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한국 영화를 “방화 (邦畵)” 라고..
다소 비하하는(?!) 뉘앙스가 담긴
상당히 왜색스러운(!!) 용어로 칭하며,
난 방화는 절대 안 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지성인의 표상(?!)처럼 여겨지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실제로도,
독재 정권과 군부 정권을 거치며..
고전적인 (sex, sports, screen)
3S에 의한 우민(愚民) 정책과
사전 검열, 그리고 금기로 얼룩졌던..
암흑기가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런. 데.
민주화에 따른 정치 발전과 함께,
지금과 같이 한류를 주도하며..
우리나라가 영화 강국(!!)이 되는,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해가 있었으니..
(내가 생각할 때)
단언컨대 “1997년”이었다고 하겠다.
(전년의 영화가 이월된 것이긴 하지만,
개봉 일을 기준으로 이야기 하자면..)
2월. <초록물고기>를 시작으로..
6월. <넘버 3> <할렐루야>
7월. <비트>
9월. <접속> <노는 계집 창>
11월. <편지> <올가미>
12월. <8월의 크리스마스>까지..
당시에, 실력 있는
신인 감독들이 주축이 되어..
완성도 높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고..
작품성으로나, 흥행성으로나,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다 잡았으니..
진정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그 토대가 되는 원년이었던 것이다!!
그 한가운데에..
<초록 물고기> <넘버 3>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1년에 무려 4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
“한석규”가 있었음은 자명한 사실이고.
(이후로 한동안 한석규 선배는
한국 영화계에서 유일무이.
아주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잡았다! ♥.♥)
또한, 그 끄트머리에 내가..
<넘버 3>의 제작에 참여하고,
PIFF의 스탭으로 참여할 수 있었음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든다.
지금에 와서 돌아봐도..
정말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름의 흥망성쇠를 경험하며..
비약적으로 발전해버린
한국영화 산업의 한 자락에..
자리잡고 동참해 오는 동안,
많은 것들을 목도할 수 있었는데..
어쩌면 그것이..
내가 지금 여기 스티밋에 기록을
계속 남기게 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 같다.
(이제 겨우 1997년. 2021년까지는..
앞으로 24년치 분량이 남았다.
지치지 말고 열심히 기록해봐야지!
아자아자 화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