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3방향 즉 북방 다부동, 서북방 김천 및 남서방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아군의 반격으로 적의 기도는 수포화되었으며 국군 제1사단, 미 제1기갑사단이 왜관 및 대구의 진입로에서 강력한 적과 대전하는 동안 국군부대는 인천의 서해안 근처 소도에 수륙 상륙전을 감행하였다. 이 작전과 마산 남방 남해안에서 3차에 걸친 상륙작전은 적으로 하여금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괴뢰군은 낙동강을 돌파하려는 공세 계획을 단념하지는 않았다.
그 후 적은 다시 낙동강 방어선에 공격을 가하여 왔으며 이 공격은 적의 최후적인 발악인 고로 지극히 맹렬하였다. 한국 정부와 육군본부는 부산으로 이동하였으며 심대한 사상자의 속출에도 불구하고 수적으로 우세한 적은 예비대를 증강시켰다. 연합군사령관은 보충 문제에 중대한 관심을 집중시키고 미국 정부에 대하여 증원부대가 도달된 이후에도 적은 여전히 아 방어진에 대항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전투에 참가 중인 미군 부대의 병력은 환자와 사상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감소되었으며, 기타 연합 제 국가의 부대는 여단, 연대 및 대대 병력 정도로 파병되었고 낙동강의 괴뢰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이러한 다수의 보충 문제로 해결함에는 장시일이 경과 되었다. 연합군 총사령관은 단일적인 작전 운영을 실시하기 위하여 국군의 통합을 명령하였다.
동남 한국의 영토는 단형(短形)같이 미 8군이 확보하고 있었으며, 동 및 남부는 해면으로 쌓여 있고 서부 및 북부 일대는 낙동강에 의하여 방어선이 형성되어 있었다. 워커 장군은 대구 및 부산 주변에서 미 4개 사단, 1개 해병여단 그리고 6개 국군 사단으로 구성되는 병력을 지휘하였으며 당시 적도 거의 동등한 병력을 투입하고 있었다.
3월 22일 미 제8군사령부는 낙동강 서부지구의 미 제24사단을 미 제2사단과 교대시키고 제24사단을 군 예비부대로 하였다.
8월 31일 밤과 9월 1일 아침에 적은 미 제25사단 및 제2사단에 대하여 맹공격을 개시하였다. 특히 남부 제25사단 지구에서 격전이 전개되었으며 미 제2사단 전 전선에 대하여 일제 공격을 개시하여 미 제9연대 지구 2개 지점과 미 제23연대 지구의 3개 지점에서 강을 도하하였다. 적은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여 그 전방부대는 침투에 성공하였고 수대의 전차를 도하시켰다.
전술한 바와 같이 8월 27일 현재 아 연합군은 낙동강 하류 의령 동방의 남강과의 교차점에서 동으로 낙동강을 따라 경계선을 정하고 그 이남을 제25사단이, 그 이북 창녕~고령 방면을 미 제2사단이 각각 담당하였으며 대구~왜관 정면을 미 제1기갑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다.(부도 제41 참조)
적은 미 제25사단 및 제2사단에 대하여 서부 및 서남부 지구로부터 일제 공격을 감행하여 대구~부산 간 도로를 차단한 후 마산 방면으로 진격할 기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보충의 불충분과 국군 정면에서의 적의 패배로 기인하여 사기는 저하되고 지극히 초조하였다.
이때 아 연합군의 증원부대 11,115명이 일본에서 한국전선으로 향하여 항해중에 있었으며 한국전선에 투입된 미 제8군 예하의 병력은 대략 아래와 같다.
미 제8군 74,162명
국군 91,718명
미 공군 3,613명
미 해병대 4,468명
영국군 1,535명
계 175,496명
이리하여 아 연합군은 적의 기도를 분쇄하고 현위치를 고정화 시키는 동시에 차기 일제 총반격을 위하여 강력한 국부적 공격을 개시하고 포켓 내의 분리된 적 병력을 섬멸하면서 북진의 만단(萬端)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