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작성한 리스트 버리기

in hive-196917 •  13 days ago 

annie-spratt-3sgir4ErK5U-unsplash (1).jpg

산책길 초입에 해가 비치자, 문득 영감이 번뜩였다.

지금의 나는 인간관계로 인해 고통받을 일이 없다. 친구들과 가족들 사이에서 주고받은 우정과 애정이 믿음으로 단단히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더 이상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다.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조차 없다.

설사 그들이 이유를 밝히지 않고 하루아침에 돌변해 나와의 관계를 끝내더라도, 나는 괴롭지 않을 것이다. 아쉬울 수는 있겠지만, 각자 나름의 사정과 이유가 있을 테니 그들의 선택을 존중할 뿐이다. 언제든 다시 돌아와도 좋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 그동안 느꼈던 감사와 기쁨은 그대로 간직할 수 있으니까. 그들에게는 오직 고마운 마음뿐이다. 그들이 어디서든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아예 모르는 타인들로 인해 괴로울 일도 없다. 그들에게는 애초에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모르고, 그들도 나를 모른다. 가끔은 나를 오해하거나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나 역시 그럴 수 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단편적인 사건일 뿐이다.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거나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도 없다. 차가운 무반응이나 부정적인 피드백이 잠시 아플 수는 있겠지만,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아니다. 나의 중심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알게 된 인간관계에서 나를 괴롭히는 양상이 있었다.

과거 우연히 만난 누군가의 말이나 글이 내 영혼을 울린 적이 있다. 깊은 공감과 위로를 받았고, 통찰을 얻었다. 그 순간만큼은 따뜻하고 충만한 연결감을 느꼈다. 우리는 서로 사적으로 알지 못했지만, 그 강렬한 순간은 여운으로 남았다.

무의식 속에서 나는 이런 사람들의 리스트를 작성해 두었다.

‘어쩌면 잘 통할지도 모를 사람.’

‘어쩌면 나를 좋아할지도 모를 사람.’

‘어쩌면 만나게 될 인연일지도 모를 사람.’

그 리스트는 마치 산타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비밀 편지처럼 순수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다.

그러던 올해, 신기하게도 이 리스트에 적힌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상대방은 무례하거나 흠잡을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적당히 친절하고, 사무적이며 의례적으로 나를 대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런 태도에 상처받은 나 자신을 마주하며 당황스러웠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누군가가 직접적으로 내 에너지를 고갈시킬 때보다, 진심이 외면받았다고 느낄 때 훨씬 더 기력이 소진되는구나.’

끙끙 앓으며 새로운 대책을 세웠다. 정신적·정서적 에너지는 한정적이니 내 한계를 인정하고 안전한 경계를 두르기로 했다. 너무 급하게 다가가지 말자고 다짐했다. 인간관계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그렇게 마음이 조금 편해졌지만, 완전히 해소된 기분은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과거의 내가 작성한 리스트잖아! 내가 뭘 안다고 그런 리스트를 작성해 둔 거야? 누군가와 깊이 이해하고 교감하는 특별하고 마법 같은 순간은 내가 계획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삶이 주는 선물 같은 건데! 누가 선물을 줄지 내가 감히 어떻게 알겠어?’

선물은 줄 때 그냥 받으면 되는 거다. 평소에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선물을 받는 건 감사한 일이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선물이 없다고 해서 누군가 잘못된 것도 아니고, 상황이 틀어진 것도 아니다. 그냥 삶이 잘 굴러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누군지도 모르면서 김칫국부터 마시며 리스트를 작성해 두고 그것에 집착하고 있었다니! 귀엽긴 하지만 참 어리석지 않은가?

‘왜 내가 과거의 리스트에 맞춰 집착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거지?’

나는 산책길 나무숲에 과거의 리스트를 던져버렸다.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홀가분했다. 과거의 리스트를 버리는 행위는 이렇게나 자유로웠다. 앞으로 하나씩 더 버릴 때마다 나는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2025.01.20 by Stella

Authors get paid when people like you upvote their post.
If you enjoyed what you read here, create your account today and start earning FREE STEEM!
Sort Order:  

성숙해지셨습니다. 아, 한살 더 드셨구나….. ㅎㅎㅎㅎ

ㅋㅋㅋㅋ 만 나이로는 아직입니다.

저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네요. 사람이란 사람들로 인해 행복해지고, 사람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혼자서 단단해져도 또 여전히 사람들에게서 위로를 받고 또 상처를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법정스님이 승려는 인간관계가 차가워야 한다고 했는데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올 한해 관계에 있어서 평온하시기를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