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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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사태가 불거진 이후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사과’가 연속부절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람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싶은 사람부터 설마 저분이 그럴 리가.....까지 그야말로 엄청난 스펙트럼 속의 인물들이 토해내는 사과들을 들으며 카오스같은 혼란에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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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으로서 인간은 죄를 짓고 신은 용서한다는 명제에 동의하지만 죄는 인간에게 짓고 용서는 신에게 빈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범죄겠죠. 그리고 인간에게 용서를 구하는 방식이 바로 ‘사과’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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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반복하여, 인간은 죄를 짓습니다. 불완전한 존재이고 욕망에 취약한 존재이며 거짓말을 할 줄 아는 지혜와 양심을 가릴 줄 아는 배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어떤 형태의 범죄이든 법을 어기고 도덕을 넘어설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과 22절에서 예수는 범죄한 자들을 용서하는 일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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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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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좁은 인간으로서는 따르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한 번도 제대로 용서하기 어려운데 어찌 일곱 번을 , 그리고 일곱 번의 일곱 번을 용서하겠습니까. 아마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만큼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주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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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죄 지은 모두를 목매달 수 없고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어떤 규범을 어긴 이를 생매장할 수도 없다면 진심으로부터의 사과와 그를 가장 기본으로 하여 여러 조건 (처벌이나 대속 등)을 충족시킨 상태에서, 피해를 입은 이와 그 이웃들이 베푸는 용서는 인간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되풀이돼야 할 일일 겁니다. 일곱 번의 일흔 번이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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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작이 ‘사과’입니다. 그럼 사과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일곱 번의 일흔 번을 용서하라고 참 힘든 요구를 했던 예수 역시 그렇게 물렁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역시 마태복음 18장, 그 중 15절과 16절 말씀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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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에서 얻는 가르침은 사과란 그 내용도,대상도 매우 명확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받을 사람이 있으면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우리 모두의 죄입니다.”라고 뭉뚱그리는 것은 오히려 용서를 뭉개는 일이며, 자신의 허물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그 허물로 인하여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달래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라.”는 사과는 쉽게 용서를 구하기 어렵습니다. 용서를 구하기는 커녕 그 마음을 더욱 닫게 만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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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영화 배우 오달수씨나 만평가 박재동 선생의 사과가 그랬습니다. 사과문을 읽으면서 내가 급성 난독증에 걸린 것인가 걱정이 들만큼 혼란에 빠졌습니다. 뭔가 뼈를 깎는 반성을 하며 석고대죄하는 듯 하나 그 사과의 구체적인 이유를 들지 않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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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달수씨와 박재동 선생과 관련한 ‘미투’ 폭로가 나왔을 때 저는 반신반의했습니다. 목격자나 증거 없이 단둘이 있던 상황에서의 폭로라면 얼마든지 인간의 의도와 창작이 개입될 수 있기에 그렇고, 더구나 그것이 수십년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면 (오달수씨 첫 폭로자의 경우) 판단하기 애매한 구석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과를 했습니다. 즉 자신의 행동을 인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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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사과가 이래서는 안됩니다. “기억에 없는데 하여간 사과”는 수용되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또는 했다고 지적받았는지) 밝히고 그 개연성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구체적인 ‘범죄의 재구성’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달수씨도 박재동 선생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건 사과가 아닙니다.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모를 사과가 어떻게 사과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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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 예수를 빌려 옵니다. 자신의 행위를 분명히 적시하고 회개하는 절차를 외면하고, 그 허물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데 실패한 이에 대하여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입니다. 그 바로 뒤에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이건 예수의 이율배반이 아니라 전제를 규정한 겁니다. 용서의 전제는 구체적이고도 진정한 사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러지 못하는 이들을 곱게 보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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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더,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사죄하는 것은 절반의 완성입니다. 진정한 사죄를 했다는 자체로 면죄부가 발행되는 것은 아니며, 곧 사과를 받는 사람들이 그 진정성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그 앙금을 풀어 팔짱낀 손을 내밀고자 하는 마음이 들 게 할 때, 그것이 사과라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이의 마음을 울리지 못하는 사과는 그래서 의미가 적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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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상처 입지 않은 사람들이 “이만하면 되지 않았느냐. 용서해 주자.”라고 용서를 강요한다면 그는 문제의 실타래를 푸는 것이 아니라 더 꼬아대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저는 박재동 선생의 과거를 존중하고 이 일 때문에 그를 ‘기록 말살형’에 처하고 싶지도 않으며 진실한 사과와 속죄, 그리고 피해자로부터의 용서를 받은 후 다시 그분의 역량이 좋게 쓰이기를 바라는 쪽입니다만 저 사과 앞에서 “힘내세요”라는 응원이 나오는 상황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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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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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용서는 ‘푸는’ 일입니다. 그 풀기에 용기를 내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며, 풀어 주어야 할 사람들의 손을 이끌어내기 위한 진심의 크기는 그래서 중요할 것입니다. ‘미투’는 결국 사람을 죽이자는 게 아니라 사람을 살리자는 폭로이며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와 반성, 나아가 그 가해를 가능케 했던 사회적 경각을 불러일으키면서 피해자의 응어리를 풀고, 또 다른 피해자 발생을 막고자 하는 일이라 여깁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가해자의 ‘진심’입니다. 그리고 진심을 입증하는 것은 구체적인 ‘진실’입니다. 용서는 그 다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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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r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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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태가 정말 안타깝습니다. 전혀 안 그럴 것 같던 사람들마저도 폭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보면, 같은 남자로서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진실을 명확하게 밝히고 피해 당사자 및 팬들에게 진심어린 사과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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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를 기대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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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보팅합니다!!!
마지막, [밀양]의 한 장면... 보면서 어찌나 열불이 나던지요.
"죄는 인간에게 짓고 용서는 신에게 빈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범죄"
죄는 약자에게 짓고 용서는 팬들에게 비는 짓을 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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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정도는 넉넉히 아실 분인데..... 이러시니 매우 실망스럽기도 합니다만... 다시 자신의 허물을 밝히시리라 믿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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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학교를 다니며... 보고 들은 이야기들이 많지요.
그들의 권력은 너무나 오래되고... 고인물이 되었는대...
이참에 물갈이 되는것이 대한민국 예술계에는 아주 좋은 기회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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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신가요.... 저는 그저 옛 한겨레 그림판의 아우라가 아직도 휘황하여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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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의 사과는 '사과는 하지만 법정에서는 나에게 유리해야 한다.'가 기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진심을 담아 사과하기 보다는 내 것을 하나라도 어떻게 더 지킬지에 더 관심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많은 권력자들,연예인들이 범죄를 저지른 후에도 다시 그 자리에 복귀하여 영화를 누리는 것을 많이 봐왔습니다.
이 사회가 그들이 가진 권력 그 자체를 끊어버릴 생각이 없다면 그들의 진심어린 사과는 영원히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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