 기여했다.

둘째는 고아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한 일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나라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은 고아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카밀루스가 세금을 부과한 고아들은 우리가 동화에 나오는 성냥팔이 소녀와 같은 딱한 처지의 소년소녀들이 아니라 흥청망청하면서 사회공동체에 해만 끼치고 다니는 한국의 재벌 2~3세들 같은 자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부유하고 방탕한 고아들에게 세금을 물린 이유는 단순히 도덕적 징치에만 있지 않았다, 로마는 전쟁과 정복을 국시로 해서 탄생한 나라답게 거의 항상 전시상태 아래 놓여 있었다. 계속되는 군사작전은 국가예산을 늘 빠듯하게 만들었다.

로마에 특히 커다란 경제적 부담을 준 것은 베이이에 대한 장기간의 포위공격이었다. 베이이는 로마에게는 에트루리아 지방으로 진출할 교두보가 될 수 있는 곳이었고, 반대로 에트루리아 사람들에는 로마인들의 침략을 막아주는 전초기지와도 같은 도시였다. 그즈음 힘과 위세가 예전만 못하기는 했을지언정 베이이는 무력과 문화 양면에 걸쳐서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은 도시였다. 로마를 상대로 야전에서의 정면대결에서는 승산이 적다고 판단한 베이이는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높고 튼튼하게 새로이 쌓은 다음 성내에 식량과 무기를 대량으로 비축해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공성전을 펴는 로마에게도, 농성체제에 들어간 베이이에게도 길고 힘든 싸움이었다. 이때까지 로마인들은 여름이 시작되면 단기간의 원정을 떠났다가, 겨울은 고국에서 나는 식으로 전쟁을 치러왔다. 베이이 전역은 로마인들이 고향을 벗어나 다른 나라 영토에서 월동을 하며 전투를 이어나간 최초의 전쟁으로 기록됐다. 호민관들이 주도해 내린 이러한 결정은 커다란 반발을 불러왔다. 원정군 전체의 기강과 전의가 무너져 내릴 지경이었다. 로마인들은 위기를 수습할 구원투수로 카밀루스를 내세웠다. 그의 첫 번째 구원 등판이었다.

지휘권을 넘겨받은 카밀루스는 군대의 사기를 올릴 수 있는 방도를 모색했다. 그가 강구한 방책은 손쉬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만만한 적들을 찾아내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제비뽑기에 의한 임무 할당은 이를 위한 좋은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이 조삼모사식의 전략이 꽤 쏠쏠한 효과를 거두었는지 호민관들을 몰아냈던 불온한 공기는 카밀루스가 군대를 통솔한 다음 깨끗이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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