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0월 6일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오
1920년대 말, 로이 채프만 앤드루스라는 사람이 이끈 탐험대가 있었다. 앤드루스 탐험대는 몽골 고비 사막을 구석구석 누비면서 공룡의 화석들은 물론 세계 최초로 공룡 알 화석을 온전하게 발견하는 성과를 올린다. 이 탐험대 가운데 지질학자 모리스라는 이가 끼어 있었다.
그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오다가 ‘경성’(일본 발음 게이조오)과 ‘개성 (일본 발음 카이조오)를 헛갈려 그만 개성에서 덜커덕 내려 버렸고 하릴없이 시내를 배회하던 중 명물로 이름나 있던 송도고보의 표본실을 방문한다. 그는 거기서 산더미같이, 하지만 정연하게 진열된 나비 표본에 감동하여 그 수집자였던 석주명을 미국에 소개하고, 미국 대학들과 석주명과의 교류까지도 주선했다고 한다. “한국의 파브르”라 불리는 석주명을 소개하면 으레 따라붙는 일화.
하지만 모리스가 송도고보 표본실을 방문한 것은 석주명이 송도고보 생물 교사로 부임하기 전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모리스를 감동시킨 것은 나비 표본이 아니라 석주명의 전임 생물 교사이던 원홍구가 마련해 놨던 조류 박제 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전설이라는 것이 그렇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것도 아니게 되고, 황당한 것이 사실이 되기도 하는 경우가 흔하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석주명이라는 이의 업적이란 우연히 서양 학자의 눈에 들어서 평가를 받는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학창 시절 이른바 ‘날나리’로 유명했다. 공부는 뒷전, 경치 좋은 곳에 놀러다니기를 즐겼으며 기타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천성이 무엇에든 미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기타에 미쳤을 때는 온 성적표에 낙제와 과락이 난무했고, 조선에서 가장 기타를 잘 치는 사람이 되겠다는 각오로 기타를 붙잡고 놓질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대오각성 기타를 작파하고 공부에 미쳤을 때는 사람이 들어와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책에 눈동자를 파묻고 있었다. “미쳐야(狂) 미친다(及)”는 말은 이런 사람을 두고 나온 말이리라.
기타와 책을 넘어선 후 결과적으로 그가 일생을 걸고 미쳤던 것은 나비였다. 당시 조선에서 발견되는 나비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지만, 무늬가 조금만 틀려도 새로운 종으로 분류하고 학명을 갖다 붙이는 등 엉성한 구석이 많았다. 조선 나비에 붙여진 학명만 800개가 넘을 정도였다. 석주명은 날개의 형태, 무늬나 띠의 색채, 모양, 위치 등 다양한 형질의 변이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관찰, 사실은 같으나 다른 종으로 취급받던 나비들의 신원을 밝혀 주었다. 스무 개도 넘는 학명의 나비들이 사실은 배추흰나비 하나의 종이었음을 입증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17만 마리에 가까운 나비의 크기를 일일이 자로 쟀다고 한다.
허구헌날 전국을 떠돌며 나비 채집에 몰두하고 월급이 나와도 그에 태반을 쏟아붓는 이 나비에 미친 남자를 예뻐할 여자가 어디 그리 흔할까. 중매결혼을 했지만 그의 가정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고 4년만에 파경에 이른다. 여기도 시누이와 올케 갈등은 있어서 시누이는 올케가 남편의 학문적 삶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난했고, 올케 역시 가정에 등한시한 남편에게 불만이 한강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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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정법원 판사였다면 나는 아내의 편을 들었을 것이다. 아니 내가 여자라도 그런 남자와는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다. 자존심이 있지 어찌 벌레만도 못한(?) 삶을 감내할 것인가 말이다. 그렇게 가정이 파탄이 났어도 석주명의 나비에 대한 ‘미침’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손님이 찾아와도 10분 이상을 만나지 않았고, 점심 먹는 시간이 아까와 땅콩을 씹으며 연구에 몰두했다는 전설은 석주명이라는 인물의 실체를 짐작하게 한다.
그렇게 모은 75만 여 개체의 나비 표본은 그에게 얼마나 큰 재산이고 기쁨이고 보람이요 의미였을까. 전쟁통에도 그는 연구실을 떠나지 않았다. 인민군도 나비만 들입다 파고 앉았던 이 곤충학자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폭격에는 눈이 없었다. 1950년 9월 과학 발물관이 폭격을 맞았고 석주명의 평생이 그 깃 하나 하나에 서려 있던 75만 개의 나비 표본은 홀랑 불타 없어지고 만다.
석주명은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지만 마냥 그러고 있었다면 또 석주명이 아니었다. 전쟁이든 뭐든 그에게는 소중한 것이 있었고, 그를 위해 무엇이든지 해야 했다. 1950년 10월 6일 박물관 재건을 위한 회의를 위해 길을 나선 석주명은 을지로 4가 근처에서 저승사자를 만난다.
“이 새끼 이거 말투도 이북 말투인 게 너 빨갱이지?” 아마도 이렇게 시작했을 것 같다.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갖은 고생을 겪으며 눈이 뒤집혀 있던 청년단원들에게 덜미를 잡힌 것이다.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사람 목숨을 ‘채집’하고 있던 그들은 석주명의 변명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들의 카빈총은 불을 뿜었고, 나비 박사 석주명은 그만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만다. 그는 총구 앞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다고 한다.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오!”
이념 따위는 커녕 마누라도 나비 앞에서는 눈여겨보지 않던 나비광(狂), 42년의 짧고도 아까운 생애는 거적데기에 덮여져 길가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우직하게 파나가던 깊고도 맑았던 한 우물은 어처구니없이 그렇게 메워지고 말았다. 폭격 한 번에 재가 돼 버린 수십 만의 나비 표본들처럼 허무하게.......
그가 붙인 나비들의 이름, 그의 나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드러나는 이름들을 읊으며 그의 기일을 맞는다. “도시처녀나비, 시골처녀나비, 봄처녀나비, 지옥나비, 유리창나비, 수노랑나비, 깊은산부전나비, 수풀알락팔랑나비, 청띠신선나비, 모시나비, 풀흰나비, 어리표범나비.... 지리산팔랑나비.” 이름을 읊다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밝지만 어딘가 구슬픈 동요 한 자락은 마치 석주명을 위한 노래처럼 들린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봄바람에 꽃잎도 방긋방긋 웃으며 참새도 짹짹짹 노래하며 춤춘다.
어렸을 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한 학문의 열정을 지닌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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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이야말로 진짜 학자겠죠... 연구 때문에 이혼도 당한 건 좀 안되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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