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아닌 척]한 번 써 보는 군대이야기-(6)7월 26일

in kr •  7 years ago  (edited)

전역일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면서, 단 하루 기억하는 날짜가 있다. 7월 26일. 근무를 맞교대하던 중대원 4명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난 날이다. 당시 직접 겪었던 일들과 당사자인 2소대원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쓰겠지만, 기억의 많은 부분이 희미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기자들이 군 공보라인을 취재해서 쓴 기사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당시 기사는 참고하지 않고 선명한 부분만을 찾아 쓴다.

2005년 7월 26일, 전역을 4개월 쯤 앞둔 때였다. 그날 우리 1소대는 대성동 마을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2소대는 1박2일짜리 훈련 2일차로, 임진강 둑을 따라 행군해 올라오는 날이었다.
우리 중대는 2개 소대로 구성돼 있고, 한 소대가 북쪽 근무를 하는 동안 나머지 소대가 철책 남쪽으로 내려가 훈련을 받은 뒤 외박을 다녀와서 맞교대 하는 시스템이었다. 중대 규모도 작고 서로 마주칠 일이 많아 두 소대는 사실상 한 소대나 다름없었다.

날이 습하고 더웠다. 근무지 문 밖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상황실을 피란처 삼아 숨어 있는데 희미한 무전이 왔다.

"... 보내라."

"빨리"

"...XXX 식스"

평소 싫어하던 사람의 목소리임은 분명했다. 한 부대단위의 대장을 나타내는 '식스(6)'라는 미군 무전용어도 들렸다. 훈련을 지휘하고 있을 중대장이었다. 다급하게 뭔가를 보내라고 했다. 좀 더 들어보니 차를 보내라는데 어디로 보내라는 건지, 무슨 일인지 내용이 쏙 빠졌다. 하급자였으면 엉터리 보고로 혼을 나야 할 판이었다.

상급 부대인 1사단에서 내용을 먼저 알고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훈련에 나갔던 2소대원들 중 일부가 급류에 휩쓸려 실종됐다. 1사단 정보 계통이었나 공보계통이었나 기억은 나지 않지만 4명의 인사기록 카드를 대대본부에서 받아 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본부에 내려가 인사기록부 4부를 받아 올라오면서 슬쩍 열어봤다. 너무 친근한 얼굴들이었다. 특히 두 명은 비슷한 시기에 입대해서 가까운 선임으로 잘 챙겨주던 사람들이었다.

A병장은 제대가 얼마 남지도 않아, 훈련에 참가할 필요도 없었다. 막사에 남아서 에어컨 빵빵 켜 놓고 탱자탱자 하다 집에 가도 됐지만 탄창에 탄 끼우는 일이라도 도와주겠다며 자진해서 나선 걸로 들었다. 사람이 순해서 후임들 잘 혼내지도 못하고, 성실하게 조용히 제 일 하는 사람이었다.

K병장은 정말 지옥같이 막막한 중대신병시절, 방 배정을 못받아 한참 신병방을 같이 쓰며 얘기도 많이 하던 사이였다. 미대를 다니다 와서 그림도 잘 그리고, 제대하면 뭘 하겠다는 얘기도 했다. A병장과 함께 나이도 같아 더 친근하게 느껴졌었다.

K일병은 계급이 멀어서 그렇게 친하진 않았다. 체대 출신이었나 배구 심판 자격증이 있고 몸이 엄청 빠른 친구였던 걸로 기억한다. 조용하고 성실한 친구였다.

P중위는 부대가 한국군으로 창설되며 야전부대에서 1차 소대장을 마치고 발령받은 군인정신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당시 우리 소대장과 어릴적부터 친구고 부모님들끼리도 친구인 육사 동기였다. 새 부대원들에게 낯선 부대 근무 시스템을 알려주는 시기였는데 기존 부대원으로서 야간근무를 같이 하다가 문득 P중위가 물어봤다. "너는 꿈이 뭐니?" 나는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는 내 대답을 듣고 말했다. "난 훌륭한 군인이 되고 싶다." 그는 운동이면 운동, 훈련이면 훈련, 뭘 하든 100%의 노력을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인사기록부 속 부대원들의 증명사진은 낯설었다. 특히 병사들은 입대 당시 찍은 꽁꽁 언 신병 사진이 붙어있었다. 이들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부대에 올라와서 인사기록부를 전달하고 나니 이런저런 얘기가 들려 왔다.

"산에서 숙영을 한 뒤 강둑을 따라 행군을 하다가 발 밑의 흙바닥이 푹 꺼지면서 몇 명이 강에 빠졌다가 물을 먹고 기어올라왔는데 A병장이 휩쓸려 내려갔다."

"K일병이 앞 뒤 안보고 뛰어들어 구하려고 했는데, 같이 휩쓸려서 나오지 못했다."

"나머지 소대원들이 손에 손을 잡고 인간띠를 만들어 구하려고 했는데 물살이 세서 띠가 중간에 끊어졌다. 그 때 K병장이 쓸려 갔다."

"P소대장이 혼자라도 구하겠다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사라졌다."

정보는 두서가 없었다. 서로 부딪혔다. 어느 게 사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럴 때, 보통 군에서는 정보를 통제한다. 부대에 함구령이 떨어졌다. 지시가 있을 때까지 외부에 전화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한달이 멀다 하고 집에 나오는 큰아들이 뭐가 그리 걱정되는지 부대 복귀 때마다 성모상에 대고 평소 하지도 않는 기도를 하던 어머니가 만일 아무런 정보 없이 아들 부대에 사고가 났다는 뉴스를 들으면 까무러칠 게 뻔했다. 나를 걱정하다 어머니가 죽을 판이었다. 명령을 어기고라도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응 아들 웬일로 대낮에 전화를 했어?"

"엄마, 길게 통화 못하고 부대에 사고가 났는데 나는 멀쩡히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이따 뉴스 보면 알 거야. 알겠지?"

"무슨일이야, 그래 알았어. 사랑해 아들."

평소 같으면 쉽게 했을 "나도 사랑해"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 말을 하다가 목이 메이면 어머니가 심란해 하실 것 같았다.

몰래 전화를 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 담배를 물었다. 친하게 지내던 맏형 병장이 담배를 피우면서 막 울기에 따라 울었다.

밤에 통상적인 업무를 위해 부대에 내려갔다. 돌아온 2소대원들이 좀비처럼 여기저기서 실성한 사람처럼, 아니 실성한 채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날 만큼은 아무에게도 말을 걸 수 없었다.

훈련이 끝나고 2소대는 외박을 나갈 예정이었는데 부대는 외박을 통제했다. 타당한 조치였다고 생각한다. 눈 앞에서 생떼같은 동료 4명을 수장시키고 정신이 파괴된 사람들이 밖에 나가면 무슨일이 터질지 알 수가 없다.

2소대는 무기한 막사 대기했다. 1소대의 북쪽 근무도 같이 무기한 연장됐다. 1소대도 정신이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조금씩 정신을 차려 가는 2소대원들에게서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들었다. 기억에 의존했기 때문에 진실은 알 수 없다.

숙영을 하러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이미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있었고 강물은 위험해 보였다. 중대장은 그럼에도 적 포탄 낙하 상황을 걸었다. 적 포탄 낙하 시엔 '좌우로 신속하게 흩어져 몸을 숨긴다'는 게 원칙. 강 둑에서 몸을 숨길 곳은 둑 밑 밖에 없어서 소대원들은 둑 밑으로 내려갔다.
A병장이 물에 빠지고 K일병이 뛰어들었다. 둘은 물에 빠지기 무섭게 저 멀리 떠내려갔다. 라이프가드 자격증이 있는 이병과 중대장, 소대장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라이프가드는 자신의 목숨도 간신히 건져 냈고, 중대장은 한 참을 떠내려 가다가 나중에 소리를 듣고 출동한 1사단 도하부대의 보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소대장은 군화를 그대로 신고 물에 들어가, 수영 실력이 소용없었다.
소대원들은 전부 옷이란 옷은 다 벗어서 끈을 만들고 거기에도 모자라 손에 손을 잡고 띠를 만들어, 멀어져 가는 부대원들을 쫓아 들어갔다. 하지만 물살이 너무 세서 인간띠가 자꾸 끊어졌다. 소대원 몇이 물에 빠졌다가 물을 먹고 올라왔다. 이 과정에서 K병장이 사라졌다.
소대원들이 보이지 않자, 소대장은 뭍으로 돌아오기 위해 몸을 돌렸지만 물살 때문에 제자리에서 간신히 몸만 떠 있는 상황이었다. 소대원들은 소대장을 구하기 위해 다시 인간띠를 만들었다.
한 번은 소대장과 인간띠 맨 앞 소대원의 손이 닿았었다. 손을 잡았는데 물살이 둘 사이를 떼어 냈다.
손이 떨어지자 소대장이 수영을 멈췄다. 소대장은 손을 놓친 소대원을 보고 한 번 씨익 웃는 듯하더니 물 속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남은 소대원들은 이야기를 하며 울부짖었다. 인간띠 맨 앞에 있었다는 K병장은 맨 마지막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P소대장의 절친이었던 우리 소대장은 밤에 잠이 들지 못하고 몇 번이나 인터폰으로 근무자를 불러 옛날 이야기를 하며 울었다.

장마가 다가오고 있었다. 몇일이었던가 수색 한계선이 정해졌다. 그날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면 사실상 더 이상의 수색은 희생자만 늘리는 셈이 된다는 얘기가 있었다. 언론은 '임진강을 울린 전우애' 따위의 제목으로 기사며 칼럼을 쏟아냈다. 당시 나라를 들썩하게 했던 '김일병 총기난사 사건' 등이 잇달아 터져, 군은 매일 두들겨맞고 있었는데 호재를 만난 것 같았다.

거짓말처럼 2소대원들은 수색 한계점 직전에 모두 돌아왔다. 제일 먼저 들어갔던 A병장이 마지막에 올라온 것으로 기억한다.

희생자들은 남은 자들의 손에 영웅이 돼 갔다. 모두 1계급이 추서됐다. 무슨 소용일까. 대성동 마을 주민과 부대원들이 돈을 모아 추모비를 세웠다. 부대를 거쳐간 올드보이들과 유가족들이 추모식에 참석하려고 북쪽에 올라왔다. 부모들은 아들이 생활하던 건물을 매만지며 오열했다. 남은 소대원들은 눈물을 잔뜩 머금고 연신 경례를 했다.

중대장은 징계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육사 명예의 전당인지 뭔지에 헌액된다는 얘기도 들었다. 우리 소대장은 이를 막겠다고 동분서주했다. 소대장은 나중에 자진해서 전역했다.

80일이었나, 지루한 대기 기간을 마치고 2소대가 먼저 외박을 다녀왔다. 생각보다 2소대 기강은 튼튼했다. 중대장에 대한 반감이 강했지만 근무에 차질을 빚진 않았다. 2소대에 있는 동기 하나가 완전히 빠져서 아주 사회인처럼 생활했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외박에서 돌아와 당당하게 쓰고, 부소대장이나 중대장 방에 몰래 들어가 싸이월드에 항시 접속해 있었다. 반감을 핑계로 같은 일을 겪은 소대원들에게 피해를 줬다.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나는 4개월 뒤 제대했다. 전역 신고를 하는데 중대장이 손을 잡고 울먹였다. 마지막 외박 복귀하던 날 눈물을 글썽이던 어머니는 제대하던 날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제대도 기념할 겸 가족 나들이를 가는 길에 아버지는 대전 현충원에 잠시 차를 댔다. 들어가는 길에 꽃을 좀 샀다. 사병과 장교는 묘역이 따로 있었다. 묻힌 곳을 찾기 어려웠다. 더듬더듬 찾아가서 깜짝 놀랐다. 2소대원들 뒤로도 수십개의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전시도 아닌데, 반년 채 안되는 시간 동안 그렇게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2소대원들의 무덤 앞에 무릎을 대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끅끅 소리를 내며 울었다. 너무 늦게 찾은 것
같아서 미안했다. 진정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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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습니다.
정말... 무슨 소용입니까.

가슴이 먹먹해지는 글이네요. 주변의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 어째 날이 갈 수록 기억이 선명해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요. 저도 쓰면서 놀랐습니다. 생각보다 기억이 너무 선명해요. 묘비석 앞에 세워져 있던 꽃이며 액자 같은 것들도 기억이 나네요.

글 읽는 내내 마음이 무겁네요.

군대에서 있었던 일이 정말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저같이 평범하게 군생활을 마친 사람으로서 읽어보면서 미안함마저 들게 만드네요ㅠㅠ

2년 동안 젊음을 국가에 헌납한 것만으로도 전혀 미안해하실 필요 없지요.

정말 가슴 아픈 사연 입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소중한 인생을 갖고 태어 났는데
누군가는 너무도 짧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맞습니다. 가끔 이들이 마지막 순간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생각도 들어요.

저는 군대 있을때 !!! 국방일보에 첫면에 ... ㅋㅋ 홍보 모델로 ... 나온적이 있습니다 !!

헉! 국방일보 저희 회사에서 인쇄한다는.

ㅋㅋㅋ 찾아 볼 수 있다면... 제가 나올 수도

ㅠㅠ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네요 ㅠㅠ

근 15년 동안 공개된 장소에 쓰지 않았던 이야기이지요.

아까운 젊은들이 사라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저도 군시절 장마로 인한 산사태로 연대 수색대 와 수송부 막사를 덮쳐 엄청난 희생이 지켜봤기에...

아 그런 일도 있었군요. 전장이 아닌 곳에서 군인이 죽는 일은 없어야죠.

그렇죠!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냐마는... 너무 허무하게 청춘들이 사라지는 일은 없어야 겠죠!

정말 많은 군인 들이 군생활 하며 목숨을 잃는다고 들었어요.
채 피우지도 못한 꽃들이기에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군 내부망으로 보는 일일보고 같은 게 있는데 거기 보면 연초부터 사고자 현황이 매일 업데이트 되는데 숫자가 너무 커서 놀랍습니다.

젋은 나이에 국가의 부름을 받고 복무 하다가 일어나는 사고는 없어야 합니다. 저도 신병 때 훈련지 이동 중에 자주포가 뒤집어 지는 바람에 다리가 깔린 병장이 있었는데, 제가 제대할 때까지 9차례가 넘는 수술을 받았고, 결국에는 다리를 절단 했던 일이 떠오르네요.

가슴 아픈일이네요 ㅠ

경기도 연천에 있었지요.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예전 막사도 생각나고 그저그저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울뿐 무슨말을 할 수 있을까요.

군대에서 떠나간 제 친구도 현충원에 있어요.
1년에 한 번은 찾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같이 대학 다닐때 못챙겨준게 아직도 가끔 떠올라요.

안녕하세요^_^ 새로 가입한 뉴비입니다.
깊고 좋은 글 너무 잘봤습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뵙고
도움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