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두 살, 출판사 열정 페이

in kr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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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 다닐 때는 출판사, 잡지사가 문과생들의 (유일한) 창업 아이템이었다. 요즘 글 쓰는 젊은이들도 (취미로) 자비(독립) 출판을 하고 뜻(욕망)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잡지를 내니까 크게 달라지진 않은 것도 같지만, 결정적으로 ‘돈’ 문제가 달랐다. 요즘은 수익을 바라고 책을 내거나 잡지를 내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내가 젊을 때는 아직 종이의 시대가 저물기 전이었고 그래서 출판은 분명히 돈이 되었다. 아니, 출판사 해서 돈 못 번 사람은 없었다.

대박이 터져야만 돈을 버는 것이 아니었다. 책을 내면 기본은 팔려나갔고 계속 사세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생활비도 벌고 회사 규모도 꾸준히 키워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중간 정도의 베스트셀러가 하나 터지면 땅을 사고 건물을 사고… 뭐 하여튼 그런 분위기에서, 내가 20대 때는, 예전 운동권, 즉 386들이 출판사나 잡지사를 시작하고 10년 정도 아래의 젊은이들을 고용하는 일이 많이 있었다.

내가 대학 3학년일 때 그렇게 해서 놀러(!)가게 된 출판사가 있었다. 전형적인 386 문과 출신 운동권 열 명이 모인 동인 형태의 회사였다. 그런데 그곳은‘미술인’들이 주축이 된 출판사라는 점이 좀 달랐다. 직접 미술 창작 작업을 하는 작가는 물론 미술평론가들이 모였다.

나도 미술에 욕심이 있고 대학에서 그림 동아리 활동도 하고 있던 터라 우연도 우연은 아니게 느껴졌다. 참, 그러고 보니 그림 동아리 선배가 소개시켜 준 외부 철학 공부 모임에서 알게 된 선배가 같이 가자고 해서 가게 된 출판사였네.

그 출판사는 당시 한국의 새로운 문화 현상을 비평적이고 급진적으로 다루는 무크지를 연달아 펴내어 화제를 낳고 있었다. 우리는 이른바 ‘청년 문화 기획’의 자문단으로 모이게 된 거였다. 우리는 30대이니 20대 문화는 잘 모른다. 너희가 20대는 뭐하고 노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 들려다오. 당연히 자문료는 없었고 우리 출판사에 와서 구경 겸 회의라도 하는 게 기회고 영광이겠지 하는 분위기였고 그야말로 아무도 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플란다스의 개>도 아니고, 어느 아파트 지하실에 위치해 있던 그 출판사에 알음알음 모였던 대여섯 명의 20대가 두어 번 함께 했던 회의 가운데 유일하게 내 기억에 남은 시간은 기획 회의 첫날, 회의가 끝나고 나서였다. 386 중의 남자 한 명이 우리에게 ‘대접’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난생 처음 단란주점에 가보았다.

나는 여자인데, 우리 중 절반 이상이 여자였는데, 왜 단란주점을 데려갔는지 모르겠지만, 평소에 자주 가던 버릇으로 그랬을 수도 있고, 20대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시켜주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 386남자는 어느 건물 지하로 우리를 데려갔다. 그곳에는 노래방과 비슷한 공간, 그러나 넓이는 노래방의 여섯 배쯤 되는 칸막이 방들이 미로처럼 배치돼 있었고 그 안 테이블에는 술병들이 놓여 있었다. 방 밖에서 어정거리던 ‘아가씨들’이 금방이라도 들어올 분위기였다.

나를 비롯한 여자들은 물론 남자들도 쭈뼛거리는 가운데, 나와 함께 간 여자 선배가 용감하게 앞으로 나서며 노래방 기계를 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자 웨이터가 안주를 가지고 들어오자 그녀는 남자 웨이터의 손을 잡으며 ‘부루스’ 비슷한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 진상 손님의 행동이지만, 90년대에 난생 처음 단란주점에 간 20대 여자 대학생의 오버 행동을 그 범주에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 후로 일주일에 한 번 출판사의 기획 회의에 참석한 우리 20대들은 제각각 당대 20대문화의경향, 혹은 아이디어들을 발제해 왔다. 뭐 별건 없었고 당시 폭발한 문화 담론에 대한 관심을 타고 최근 번역된 미국 책들에 나온 젊은이 문화 혹은 반문화 개념들을 보면서 한국 상황에 억지로 끼워 맞추거나 슬쩍 변형하는 수준이었다.

그러자 386들은 실망했다. 이 정도는 우리도 아는 거라며, 좀 더 참신한 아이디어 없냐며.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건 없었다. 여가 시간이 생기면 우리는 술을 마실 뿐이었다. 새로 나온 음악, 영화, 소설에서 문화 경향을 일부 끄집어낼 수 있겠지만 그건 20대들이 만든 게 아니었고 우리 자체의 생활 속 문화에 있어서 새로운 경향이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러자 실망한 출판사의 386들은 우리를 해산시켰고, 그 중 한 명만 우리를 긍휼히 여겨, 내가 요즘 공부하고 싶은 게 있는데 같이 스터디라도 하자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대신 현대 미술사 혹은 미학사 공부를 하게 됐다.

얼마전, 이제는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그 출판사에서, 20년도 전에 나와서 그때 번역을 시작한 책을 이제야 발간한 걸 봤다. 참 징한 느낌도 들고, 반갑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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