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0월 1일 국군은 38선을 돌파한다. UN군도 뒤를 이었다. 북진통일의 우렁찬 함성이 울려퍼졌고 가을 단풍이 채 지지 않았을 10월 26일 국군 6사단은 압록강변에 도달해 있었다. 그렇게 북진은 쾌속이었지만 뒤이은 후퇴는 그에 못지않게 빨랐다. 북진에 눈이 어두워 앞뒤 가리지 않고 압록강 두만강을 향해 달려가던 국군과 UN군의 뒤를 중공군은 모질게 후려쳤고 국군과 UN군은 괴멸적 타격을 입고 후퇴한다.
함경도 지역의 경우 더 형편이 좋지 않았다. 흥남은 일종의 덩케르크 (2차대전 당시 나찌에 패한 영국군의 마지막 탈출지)였다. 흥남에서 육로로 남쪽으로 가는 길은 애시당초 중공군에 막혀 버렸다. 중공군에 포위된 흥남에는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미 해병대와 미 10군단, 그리고 한국군들과 무수한 군 장비들이 몰려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막대하고 처치곤란의 존재가 흥남부두에 밀려와 있었다. 그들은 피난민들이었다. 미군 수송 함대가 바다에 떠 있었지만, 그들은 군인과 군용 장비만 실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을 뿐, 피난민은 염두에 두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기서 두 명의 한국인의 이름이 등장한다. 백선엽의 출신 부대로 이름 높은 간도 특설대 출신인 1군단장 김백일과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의 고문 현봉학이다. 이들은 피난민들을 놓고 갈 수 없다고 알몬드를 설득했고 심지어 김백일은 “피난민들을 데리고 가라. 국군은 걸어서 철수하겠다”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들의 노력 때문이었건 부두에 들끓는 피난민들의 참상 때문이었건 결국 미군은 매우 인도적인 결정을 내린다. 군 장비를 버리고 그 자리에 피난민을 싣기로 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했던 배는 화물선 메레디스 빅토리 호였다. 이 배는 2차대전 때도 사용된 화물선이었는데 화물선의 특성상 정원은 60여명이었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다. 남은 정원은 13명. 하늘이 무너져도 2000명 이상은 못 싣는다고 했다. 그러나 선장 레너드 라루가 실려 있던 화물과 무기를 버리고 피난민을 수용하리라는 결심을 한 뒤 그 배에는 무려 1만4000여 명의 피난민이 올라탄다.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을 태우기 위해 피난민들도 짐을 버렸다. 선장 라루는 부르짖었다. “버릴 수 있는 건 모두 버려라. 태울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태워라.” 17세기의 노예선도 한 사람이 누울 자리를 계산하고 노예를 태웠다. 하지만 이 메레디스 빅토리 호에는 한 사람이 앉을 자리조차 변변치 않았다. 7600톤 규모의 배에 1만4000명이 들어찼으니 오죽했을까. 물도 음식도 화장실도 없었다. 통제할 사람도 없는 아비규환이 벌어졌고 선원들은 어떻게든 피난민들을 돌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 사이에서 절망적인 폭동이 일어날 공기가 형성됐고 어찌어찌 부산항에 이르렀으나 입항이 거부된다. 이미 피난민들로 포화 상태였던 부산은 도저히 수만 명의 피난민을 떠안기 어려웠겠으나 육지를 앞에 두고 뱃머리를 돌리는 메레디스 빅토리 호 안의 피난민들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전쟁 통에 정든 고향을 떠나 듣도보도 못한 남쪽 바다를 헤매야 했던 15만의 북도 사람들. 그들을 우리는 ‘피난민’이라 부르지만 줄여 말하면 곧 ‘난민’(難民)이다.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정든 터전을 떠나 낯선 곳에 삶을 의탁해야 했던 사람들이다.
깊은 물 속에 빠진듯 허우적대던 이 난민들에게 그나마 박차고 수면 위로 떠오를 디딤돌이 돼 준 곳은 거제도였다.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긴 하지만 전쟁 전 인구는 10만이 채 안되는 섬이었다. 그런데 전쟁 중 몰려든 피난민의 수는 15만 명이었다. 그 막대한 인구가 거제도에 밀어닥쳤으니 알력이 생길 법도 하건만 거제도 사람들은 땅을 내 주고 미역을 나눠 주고 입던 옷을 건네며 피난민들을 맞았다. 모진 사람이야 있었을 것이고 텃세도 부리는 이도 있었겠지만 대다수의 피난민들은 거제 사람들의 은혜를 잊지 못했다.
거제도 각 학교는 피난민들의 아이를 수용했고 피난민들 가운데에서 교사 자격 있는 이를 뽑아내 교단에 서게 했고 안되면 길바닥에서라도 가르쳤다. 그렇게 거제도 사람들은 난민들을 살렸고, 함께 어우러졌다. 단지 동포라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장 부산항은 수만 피난민에 기가 질려 입항을 거부하지 않았던가. 어려운 처지에 처한 사람을 보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마음,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을 보면 모든 것을 차치하고 일단 그를 살리고 보려는 마음, 자신도 넉넉하지는 못해도 당장 살아가기 어려운 사람들과 보리쌀이라도 나누고 힘내라는 마음. 그것이 바로 휴머니즘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고 사랑이고 기본이다. 전쟁 중 거제도 사람들은 그것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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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이 공산화된 뒤 공산 정권에서 결코 좋은 정권 대접 받지 못할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베트남을 탈출했다. 재산을 빼앗고 여성들을 겁탈하기 위해 해적들이 득시글거렸지만 그들은 목선 하나에 모든 것을 싣고 무작정 동남태평양을 헤맸다. 그러다가 상어밥이 되거나 굶어죽은 예는 헤아릴 것도 없다. 항해하던 배들은 그들의 애타는 SOS를 짐짓 외면했다. 1988년 필리핀 해역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한 스타킴호라는 원목 수송선의 선원들은 구명보트에 타고 표류하면서 지나는 배들이 분명히 자신들을 발견했음에도 무심히 지나쳐 버리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무려 5척씩이나. 문제의 배들은 표류 선원들을 인근 해역에 자주 나타나는 보트 피플로 오해했던 것이다. (1988년 2월 24일 경향신문) 이런 상황에서도 인간애를 지닌 사람들은 끊이지 않는 법이다.
1985년 참치잡이 어선 광명호는 남지나해 해상에서 보트피플들을 건져 올린다. 회사의 방침은 보트피플을 태우지 말라는 것이었으나 광명호의 전제용 선장은 죽음 직전에 내몰린 임산부 포함 96명의 사람들을 바다에 팽개쳐 둘 수 없었다. 회사의 명령을 위반하고 보트피플을 동반하여 부산에 입항한 그는 선장직을 잃는다. 하지만 그가 살렸던 97명 (임산부가 아이를 낳았다)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됐고 그들은 2004년 8월 전제용 선장을 LA 리틀 사이공으로 초청하여 20년만에 감격적으로 상봉한다. 97명 중 하나였던 누엔이라는 이는 미국에 정착한 뒤 베트남의 가족들을 데려오는 일보다 전제용 선장의 행방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만나는 한국인들마다 전제용 선장의 사연을 알리며 수소문해 줄 것을 청했고 이에 감동받은 한국인 직장 동료가 한국에 나가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전제용 선장을 찾았던 것이다.
‘영웅’으로 환영받은 전제용 선장은 어떻게 회사 방침을 어기고 그들을 구해 줄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 많은 친구들을 보고 어떻게 지나칠 수 있었겠나. 만약 모른 척하고 지나쳤더라면 저승 갈 때까지 두고두고 후회를 했을 것이다.” (신동아 2005년 2월호) 전쟁과 환난은 세계 어디에서든 발생하고 평화로운 사람들의 일상을 파괴하고 죽음으로 내몬다.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지옥으로 변한 삶의 터전을 포기하고 어떻게든 살 곳을 찾아 내달리게 되고 ‘살아남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고난을 견뎌내게 된다.
그들이 난민들이다. 더하여 기억해야 할 것. 불과 70여년 전, 우리나라에는 수백만의 ‘난민’이 있었고, 만약 작년과 같은 일촉즉발의 한반도 정세가 되돌아오고 전쟁이 포화가 불을 뿜는다면 당장 내 가족이 난민의 일원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망망대해 위 목선에 겨우 몸을 실은 우리 가족 앞에 선 배가 우리를 무심히 지나친다면, 뻔히 알고도 지나친다면, 어딘가에 상륙했는데 몽둥이를 들고 내몬다면 그때 우리는 어떤 심경이 될까. 물론 우리를 모른척 지나치는 사람들에게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그들도 난민을 먹여 살릴 만큼 넉넉지 않고 그 나라의 법이나 방침이 난민을 외면하도록 강제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전쟁 당시 정원 수십 명의 수송선에 1만 4천 명을 실었던 메레디스 빅토리 호의 선원들과 그 많은 피난민들을 감싸 안았던 거제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과 직업을 잃을 수 있는 위기에서도 양심을 택했던 전제용 선장의 용기가 자꾸 생각나는 것은 오늘 (6월 20일)이 난민의 날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제주도에 들어온 난민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청와대 청원이 20만을 넘고 턱없는 이슬람 혐오에 더하여 우리도 힘든데 무슨 난민이냐는 코웃음이 진동하는 현실이 가슴을 때리는 탓도 클 것 같다. 무작정 난민을 받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가늠하여 어려운 상황에 처한 난민들을 돕고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인간의 도리인 동시에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2010년 7월 5일 거제도 일운면 사무소에 난데없는 수건 한 박스가 도착했다. 수건과 함께 보내온 편지에는 발신자의 사연이 담겨 있었다. 보낸 사람은 나이 고희를 헤아리는 형제였다. 6.25 때 열 세 살, 열 살의 형제는 부모와 떨어져 피난선에 올라타 거제도에 떨어진 후 어른도 없이 고달픈 나날을 보내며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일운면사무소 앞에서 배를 움켜 쥐고 주저앉아 버렸다고 한다. 그때 지켜보던 면사무소직원이 다가섰다. “느그 피난왔제? 아부지 어무이는 어디 계시노?” “같이 아이 왔슴다. 어드메 있는지는 알 수 없슴다.” “밥들은 언제 묵었노.” 그때 동생이 찢어질 둣 울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대답이 필요없던 공무원은 호주머니를 털어 500환을 건넸다고 한다. “죽이라도 사묵고 기운 차리라.” 그리고 형의 어깨도 두드려 주었으리라. “어머니 오실 때까지 동생 잘 건사해야 할 거 아이가.”
그 500환의 은혜를 형제는 평생 잊지 못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은혜라도 갚기 위해” 수건 서른 장을 면사무소에 보낸 것이다. 비록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몰라 그 공무원에게 보내지는 못하지만 당신의 500환이 우리를 살렸다는 의미로 자기들 이름까지 박아서.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는 따뜻함, 가슴 속 깊숙한 곳에 불어넣은 훈기는 세월이 가도 가시지 않는다.
또 전혀 뜻하지 않은 역사를 창출하기도 한다. 흥남 부두에서 탈출하여 수송선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겨우 육지에 상륙해서 거제도에 겨우 발을 붙인 젊은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대한민국 제 19대 대통령 문재인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난민’의 자식이었다. 오늘 제주도에서 불안한 밤을 보내고 있을 난민들의 자식 가운데 어떤 인물이 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탈북자 포함하면 우리나라는 너무 많은 난민을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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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게 원칙입니다. 도울 수 있을 만큼 돕는다. 인간에 대한 애정, 그것에 문화니 종교니 인종이니 개입시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거부할지언정 그들을 혐오하여 배타하지 않는다 등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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