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감정의 평행상태(equilibrium)로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부터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과정은 의외로 극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저 망연자실할 수도 있고, 혹은 환희에 몸을 떨 수도 있다. 그리고 <이퀼리브리엄>은 감정이 회복되는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적지 않은 디테일을 할애한다. 그 독창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순간들은 '건카타'로 사방에 현란무쌍하게 총질을 해대는 퍼포먼스에 가려지기에는 억울한 것이었다.
존 프레스턴이 감정을 느끼게 되는 과정은 처음에는 결코 드라마틱하지 않다. 마치 죽었던 몸에 따뜻한 혈액이 돌아오듯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주변에 있는 아주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된다. 감정억제제의 투약을 중지한 이후, 장갑을 벗은 맨손을 금속 난간에 스치고, 벽의 총알구멍을 손으로 훑고, 비오는 창문을 응시하는 프레스턴의 눈빛은 미묘하게 떨린다. 보통의 인간에게는 새삼스럽다고 하기에도 뭐한, 그런 보잘것없는 행위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낯선 기습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다양한 조건반응의 체계를 지닌 수많은 술어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일차적 통로는 외부의 자극을 느끼는 신체의 오감이다. 프레스턴은 투약을 중단하고 나서 비로소 온전히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를 맡는다. 그럼으로써 그는 모든 사물을 새롭게 인지하고,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바라보게 된 것이다.
프레스턴은 감정유발자로 체포되어 처형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사는 거냐고. “느끼기 위해서(live to feel)”라는 그녀의 짧은 대답에는, 이 영화의 모든 게 함축돼 있다. 무채색의 도시 사이에서 심장이 뛰는 '비정상적인' 인간이 되어가던 프레스턴은 어느 날 반군의 아지트를 급습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20세기 아날로그의 유산들이 잔뜩 숨겨진 밀실을 발견하고, 낡은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결국 무너지며 오열한다. 그것은 절대 분석적이거나 이해가능한 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자신 안의 불가사의한 힘을 느끼기만 할 뿐.
P.S 그가 들었던 음악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1악장 도입부다. 세계가 눈앞에서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