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는 수많은 왕이 등장해. 재임 기간이 짧든 길든 상당한 영토와 백성을 거느리고 ‘왕’ 노릇한 사람은 수백 명이야. 그럼 역대 왕 중에 현직(?)으로서 가장 극심한 고생을 한 왕, 즉 바닥을 박박 긴 정도가 아니라 바닥을 뚫고 들어간 왕이라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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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소금장수를 하다가 도둑으로 몰리기도 했던 고구려 미천왕이 떠오르지만 그건 왕이 되기 전의 일이지.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나 이괄의 난·병자호란으로 두 번이나 피난을 가야 했던 인조도 있겠지만 그들 모두 이 왕의 고생담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구나. 바로 고려의 8대 왕 현종(992~1031)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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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은 왕이 되기 어려운 신분적 결함이 있던 사람이야. 그는 사생아였어. 아버지는 왕건의 여덟 번째 아들 왕욱이고, 어머니는 5대 임금인 경종의 후비였던 헌정왕후였지. 왕욱과 헌정왕후는 삼촌·조카 사이였는데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어. 근친혼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관습이었으니까. 문제는 어머니가 왕비, 즉 왕의 부인이었고 비록 왕이 죽은 뒤라고 해도 다른 이와 몰래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낳았다는 사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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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태조 왕건의 피를 이어받은 귀한 왕족이었지만 자신은 왕실에 망신살을 뻗치게 만든 사생아, 그가 대량원군 왕순(후일의 현종)이었다.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나 천애고아가 됐고 순은 어려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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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인 천추태후가 역시 사생아인 자기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그를 죽이려 들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 목종 임금이 폐위되면서 비운의 사생아 왕순은 고려 8대 임금 현종으로 즉위하게 돼. 이때 현종의 나이는 18세였어.
그의 왕위는 불안했지. 무엇보다 천추태후의 마수로부터 현종을 여러 번 구해주었던 목종이 피살돼버렸어. 목종이 무능했던 면도 있지만, 폐위되었다고는 해도 한때 국왕이었던 이가 살해당하자 민심은 흔들렸지. 여기에 더해 더 큰 위협이 외부에서 들이닥쳤어. “왕을 죽이다니 그 책임을 묻겠노라!” 호시탐탐 고려를 노리던 거란의 왕 성종이 기회를 틈타 선전포고를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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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대군이 고려로 향했고 이를 막아 싸우던 고려군이 참패했어. 지휘관 강조도 목숨을 잃었지. 현종으로서는 믿던 도끼가 발등을 찍고 부러져버린 격이었어. 거란군은 거침없이 남하했고 부랴부랴 떠난 현종의 피난길은 참으로 궁색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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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시해자’로 찍힌 사생아 출신 왕에 대한 충성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신하들은 도망쳐버렸고 호위병은 기십 명도 되지 않았어. 시골 도적들이 왕의 행차를 위협하고 시골 아전이 임금 앞에서 “나 본 적 있죠? 내 이름이 뭐죠?” 하고 얼굴을 들이미는 판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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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되기 전 현종이 절에서 귀양살이 아닌 귀양살이를 하던 시절 안면이 있었던 사람으로 추정돼. 즉 아전이 하고 싶은 말은 “당신 그때 불상 밑에 숨어서 벌벌 떨던 놈 맞지?”였던 것이지. 현종은 이 아전에게 호통조차 치지 못했어. 중앙집권제가 확고하게 정립되기 이전, 현종은 ‘나라님’보다는 ‘운 좋은 사생아’로 비치기 십상이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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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끝까지 현종을 지킨 지채문, 목숨 걸고 거란군과 협상을 벌인 하공진, 거란군의 배후를 무던히도 괴롭힌 양규·김숙흥 등의 분전으로 거란군을 고려에서 내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 스물도 안 된 홍안의 왕 현종의 입지는 결코 튼튼하지 못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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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과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에 현종이 재상들에게 내린 교서의 한 대목을 보자. “내가 스스로 외람되게 왕위를 계승하여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을 두루 겪었으며, 밤낮으로 부끄러움과 다투며 그 허물에서 벗어날 것을 생각하므로 그대들은 부족한 것을 힘써 도와주고, 또 면전에서만 순종함은 없도록 하라(한국사데이터베이스).” ‘외람되게’ 왕이 된 뒤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을 겪은 왕의 당부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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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전에서만 순종하지 말라.” 쓴소리를 기꺼이 들을 것이라는 선언. 수많은 이들에게 배신당했지만 그 고생 속에서 현종은 사람을 가리는 지혜를 얻었단다. 자신을 끝까지 수호한 충신들에게 분명한 보상을 주었고, 올바른 판단을 한 이들을 골라냈으며,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었지. 대표적인 이가 강감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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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이 침입했을 때 강감찬은 항복하자는 의견에 거세게 반대하며 현종의 몽진(임금의 피난을 뜻하는 말)을 주장했어. 그러나 웬일인지 강감찬이 현종의 몽진을 수행했다는 기록은 없어. 최악의 가정을 해본다면 강감찬이 몽진을 제의만 하고 무슨 이유로든 몸을 빼버렸다고 볼 여지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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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종은 강감찬을 이렇게 평가한다. “경술년(거란의 2차 침입이 있던 해)에 강감찬의 계책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는 왼쪽으로 옷을 여미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피난을 권한 전략적 판단력을 높이 산 거야. 감찰어사 이인택이라는 이가 집요하게 강감찬을 탄핵하자 되레 그를 파면해버릴 만큼 강감찬에게 절대 신뢰를 보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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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文臣)을 우대하던 고려의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무신(武臣)의 난이 일어났을 때, 현종은 계략을 꾸며 쿠데타를 일으킨 무신들은 제거했지만 그 가족들을 방면하는 관대함을 보였단다. 그뿐 아니라 1015년에는 무려 군인 1만2500여 명의 공을 인정해 관급(官級)을 높여주고 포상까지 했어. 왕의 권위가 나락으로 떨어졌던 나라에서 신뢰를 회복하고 흐트러진 힘을 모으기 위해 필요한 ‘퍼주기’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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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군인들에게 포상을 하자면 경제적 부담만 해도 만만치 않았을 거야. 신상필벌(信賞必罰)이 인사(人事)의 기본이라면 현종은 상은 통 크게 주고, 벌은 가려서 내리며 인화(人和)를 도모했다고 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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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8년 뒤 거란이 다시 침입하자 현종은 고려 백성들에게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왕의 모습을 보여준다. 강감찬에게 20만 대군을 맡기면서 자신 역시 수도방위사령관 격으로 개경 방어를 지휘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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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길이라면 지긋지긋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적의 대군이 수도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농성전을 불사하는 결의를 한 왕은, 내가 알기로는 우리 역사에 없었다. 현종은 수도 개경이 위험하다고 주력군을 불러들이지도 않았어. 개경은 내가 사수할 테니 강감찬 그대는 적을 절대로 고이 돌아가게 하지 말라는 전략적 선택이자 목숨을 건 신뢰의 소산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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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오라지 ‘개경 앞으로!’만 부르짖던 거란군은 개경의 빈틈없는 방어 앞에서 말머리를 돌려야 했고, 돌아가는 길목의 귀주에서 거란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경험하게 돼. 네가 아는 귀주대첩(龜州大捷)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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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은 최악의 상황에서 출발해서 최고의 성과를 이룬, 우리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名君)으로 기림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해. “나는 현종에게서 어떠한 흠도 발견할 수 없노라”고 한 고려 말 학자 이제현의 평가가 과할 수는 있겠으나 터무니없다고 보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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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로 태어나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외람되게’ 왕이 되었지만 수도를 잃고 수천 리 피난길에 올라야 했던 군주, 그 시련과 혼란을 딛고 동북아 최강의 나라에 맞서 그들이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할 만큼 패배를 맛보게 했던 왕, 그래서 이후 100년간 평화로운 전성기를 가져왔던 임금은 우리 역사를 넘어서 어느 나라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리더’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