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을 에는 혹독한 추위가 스르르 사위었다. 따뜻한 커피나 차보다 시원한 음료가 당기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본질은 모두 동일한 물일지라도 얼음이나 눈보다는 액체 상태의 물이 더 반가운 시기. 물을 핵심 모티프로 삼는 놀랍고 기기(奇奇)한 사랑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을 만났다. 원제는 'The Shape of Water'. 직역하면 '물의 모양, 형태'. '사랑의 모양'이라는 부제와 원제를 함께 놓고 보면 '물'과 '사랑'이 대구를 이루는 쌍이다. 즉, 물의 형태와 사랑의 형태는 흡사하리라는 메시지. 부제를 누가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테마를 잘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은 단 한 방울만으로도 쉽게 감각할 수 있지만, 물의 형태를 정형화할 수는 없다. '물은 이렇게 생겼다'라고 단정하는 건 불가능하다(물론 화학자가 '물의 분자는 산소 원자 1개와 수소 원자 2개가 결합한 것이니 물의 형태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반박한다면 할 말은 없다.) 인간이 도구의 도움 없이 감각기관만을 활용해 인식하는 현실세계로 한정한다면, 물의 모양은 그것을 담고 있는 용기나 사물에 따라 변화무쌍하다.
사랑의 속성도 물의 속성과 같아서 함부로 그 모양을 규정할 수 없다. 누가 누구를, 무엇을 사랑한다고 하든 우리는 그 사랑을 고유한 형태의 물성(物性)을 가진 대상으로 치환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사랑의 모양을 정형화할 수도 없다. 1만 미터가 넘는 마리아나 해구의 챌린저 심연처럼 아득히 깊은 사랑일지라도 말이다. 다만 누군가의 얼굴에 봄꽃처럼 활짝 핀 웃음, 50도가 넘는 독주(毒酒)처럼 뜨겁고 쓴 눈물을 경유해 가늠할 수 없는 그 사랑의 크기만 짐작할 따름이다.
물이든 사랑이든 일정하고 고유한 모양을 확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모든 물과 모든 사랑은 제각기, 제멋대로, 변화무쌍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물과 사랑에는 그 어떤 편견과 선입견, 구속과 한계도 불가하다는 것.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은 언어장애를 가진 청소 노동자인 여자(샐리 호킨스)와 괴생명체(더그 존스)의 신비스러운 사랑을 황홀한 음악과 시각적 판타지로 표현함으로써 물의 성질을 닮은 '사랑의 모양'을 그려냈다. 첩보 스릴러, 멜로, 뮤지컬 등 이종 장르를 뒤섞어 만든 이 영화가 대단하고 아름다운 이유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에는 미국과 소련 간 우주개발 경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미국 항공우주연구센터가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당시 지구 최고의 과학기술이 집결된 그곳에 온몸이 비늘로 덮인 괴생명체가 들어온다. 괴생명체는 과학기술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존재다. 그런 괴생명체와 교감하고 의사소통하는 유일한 존재는 말을 하지 못하는 청소 노동자 '엘라이자 에스포지토(샐리 호킨스)'다. 이 두 존재 사이에서 사랑을 가로막는 모든 난관과 장벽은 허물어진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인 언어가 없어도, 심지어 생물학적 종이 달라도 둘은 사랑에 빠진다.
과학과 비과학의 세계관이 충돌하는 이 영화에서 괴생명체(더그 존스)는 마치 인류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려 한 여러 신(神, god)을 떠오르게 한다(실제로 그는 신이라면 가지고 있을 법한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과학으로 명쾌하게 분석할 수 없는, 비과학적 요소로 가득한 사랑의 현현(顯現)처럼 보이기도 하는 괴생명체는 처음엔 좀 징그럽다가 점차 정말 아름답게 느껴진다.
말 못 하는 청소 노동자 '엘라이자 에스포지토'를 연기한 샐리 호킨스의 퍼포먼스를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연기에서 대사로 캐릭터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쉬울 텐데, 그녀가 맡은 캐릭터는 아예 말을 하지 못한다. 말 대신 수화, 표정, 몸짓으로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여자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샐리 호킨스의 연기는 나까지 사랑에 빠지게 만들 정도였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물속에서 살았다. 인간이 처음으로 느끼는 물인 어머니의 양수는 더없이 따뜻한 사랑의 근원이자 확실한 감각적 증거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가장 원초적 사랑의 모양은 그 어떤 틀로도 규정하거나 억압할 수 없는 물을 닮은 무언가가 아닐까.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은 말한다. 지극한 사랑은 물과 같으니(上愛若水) 아무런 한계와 제약 없이 진심을 다해 사랑해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