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릴 때마다 한잔<대한민국 중년들을 위한 헌사2-간호사와 주방장>

in middleage •  7 years ago 

치통을 앓는 A가 치과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충치 치료를 막 끝낸 예닐곱 살 아이가 빽빽 울다가 돌연 울음을 그치면서 묻는다. 엄마, 눈물이 짜다. 왜 짜지.

그 순간 A는 엄마가 어떻게 답할지 몹시 궁금해 조바심을 내며 귀를 기울였다. 과연 아이 엄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눈물에 염분이 섞여 있으니까 그렇지. 책에서 봤자나. 아이는 엄숙하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염분'이 뭔지에 대해 심사숙고하면서.

그때였다. 카운터에서 처방전을 준비하던 간호사가 입을 열었다. 꼬마야, 눈물이 짜지 않고 달면 넌 그거 먹으려고 하루 종일 울겠지. 그래서 하느님이 조금만 먹으라고 짜게 만드신 거야. 아아, 그 얘기를 듣는 순간 A는 당장이라도 간호사에게 달려가 꼬옥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말을 시(詩)처럼 하는 그녀에게 남은 평생 이빨을 몽땅 맡기고 싶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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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켜먹던 B가 이물질을 발견했다. 바둑판도 아니건만 자장면발 사이에 흰색돌이 살포시 앉아 있는 것이다. B는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한바탕 퍼부었다. '이보쇼…제정신…자장면…바둑돌… 그것도 흰색'.

B의 속사포에 숨소리도 내지 않던 주방장이 마침내 근엄하게 말문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개업 1주년을 맞아 깜짝 이벤트를 마련했습니다. 흰색 바둑돌을 찾은 분에게는 탕수육 한 그릇을 무료로 드립니다. 아아, 이 무슨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흰돌이 탕수육이면 검은돌은 팔보채라도 된단 말인가. 예상치 못한 답변에 B는 겨우 씩씩거리다가 차마 거절하지 못한 탕수육을 맛나게 먹었다.

A와 B의 이야기는 말이 말로써 갖는 의미를 고민케 한다. 독설이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기업 하나를 휘청거리게 하는 사태를 목도하면서 과연 사람을 살리는 말은 무엇인지, 조직을 키우는 말은 어떤 것인지 심사숙고하게 되는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도 말이요, 천당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불행도 사람의 입에서 비롯된다.

이 당연한 진리를 잊고 사는 것은 각박해진 세태에 경청과 침묵의 가치가 퇴락된 탓일까. 접촉사고가 나면 목소리부터 높이는 범인(凡人)들이나, 거짓을 가리기 위해 거짓을 일삼는 권력자들의 행태를 보면 예쁜 말, 착한 말, 지혜로운 말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가출신고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독설에 대한 갱생으로 광야의 묵언수행이라도 권하고 싶은 마음이다.

  • 이 글은 2016년작 <흔들릴 때마다 한잔>의 에피소드 중 하나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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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장님입니다. 도와주세요." 라는 눈먼 거지에게 "오늘은 참 아름다운 날이지만 저는 볼 수가 없습니다." 라고 고쳐 줘서 동전통이 평소보다 빨리 차게 되었다는 글이 생각나네요. 지혜의 말한마디가 사람을 움직이는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말 한마디, 글 한줄이 얼마나 묵직한지..삶은 그렇게 겸손해져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