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에 대하여 -미투 사태에 부쳐

in kr •  7 years ago 

사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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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사태가 불거진 이후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사과’가 연속부절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람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싶은 사람부터 설마 저분이 그럴 리가.....까지 그야말로 엄청난 스펙트럼 속의 인물들이 토해내는 사과들을 들으며 카오스같은 혼란에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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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으로서 인간은 죄를 짓고 신은 용서한다는 명제에 동의하지만 죄는 인간에게 짓고 용서는 신에게 빈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범죄겠죠. 그리고 인간에게 용서를 구하는 방식이 바로 ‘사과’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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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반복하여, 인간은 죄를 짓습니다. 불완전한 존재이고 욕망에 취약한 존재이며 거짓말을 할 줄 아는 지혜와 양심을 가릴 줄 아는 배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어떤 형태의 범죄이든 법을 어기고 도덕을 넘어설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과 22절에서 예수는 범죄한 자들을 용서하는 일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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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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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좁은 인간으로서는 따르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한 번도 제대로 용서하기 어려운데 어찌 일곱 번을 , 그리고 일곱 번의 일곱 번을 용서하겠습니까. 아마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만큼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주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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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죄 지은 모두를 목매달 수 없고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어떤 규범을 어긴 이를 생매장할 수도 없다면 진심으로부터의 사과와 그를 가장 기본으로 하여 여러 조건 (처벌이나 대속 등)을 충족시킨 상태에서, 피해를 입은 이와 그 이웃들이 베푸는 용서는 인간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되풀이돼야 할 일일 겁니다. 일곱 번의 일흔 번이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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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작이 ‘사과’입니다. 그럼 사과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일곱 번의 일흔 번을 용서하라고 참 힘든 요구를 했던 예수 역시 그렇게 물렁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역시 마태복음 18장, 그 중 15절과 16절 말씀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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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에서 얻는 가르침은 사과란 그 내용도,대상도 매우 명확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받을 사람이 있으면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우리 모두의 죄입니다.”라고 뭉뚱그리는 것은 오히려 용서를 뭉개는 일이며, 자신의 허물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그 허물로 인하여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달래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라.”는 사과는 쉽게 용서를 구하기 어렵습니다. 용서를 구하기는 커녕 그 마음을 더욱 닫게 만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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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영화 배우 오달수씨나 만평가 박재동 선생의 사과가 그랬습니다. 사과문을 읽으면서 내가 급성 난독증에 걸린 것인가 걱정이 들만큼 혼란에 빠졌습니다. 뭔가 뼈를 깎는 반성을 하며 석고대죄하는 듯 하나 그 사과의 구체적인 이유를 들지 않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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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달수씨와 박재동 선생과 관련한 ‘미투’ 폭로가 나왔을 때 저는 반신반의했습니다. 목격자나 증거 없이 단둘이 있던 상황에서의 폭로라면 얼마든지 인간의 의도와 창작이 개입될 수 있기에 그렇고, 더구나 그것이 수십년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면 (오달수씨 첫 폭로자의 경우) 판단하기 애매한 구석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과를 했습니다. 즉 자신의 행동을 인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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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사과가 이래서는 안됩니다. “기억에 없는데 하여간 사과”는 수용되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또는 했다고 지적받았는지) 밝히고 그 개연성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구체적인 ‘범죄의 재구성’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달수씨도 박재동 선생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건 사과가 아닙니다.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모를 사과가 어떻게 사과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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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 예수를 빌려 옵니다. 자신의 행위를 분명히 적시하고 회개하는 절차를 외면하고, 그 허물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데 실패한 이에 대하여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입니다. 그 바로 뒤에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이건 예수의 이율배반이 아니라 전제를 규정한 겁니다. 용서의 전제는 구체적이고도 진정한 사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러지 못하는 이들을 곱게 보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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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더,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사죄하는 것은 절반의 완성입니다. 진정한 사죄를 했다는 자체로 면죄부가 발행되는 것은 아니며, 곧 사과를 받는 사람들이 그 진정성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그 앙금을 풀어 팔짱낀 손을 내밀고자 하는 마음이 들 게 할 때, 그것이 사과라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이의 마음을 울리지 못하는 사과는 그래서 의미가 적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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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상처 입지 않은 사람들이 “이만하면 되지 않았느냐. 용서해 주자.”라고 용서를 강요한다면 그는 문제의 실타래를 푸는 것이 아니라 더 꼬아대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저는 박재동 선생의 과거를 존중하고 이 일 때문에 그를 ‘기록 말살형’에 처하고 싶지도 않으며 진실한 사과와 속죄, 그리고 피해자로부터의 용서를 받은 후 다시 그분의 역량이 좋게 쓰이기를 바라는 쪽입니다만 저 사과 앞에서 “힘내세요”라는 응원이 나오는 상황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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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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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용서는 ‘푸는’ 일입니다. 그 풀기에 용기를 내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며, 풀어 주어야 할 사람들의 손을 이끌어내기 위한 진심의 크기는 그래서 중요할 것입니다. ‘미투’는 결국 사람을 죽이자는 게 아니라 사람을 살리자는 폭로이며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와 반성, 나아가 그 가해를 가능케 했던 사회적 경각을 불러일으키면서 피해자의 응어리를 풀고, 또 다른 피해자 발생을 막고자 하는 일이라 여깁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가해자의 ‘진심’입니다. 그리고 진심을 입증하는 것은 구체적인 ‘진실’입니다. 용서는 그 다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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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최근 사태가 정말 안타깝습니다. 전혀 안 그럴 것 같던 사람들마저도 폭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보면, 같은 남자로서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진실을 명확하게 밝히고 피해 당사자 및 팬들에게 진심어린 사과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네요.

그러기를 기대합니다 ㅠㅠ

풀 보팅합니다!!!
마지막, [밀양]의 한 장면... 보면서 어찌나 열불이 나던지요.

"죄는 인간에게 짓고 용서는 신에게 빈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범죄"

죄는 약자에게 짓고 용서는 팬들에게 비는 짓을 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정도는 넉넉히 아실 분인데..... 이러시니 매우 실망스럽기도 합니다만... 다시 자신의 허물을 밝히시리라 믿어 봅니다.

예술학교를 다니며... 보고 들은 이야기들이 많지요.
그들의 권력은 너무나 오래되고... 고인물이 되었는대...
이참에 물갈이 되는것이 대한민국 예술계에는 아주 좋은 기회인것 같습니다.

아... 그러신가요.... 저는 그저 옛 한겨레 그림판의 아우라가 아직도 휘황하여 ㅠㅠ

현대 사회에서의 사과는 '사과는 하지만 법정에서는 나에게 유리해야 한다.'가 기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진심을 담아 사과하기 보다는 내 것을 하나라도 어떻게 더 지킬지에 더 관심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많은 권력자들,연예인들이 범죄를 저지른 후에도 다시 그 자리에 복귀하여 영화를 누리는 것을 많이 봐왔습니다.

이 사회가 그들이 가진 권력 그 자체를 끊어버릴 생각이 없다면 그들의 진심어린 사과는 영원히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